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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80화 (80/488)
  • 80화

    숨이 조금 모자랐다. 오랜 시간을 물속에 머물면서 숨소리가 가빠졌다. 동시에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잊고 살았던 흉터가 벌어지는 것처럼.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듣고 싶었다. 내 존재를 부정하든, 인정하든.

    “그 애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

    “죄가 없기 때문에.”

    “…….”

    “살렸어야 했다.”

    그래서 검을 잡지 못한다. 원래 눈이 좋은 독수리들은 검보다 활을 더 잘 사용하지만, 르네에겐 검이 더 편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검을 손에 잡지 못했다. 날카로운 칼날에 연한 붉은 피가 흐르는 모습이 잔상처럼 기억에 남아서. 화살도 잡기 어려웠고, 심지어 펜조차 잡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황족이란 이름 때문에 죄 없는 어린아이까지 죽였던 건 오롯이 우리의 잘못이다. 심지어 황녀란 아이는 대외적으로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는 아이였는데. 나는 어쩌자고 그 아이마저 죽였을까. 아비의 피가 더럽다고 자식의 피까지 내가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후회가 시작된 건 이엘을 만난 뒤부터였다.

    그는 황녀를 닮은 이엘을 볼 때마다 늘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불편했다. 자신의 죄를 들춰내려는 것처럼 소년의 존재 자체가 불편했다. 하루빨리 죽으라고 종용하는 신의 계시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소년은 저주받은 제 종족을 찾아온 신의 선물이었다. 죽어 가는 새끼 독수리를 살렸고, 미래가 암담한 종족에게 뜻밖의 선물을 전했다. 마음 깊이 병들어 묻고 살던 동생을 완전히 보내 줄 수 있게 해 줬고, 닫혀 있던 자신의 자물쇠를 끊어 냈다.

    독수리를 구원했다.

    “……폐하는 좋은 왕이십니다.”

    뚝뚝,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물기에 젖어 머리가 평소보다 더 길어 보였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보다 조금 더 아래에 닿았다. 르네는 어느새 목욕을 마치고 로브를 몸에 칭칭 둘러싼 이엘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좀 이상하다.

    “너. 뭔가 다른…….”

    “네?”

    르네는 참지 못하고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늘 위로 날아오른 독수리는 이엘의 머리 위를 뱅뱅 돌며 눈가를 찌푸렸다. 붉은 눈동자가 작게 일렁거렸다. 이엘은 르네의 의중을 몰라 당황했다.

    “왜 그러십니까, 르네 님?!”

    커다란 독수리는 요요한 눈으로 창공 위에서 이엘을 내려봤다.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니 더욱더 간지럽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괴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본체화를 해야만 했다. 더 이상은 욕구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다가는 금방이라도 저 작은 소년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르네 님?”

    “어제저녁에 뭘 먹었지?”

    “르네 님께서 가져다주신 열매 몇 알을 먹었습니다.”

    그럼 소화가 잘못된 냄새는 아닌데. 르네는 제 코를 간지럽히는 이상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지만…… 이상하게 몸이 떠나질 않았다. 본능적으로 르네는 제 발이 이곳에 묶여 있음을 느꼈다.

    호감. 그런 감정이 깊어진 건가? 이제 호감 정도도 아니라는 건가?

    감정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괴로운 건 늘 그 감정을 시작한 쪽이었다. 르네는 이 관계가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랐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일이니까. 인간을 사랑하는 일 따위,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 그건 정말 천벌이다.

    그때였다. 바스락바스락, 풀숲이 흔들리더니 검은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아 님?!”

    “…….”

    “언제 일어나셨어요? 몸은 괜찮……,”

    그는 이엘을 향해 무언가 툭 뱉었다. 이엘은 풀숲에 떨어진 그것을 주워 들었다. 녹색 보석이 햇빛에 반사돼 번쩍거렸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안일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황자의 반지를 왜 네가 갖고 있지?”

    “그건……,”

    “네 것이냐?”

    “폐하. 그것은…….”

    “아니면 네 오라비의 것인가.”

    눈동자가 커졌다.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오라비라니……? 왜 그런 말을…….

    “네 몸에서 진동하는 암컷의 냄새를.”

    “…….”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게 우습군.”

    “…….”

    “어디까지 우릴 바보로 취급하는 건지.”

    사색이 된 채, 그녀는 마지막으로 약을 마셨던 날짜를 손으로 세었다. 아― 마지막은 마시지 못했다. 바닥에 죄 깨뜨렸으니까.

