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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8화 (78/488)
  • 78화

    그러나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

    “쉿.”

    “…….”

    “내가 되찾으러 가겠다는 말은 전혀 듣지 않았나 보군.”

    이엘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머리를 가린 그녀의 망토를 벗겼다. 축축하게 젖은 녹색 눈동자가 르네를 슬프게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르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네 눈물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오헬.”

    “…….”

    “저놈이 그 늑대를 죽인 놈인가.”

    그대로 화살이 날아갔다면 이엘의 위치는 발각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가진 무기라고는 자신이 준 금화살이 전부였다. 목표물을 죽이면 다행이지만 그마저도 실패할 경우, 그 어떤 상황보다 최악이 될 터였다. 영지를 돌아보며 수습하던 르네의 눈에 익숙한 망토 자락이 들어와 다행이었다.

    “기회가 올 거다.”

    “…….”

    “지금은 아니야.”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르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솔한 선택이었다. 눈앞의 복수에 급급해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자칫 잘못하면 결계를 쳐 둔 동굴도 위험했을 텐데.

    노아는 자신에게 더는 그 어떤 것에도 주드를 투영하지 말라고 했다. 그 얘기는 비단 어린 개체에게 주드의 모습을 찾지 말라는 뜻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주드의 그늘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도, 르네의 말도 모두 맞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손등으로 대충 눈을 닦은 이엘이 르네의 옷 끝을 꾹 잡았다.

    “노아 님이 아프세요.”

    “역시. 무리라고 생각했다.”

    “도와주세요.”

    “영지는 아직 수습이 안 됐어. 조금 걸릴 것이다.”

    “아뇨. 독수리의 영지로 가진 않아요. 돌아가야 합니다. 늑대의 영지로 돌아갈 거예요.”

    “…….”

    “이제…… 돌아갈 준비가 됐어요.”

    르네는 말없이 이엘을 바라보다가 소년의 앞머리를 제 손등으로 톡톡 건드렸다. 기특하다는 표시였다. 그는 몇 달을 이엘과 함께 지내며 그녀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부분만큼은 노아에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결국 잘 견뎠다. 잘 이겨 냈다. 역시 인간답게, 잘 극복했다. 르네는 그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격려했다.

    르네와 이엘은 기척을 숨기며 동굴에 도착했다. 왕의 등장은 절망을 억지로 떼어 내려던 독수리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다. 버려지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승리했다는 성취감에 독수리들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후작이 이끄는 기사단 역시 동굴에 도착했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앞을 못 보는 독수리들을 태우고 영지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오헬. 가는 거야?”

    “응. 잘 지내, 메이슨.”

    “나중에 또 우리 영지로 놀러 와.”

    “응.”

    “나, 할아버지한테 점자를 배우기로 했어.”

    “잘됐다.”

    “응. 내가 열심히 배워서 테르들한테도 알려 줄 거야. 할아버지랑 함께 점자책도 많이 쓸 거고.”

    “…….”

    “다음에 만나면 내가 점자로 만든 책, 꼭 보여 줄게.”

    마치 어느 영지의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이엘은 꼭 그러자며 메이슨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 이별을 마쳤다. 후작의 등에 올라탄 어린아이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영지가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하나둘 떠나 버리고 동굴 안엔 이엘과 오드, 르네와 노아만 남겨졌다.

    “새벽이 밝는 대로 근위대가 뒷산을 습격할 것이다. 뱀들이 후퇴를 계획 중이나, 혹 남아 있을 끄나풀들을 처리하는 동안 너흰 내 등에 올라타 돌아가는 것으로 하지.”

    “네.”

    “춥진 않나.”

    “괜찮습니다.”

    노아의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다. 짐이 되기 싫은 건지, 그게 아니면 정신력으로 버티느라 고통을 참고 있는 건지. 하여간 억척스러운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이다. 르네는 말없이 제 제복의 겉옷을 벗어 이엘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커다란 르네의 옷이 바닥에 질질 끌리자 이엘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옷이 더러워집니다.”

