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82화 (82/488)
  • 82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네……?”

    “조금 전의 무례를 용서받고 싶습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금발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자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그치? 제 볼을 꼬집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대신 손을 내밀어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일순 손끝이 떨렸던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릴리를 홀 중앙으로 부드럽게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러셀은 그녀를 향해 정중한 인사를 하고 있었고, 릴리도 드레스 양 끝을 잡고 우아하게 인사를 한 뒤였다.

    “어, 왜 제게 춤을…….”

    뱅그르르 돌며 릴리가 말끝을 잘라 먹었다. 조금의 희망이라도 갖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는 제게 돌아온 릴리의 손을 잡으며 다음 동작으로 부드럽게 리드했다.

    “아른프리드 공작님께 영애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영애를 꼭 뵙고 싶었습니다.”

    어째서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릴리는 지금, 남자와 춤을 추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행복했다. 마음 같아선 이 음악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제 여동생이 영애를 무척 닮았습니다.”

    “그런가요? 경의 여동생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살아 있었다면 영애와 비슷했을 겁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실례되는 말을……,”

    “아니요. 기쁩니다. 동생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가 작게 웃었다.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르네와 같은 미소였다. 정말 동생을 아꼈구나. 릴리는 그의 눈동자에 어린 씁쓸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타까웠다. 동생을 잃은 오빠의 마음이 이렇다니. 나는 우리 오빠를 두고 먼저 떠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새에 음악이 끝이 났다.

    러셀은 그녀를 향해 인사를 하곤 돌아서려 했다. 릴리는 재빨리 남자의 제복 자락을 잡으며 그를 불렀다.

    “저, 저기! 실례가 아니라면, 경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아른프리드 공작가의 릴리라고 해요.”

    “루시우스 러셀입니다.”

    “아……. 러셀 경. 그렇군요. 역시 러셀 후작님의…….”

    “네. 맞습니다.”

    “아…… 저기, 그러면……,”

    “릴리.”

    갑자기 다가온 오빠와 아버지로 인해 릴리는 루시우스를 잡을 기회를 완전히 놓쳐 버렸다. 루시우스가 공작을 향해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는 몰려드는 다른 영애들과의 인사를 정중하게 거절하며 자신을 부르는 노아의 곁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루스 경과 춤을 췄구나.”

    “아…… 네. 러셀 경이 아버님을 잘 안다고 해서……. 아버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인가요?”

    “일전에 도움을 준 적이 있지. 루스 경, 그러니까 루시우스는 지금 황실기사단 중 제 2기사단의 단장이거든. 가문과 기사단의 일로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단다.”

    “아. 그래서 조금 전 노아 님과…….”

    “맞아. 노아와는 꽤 오랜 친구라고 들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르네가 거들었다. 기사단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단장일 줄이야. 새삼 그것조차 멋있게 느껴졌다.

    “얘야, 데뷔탕트는 어땠니. 마음에 들었니?”

    “그럼요. 너무 좋았어요, 아버님. 오빠가 선물해 준 드레스도 너무 예뻤구요.”

    “그래. 그렇잖아도 네 하얀 드레스가 영애들 사이에서 난리더구나. 르네가 보는 안목이 있지.”

    “맞아요. 덕분에 너무 눈에 띄어서 부끄러웠지만요.”

    “네 데뷔탕트이니 우린 네가 눈에 띄었으면 했단다.”

    공작이 릴리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며 웃었다. 릴리는 발그레한 낯으로 연신 미소 지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잊지 못할 밤이 될 것이다.

    *

    “아이, 아가씨. 왜 그러세요?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지 말고 저희에게만 말씀해 보세요. 왜 그러시는데요, 네?”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

    “우리 아가씨가 입맛이 없다니. 그게 더 큰일인데요?”

    시종 하나의 말에 모여든 자들이 모두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릴리는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슬슬 그녀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우리 아가씨가 정말 왜 이러신담? 저희끼리 수군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맨 뒤에서 지켜보던 소녀 하나가 시종들을 뚫고 앞으로 향했다. 하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꼬마였다.

    “공녀님. 혼담 때문에 그러시죠?”

