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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9화 (79/488)

79화

“보지 마십시오!”

“…….”

“목욕 중입니다!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씻고 가겠습니다.”

잔뜩 웅크린 작은 소년의 등을 끝으로 르네가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은 참 예민하군. 같은 수컷끼리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건지. 결국 그는 수풀에서 손을 떼고 등을 완전히 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엘을 홀로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르네는 커다란 떡갈나무에 등을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보지 않을 테니 염려 말고 씻어라.”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주변에 다른 이종족이 있으면 어쩌려고.”

이엘은 그의 말에 달리 대꾸할 수 없었다. 하긴. 자신이 갖고 있는 무기라곤 르네가 준 금화살이 전분데 그마저도 씻는다고 저 멀리 옷과 함께 놔두고 왔으니. 내키진 않지만 그의 말을 믿으며 수면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소년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르네의 귀에 들렸다. 오늘따라 이상했다. 왜 자신은 오드가 해도 될 일을 굳이 자처했을까. 게다가 근처에 이종족은 무슨. 제 눈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 산임을 똑똑히 확인했거늘.

설령 이종족이 나온다고 한들, 이 녀석은 웬만한 이종족을 만나도 거뜬히 해치울 정도로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한 편이었다. 굳이 위험에 취약한 존재를 고르라면 외려 오드 쪽이 염려될 정도였으니까. 성력만 없었으면, 쓰러질 것 같은 허약함은 그쪽이 더 잘 어울렸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실없이 웃음이 나는 경우가 다 있군.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저 작은 소년이 총을 쥐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결국 르네는 웃음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간지러워요.’

그건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이틀 전, 제 품에 안겨 눈을 감은 소년의 얼굴을 밤새 뜯어보았다. 녀석은 기억조차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날 자신은 홀린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르네는 그 작은 숨소리를 밤새 들으며 한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파르르 떨리던 눈썹도, 작게 달싹거리던 입술도, 열기에 덴 흉터도. 눈에 각인하듯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나,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르네 님. 거기 계십니까?”

“말해라. 여기 있으니.”

“일전에 제가 폐하께 무언가 여쭤보면 답을 주신다고 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그랬지. 성 안에만 지내는 게 가여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적이 있었지.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릴리의 이야기를 털어놨던 그 밤이었다. 그날 자신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점자에 대한 값이라고.

“메이슨의 아버지는. 정말 폐하께서 죽이셨습니까?”

“…….”

메이슨이 말한 건가. 아니면 후작? 르네는 답하지 않았다. 그게 질문인가? 그의 물음에 이엘이 연이어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

“인간 여자를 죽였기 때문에…… 죽이셨습니까?”

2차 종족 전쟁은 이종족과 인간, 정확히 말하면 제도에서도 권력을 쥐고 있던 상층부 인간들과의 전쟁이었다. 20년 전의 전쟁이 일방적인 학살이었던 것처럼, 10년 전의 전쟁도 사실상 황족과 귀족을 향한 일방적 학살이었다.

그들은 이 모든 끔찍한 상황을 초래한 악의 근원이었고 그들을 죽여 모든 악습과 폐단을 바로잡겠다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모두가 한정적인 전쟁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중 독수리는 원한이 가장 깊었던 종족 중에 하나였다. 암컷들이 죽기 이전에도 이미 눈알로 인해 밀렵꾼들에게 사냥당하기 일쑤였고, 보란 듯이 박제를 당하기도 했다. 의도적인 유언비어로 학살당해 왔던 뱀과 마찬가지로 암컷의 눈알이 더 좋다는 풍문을 퍼뜨려 대놓고 멸종시켜 버렸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공작이란 작위가 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최하위 계층이었다.

심지어 선대 공작, 르네의 아비는 릴리가 끌려가고 목숨을 잃은 뒤 황제에게 항명하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독수리들은 한순간에 연인을 잃고, 가족을 잃었으며, 종족의 우두머리를 잃었다. 당시에 그들의 원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인간들은 알지 못한다.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게 질문이냐.”

“네. 그렇습니다.”

“그게 알고 싶어? 왜지. 너랑 별 상관없을 텐데.”

“…….”

“그래도 그게 네 질문이라면 마땅히 답을 해야겠지. 약속을 했으니.”

“…….”

“맞다. 나는 무리의 절반을 죽였다. 허락 없이 인간을 학살했기 때문에.”

“…….”

“마음대로 똑같은 짓을 벌였기 때문에.”