    ‘마실 수 없다면 향을 몸에 발라야만 해. 하지만 몸에 바르는 건 오래 지속되지 않아. 명심해.’

    손끝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너는 대체 내게 거짓말을 몇 개나 한 거지?”

    “…….”

    “네 아비는 연구원이 아니었고.”

    “…….”

    “너는 남자도 아니며.”

    “…….”

    “심지어 황족이었다니.”

    “폐하.”

    “내게 진실되려는 마음은, 있긴 있었나?”

    너의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는 날 얼마나 기만한 건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우리 무리에, 너는 완전히 속하지 않았던 거군.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면서. 늑대가 이를 드러내며 적의를 표하자 이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비밀이 많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무리에 넣은 것은 노아 본인의 선택이었다. 주드를 구했고, 새끼들을 구했고, 자신의 마음까지 구했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게 드러난 순간, 노아는 배신감으로 얼굴이 물들어 버렸다.

    우리는 곁을 주었고, 무리가 되어 주었고, 마음까지 주었다. 하지만 넌 정말 단 한 순간도 우리에게 마음 따위 준 적이 없었다고? 우리를 믿지 못했다고? 기꺼이 너의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는 우리에게, 정말 진실된 적이 없었다고……?

    내가 네겐, 정말 믿을 수 없는 존재였어? 그 사실이 노아에겐 커다란 상처였다. 마치 홀로 짝사랑하는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괴로웠다.

    “왜. 그것 또한 황궁에서 훔쳤다고 할 것인가?”

    “…….”

    “그럼 네 몸에서 진동하는 그 냄새는. 어떻게 해명할 건데?”

    “…….”

    “네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라는 증거는. 어떻게 보여 줄 것이냐.”

    손에 쥐고 있던 이온의 반지가 오늘따라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세차게 뛰는 제 박동을 따라 손바닥 안도 떨렸다. 선택의 기로에 섰고,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수만 가지의 해결책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관계가 모조리 깨졌으니까.

    이엘은 말없이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 드러났다.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다 말을 하죠?”

    “…….”

    “나를 죽였잖아요. 나를 죽이려 했잖아요. 나는 당신들의 숙청 대상이었잖아요.”

    그녀의 가슴 위로 검 자국이 흉터가 되어 길게 남아 있었다. 일곱 살, 그 어린 나이에 여린 살결 위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는 10년이 지나도 길어지고 커졌을 뿐,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상반신을 다 덮을 정도로 보기 흉한 상처와 쇄골 아래 인식표가 있던 곳의 흉터까지. 온몸이 엉망이었다.

    아……. 르네는 신음을 삼켰다.

    그 상처가 확실하다. 자신이 황녀에게 휘둘렀던 그 검 자국이 확실하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바닥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새파랗게 질렸다. 어떻게 네가 그 황녀란 말인가. 네 몸에 새겨진 그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내가 만들어 버렸는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제 감히 널 바라볼 수도 없게.

    인간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말 따위의 하찮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건 그것보다 더 끔찍한 현실이었다. 차라리 저 아이가 황자였다면…… 그게 더 나았을 정도로 르네에겐 괴로운 진실이다.

    “진실될 수 없게, 당신들의 세계에서 날 지웠잖아요.”

    “…….”

    “내가 존재하면 안 되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잖아.”

    주저앉아 로브로 몸을 다 덮은 채 줄곧 참았던 눈물을 숨겼다.

    조각이 났다. 그의 말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우리 관계가, 어렵게 지켜 냈던 나와 당신의 관계가 완전히 끝이 났다.

    두려웠다. 언젠가 밝혀지고 말 진실이 늘 두려웠다. 그래서 몇 번이고 연습했다. 영지로 돌아가면 말해 보자. 마음을 다 추스르고 말해 보자. 노아라면, 그라면 분명…… 날 이해하고 받아 줄 거야. 내가 먼저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야. 그렇게 되뇌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용기를 가졌다. 그래서 얼마나 준비를 했는데…….

    이런 식은 싫었다. 서로를 탓하느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가 박혀 있는 이런 식은 정말 싫었다.

    되돌리고 싶었다. 부주의하게 날짜를 세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조금 더 돌려서 멍청하게 바닥에 약을 쏟지 말았어야 할 그때로. 아니, 조금 더 돌려서 노아와 가까워졌던 그때로. 서로 믿기 시작한 그때, 나는 다 말했어야 한다. 그랬어야 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에게 끔찍한 현실이고 진실이었다.

    1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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