    “뭐어?! 우리 아가씨가?”

    “어머. 그랬구나. 저희는 그것도 모르구…….”

    소녀는 제 양팔을 허리에 대며 자신만만했다. 말씀해 보세요, 공녀님! 아이가 재잘거리자 릴리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기운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머, 우리 아가씨 머리가……! 시종들이 부산을 떨자 릴리는 대충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꼬마 아이를 응시했다.

    “에나. 아버님한텐 비밀이야. 알았지?”

    “걱정 마세요! 주인 어르신껜 확실히 비밀로 하겠습니다.”

    에나가 저만 믿으라며 으스댔다. 시종들은 하나같이 에나를 보고 어머어머―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랐다. 릴리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제 다리를 끌어 모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에나의 말이 맞다. 릴리가 이렇게 밥도 못 먹고 기운이 없는 건 며칠 전에 오간 혼담 때문이었다.

    “스티븐 님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런 게 아니야.”

    “스티븐 님은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시던데…….”

    스티븐은 르네의 오랜 친구들 중 하나로, 가문과 혈통이 좋은 자였다. 게다가 성격도 서글서글하며 어릴 때부터 릴리를 친동생처럼 아껴 주었다. 어느 곳 하나 모자람이 없는 남자니 그녀의 아버지도 마음에 들어 혼담을 넣은 거겠지만.

    에휴― 포로록, 한숨을 내쉬는 작은 주인을 보며 시종들이 다시 소곤거렸다. 스티븐 님이 마음에 안 드시나?

    쉿! 에나는 좌중을 진정시키고 냉큼 릴리의 앞까지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침대에 바짝 기대 릴리의 손을 꼭 잡았다.

    “공녀님. 좋아하는 분이 계신 거죠?”

    “뭐? 아가씨가?!”

    어쩜 쟤는 우리보다 아가씨를 더 잘 아는 거 같아. 깜짝 놀란 시종들이 하나둘 침대 맡으로 몰려들었다. 릴리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홱홱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래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이 벌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데뷔탕트가 끝난 지 몇 달이 지났다. 르네는 행사가 끝나자마자 국정과 변방 업무 때문에 다시 제도로 돌아갔고, 아버지인 공작도 혼담만 꺼내 놓곤 곧바로 황궁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며칠째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속만 끓었다.

    어떻게든 그분과 다시 만나고 싶은데……. 그분은 나를 기억해 주실까? 그 와중에도 작은 설렘에 잠 못 이루는 날이 길어졌다.

    “그러지 말고 주인 어르신께 말씀드려 보세요.”

    “그치만 이미 스티비랑 혼담 얘기가 나왔는걸.”

    “에이, 공녀님. 뭐가 걱정이세요? 요즘은 파혼도 부지기수래요. 아직 이야기만 나왔지, 약혼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에나의 제안이 제법 솔깃했다. 사실 릴리도 스티븐과의 혼담만 없었더라면 기회를 봐서 아버지에게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튀어나온 혼담에 러셀 경의 이야기는 쪼로록 들어가고 만 것이다.

    스티븐은 좋은 남자였다. 호쾌하고 부드러우며 자신에겐 더없이 다정했다. 만약 그 연회에서 러셀 경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릴리는 스티븐과 당연하다는 듯 혼례를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밀려드니 러셀 경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두려워졌다.

    이종족과 인간의 연애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직계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직계는 우논인 자식을 낳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한숨이 밀려왔다. 얼굴 위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진 릴리를 바라보며 시종들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에나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아가씨. 제 말씀대로 해 보세요.”

    에나가 걱정에 휩싸인 릴리의 귀에 대고 뭐라 뭐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

    “별일이구나, 아가. 네가 황궁에 다 가고 싶다고 하다니.”

    “아…… 가,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얼굴이 붉어진 릴리가 헛기침과 함께 공작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금세,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번쩍번쩍한 황궁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연회장뿐만 아니라 발이 닿는 곳곳마다 황금으로 지어진 건물과 보석이 박힌 석상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잔뜩 사로잡는 곳이다.

    “릴리. 황궁이 마음에 드니?”