끔찍한 시간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장 아끼는 나의 종족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 마음을, 너는 알까? 그들의 원한을 누구보다 알면서도 벌해야만 했던 내 심정을 네가 알까. 나 역시 원한의 크기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억지로 억눌러야만 했던 내 마음을 네가 알까.

아니. 인간들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너희들은 우리의 마음을 몰라.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린 인간의 멸종을 바란 게 아니다.”

“…….”

“우리가 감히 어떻게, 너희를 멸망시키겠나.”

“…….”

“그래도 한때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가족이었고, 전부였는데.”

그럴 순 없었다. 그들을 죽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섞여 살았기 때문에. 너희는 우리와 한데 섞여 사는 게 불쾌했겠지만, 우린 이 오랜 시간을 살면서 그 순간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추억했으니까. 그래서 전부 죽일 수 없었다. 신의 대리를 자처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고여 있던 물이 터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독수리들이 그 전쟁에서 인간 여자 학살에 가장 많이 일조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배우자를 빼앗겼고 사랑하는 딸을 빼앗겼고 친구를 빼앗겼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할 단 하나의 반려자를 빼앗겼기 때문에 복수에 눈이 멀었다.

르네는 10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왕들을 필두로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황실과 연구실을 습격해 소탕하던 중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의 무리 중 상당수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빠르게 본거지로 돌아와 독수리들을 찾으러 갔지만, 이미 모든 학살이 끝난 뒤였다.

여자에게 심어진 인식표를 찾는 기계를 들고 있는 뱀들과 숨어 있는 자들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던 독수리들. 다름 아닌 뱀과 손을 잡고 자신의 능력을 그딴 곳에 사용하고 있는 제 종족을 보며, 르네는 절망하고 말았다.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 내 종족을, 내 손으로 죽였다.”

그래서 많은 새끼 독수리가 어미를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아비까지 잃었다. 메이슨이 그런 경우였다. 르네는 자신이 폭군임을 이미 인정했다. 누굴 위한 처벌이었나. 결국 남겨진 피해자만 더 괴로워진 처벌이었다. 차라리 묻어 두었더라면 나았을까. 차라리 모른 척, 눈을 감았다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지금까지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최악은 거듭되고 있었다. 애초에 전쟁을 벌인 게 죄였다. 피로 이긴 승리는 절대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꽤 길게 이어졌다. 모두에게 상처를 안겨 준 과거를 두고, 그렇게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거진 수풀을 타고 독수리의 고통이 이엘에게 전해졌다.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르네는 분명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한 종족의 왕이었지만 또 한 독수리의 오라비였다. 만약 그가 동생에 대한 복수로 전쟁을 일으켰다면 그는 자신의 백성들을 용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종족의 왕이었고, 왕으로서 마땅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다.

이미 무리에 암컷이 사라져 반토막이 났고, 거기에 뱀과 연합한 자들을 처벌하느라 또 반토막이 났다. 암담한 미래에 잘못된 일을 저지를까, 영리하다던 독수리의 왕은 몇 남지 않은 독수리들을 데리고 집단 자살을 생각했다. 그게 자신과 자신의 무리가 할 수 있는 속죄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나 인간과 달랐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됐을까요.”

“…….”

“누가 먼저 잘못하고, 더 잘못하고…… 그런 걸 다 떠나서.”

“…….”

“우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요.”

이엘은 물속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삼켰다.

전쟁 통에 나만 이온을 잃은 게 아니었다. 나만 유모를 잃은 게 아니었어. 내가 홀로 남겨져 아득바득 살아가는 건 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죽음 속에서 살아난 건 나였고, 생명이 떠나가지 않은 건 희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모습이었다.

……사실은 계속 살고 싶다.

삶의 유일한 미련이라며 이온을 방패 삼아 목숨을 이어 가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도 살고 싶었다. 아르세니온 황자를 살리기 위한 황녀가 아니라, 나타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목소리’는 정확했다. 나는 내 목숨값을 주고 이온을 살릴 용기가 없었다.

조금 더 사람답게, 조금만 더 평범하게. 늑대들과 지내면서 함께하는 삶이란 게 무엇인지 알아갔다. 외로움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무리와 가족이란 단어를 배워 갔다. 때때로 이온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사실은 그 순간이 매일매일 행복했다.

그런데 내가 이래도 될까. 죽지 않아도 될 평민들은 죽어 버리고, 죽어야 할 황녀는 살아 버린 이 상황에. 내가 살고 싶어 해도 될까.

“만약에 말입니다.”

“…….”

“만약에. 당신이 죽였던 그 황녀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인 줄 알았더라면. 그때 르네 님은 그 황녀님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을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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