    “네. 정말로 예뻐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래. 네가 마음에 든다면 됐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황궁 출입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릴리가 이렇게 황궁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인 아른프리드가 높은 작위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릴리는 아비를 따라 걸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는 기사단장. 그것도 제 2기사단의 단장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대단한 위치이다. 게다가 연회장에서 그를 바라보며 술렁거리던 군중의 관심으로 볼 때, 루시우스 러셀이라는 기사는 분명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남자인 게 틀림없다. 그를 떠올리니 다시금 볼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아버님.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래. 마냥 기다리기 힘들면 근처 정도는 둘러보아도 괜찮단다. 이미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이니, 혹 누가 물어보거든 내 이름을 대거라.”

    “네, 아버님.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공작은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도 못내 걱정이 되는 것인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릴리는 아버지를 안도시키기 위해 활짝 웃으며 계속해서 손을 흔들어 주어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궁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완전히 혼자가 될 수 있었다. 내심 기다렸던 시간이긴 하지만, 막상 아버지까지 없으니 살짝 두려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바보같이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 릴리는 에나가 귀띔해 준 것들을 상기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거대한 성문을 지나 황궁으로 이어지는 광장은 상당히 정갈하게 잔디가 깔려 있었다. 발로 밟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장을 사뿐사뿐 지나치며 릴리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라고 들은 것 같은데…….”

    초조함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긴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붙잡았다. 광장에서 모퉁이만 돌면 기사단이 훈련하는 곳이라고 언뜻 르네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릴리의 발걸음은 점점 조급해져, 사뿐사뿐 걷던 걸음이 어느새 빠른 보폭으로 변해 있었다.

    “독수리다.”

    “어? 저 사람…… 단장님 동생 아니야?”

    “아냐. 머리가 빨간색이잖아.”

    “근데 얼굴이……. 그분이랑 완전 똑같은데.”

    “멍청한 놈아. 그분은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무슨.”

    “아아.”

    들려오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릴리의 다급한 발이 멈춰 섰다. 그녀가 남자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니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남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와―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넋을 놓은 것처럼 릴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여 있던 기사들이 하나같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름답다고 소문난 우논 중에서도 직계의 피는 말할 것도 없었다. 릴리를 바라보던 기사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는 또박또박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분명하게 들었다. 단장님이라고. 그분의 동생을 내가 닮았다고.

    ‘제 여동생이 영애를 무척 닮았습니다.’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안에 조금은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구나. 나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날 보고 그분의 여동생을 떠올릴 정도라니. 릴리는 밀려드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사들의 앞에 섰다.

    “혹시 러셀 단장님을 뵐 수 있을까요?”

    “다, 단장님은 지금 화,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가셨는데요…….”

    “아, 황궁에 계신 건 맞군요. 감사합니다. 혹시 언제쯤 오실까요?”

    “그, 글쎄요. 전하께서 직접 부르신 거라 저희도 잘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

    “예…….”

    여전히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릴리는 또 걸음을 옮겼다. 이곳으로 오면서 태자궁을 스치듯 보았다. 공작은 태자궁엔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그쪽엔 절대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릴리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태자궁의 입구에 서서 기다릴 참이었다. 어쨌든 그가 나올 곳은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면 어떻게든 만나지 않겠나. 끈기 있게 기다릴 것이다.

    묘하게 얼굴에 생기가 살아났다. 혼담이 오가는 동안 방에 들어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안 그래도 약한 몸에 체중이 더 빠졌다. 혈색 없이 창백하던 낯에 이제야 화색이 돌았다. 릴리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태자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행복한 표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태자궁으로 가는 길목도, 도착한 이후에도 그녀를 향한 시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붉은 머리는 어딜 가도 눈에 띄는 데다가 화려한 우논의 외모 때문인지 인간들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건 마치 우리에 갇혀 전시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눈에 띈다고 해서 누군가의 시선이 붙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닌데. 누군가의 화분 속에서 자라야만 하는 식물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웃었다. 잘하면 러셀 경을 볼 수 있어. 그러니 웃음이 터질 수밖에.

    “이브?”

    릴리의 말갛게 웃던 얼굴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직 여긴 태자궁이 아닌데…….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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