    “네가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냥 입어라.”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이엘은 손등을 제 이마 위에 올렸다. 살짝 뜨뜻하다고만 느껴졌던 이마가 어느새 열에 휩싸였다. 노아가 저렇게 아픈데 자신까지 짐이 되긴 싫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흔한 일이니까. 뜨거운 입김을 손에 후후 불었다. 확실히 동굴은 영지보다 추웠다.

    오드는 동굴 입구 쪽에 결계를 치고 성력으로 그녀의 보온에 신경 써 주었다. 괜찮다며 고개를 흔든 덕분에 그의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은 면했다. 닿자마자 잔소리를 할 게 분명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잘 자라며 오드의 등을 떠밀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오드가 다시 한 번 결계를 확인한 후 입구 쪽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갑자기 훅 올라오는 열감에 이엘은 눈을 질끈 감고 동굴 벽 가까이에 누웠다. 얇은 옷 위에 망토와 제복 겉옷만 걸쳤으니 추울 수밖에. 끝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달달 떨었다. 이 정도로 감기에 걸려선 안 돼. 푹 자자.

    몇 번의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붙잡으려는 때에, 누군가 제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커다란 독수리는 집채만 한 날개를 펴 이엘의 몸을 감쌌다. 독수리는 풍채를 부풀리며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보냈다. 오들오들 떨던 이엘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르네 님…….”

    “가까이 와라.”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그녀는 독수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포근하고 따뜻한 날개가 그녀를 덮어 추위를 멎게 해 주었다.

    르네는 물끄러미 인간 소년을 내려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머리카락이 자라, 어깨 위에서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렸다. 저기서 조금 더 자라면, 그 황녀와 비슷할까.

    아니. 이젠 상관없다. 황족이고 뭐고, 독수리는 이제 황족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설령 눈앞의 이 소년이 죽은 줄 알았던 황자일지라도. 르네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종족 간 설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독수리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르네는 이엘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는 제 품에 다가와 끙끙 앓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팔 위에 소년의 머리를 조심스레 올려 주고 다른 손으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오늘따라 소년의 몸에서 기이한 향이 풍기는 것 같다. 본능적으로 이끌려 가는 체향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인간 소년의 가는 목덜미를 엄지로 쓸었다. 그녀의 푸른 핏줄이 열기와 섞여 그의 손가락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추워…….”

    앓는 소리를 하는 인간을 제 몸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이엘도 르네의 품에 파고들 듯 얼굴을 파묻었다.

    호감의 감정조차도 갖지 않기로 했는데. 릴리의 죽음으로 인간의 역겨움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인간과 이종족의 우호 관계는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지 않았던가.

    하지만.

    “……간지러워요.”

    “…….”

    “어서 주무세요, 폐하.”

    꿈결에 웅얼거리며 더욱더 제게 파고드는 인간을 바라보니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네 손가락.”

    “…….”

    “많이 고생했구나.”

    곤하게 잠들어 제 말을 듣지 못하는 소년의 손가락 끝을 가만히 잡았다. 그러곤 제 입술을 그 작은 손가락 위에 묻었다. 소질도 없는 피아노를 치겠다며 그간 고생한 손가락이, 그의 눈엔 더없이 기특했다.

    조금 더 알려 주고 싶은데.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좋겠는데. 며칠만 더 있으면, 네게 춤을 완벽하게 가르쳐 줄 수 있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쉬웠다. 비로소 대화가 통하고 취향이 맞는, 그런 존재를 만났나 싶었는데.

    “잘 자라, 오헬.”

    나의 영지에 네가 있으면 좋을 텐데.

    *

    “……엘……. 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오드가 걱정 어린 낯으로 그녀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왜 그래, 오드……?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새벽 미명이었다. 그러나 동굴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이엘은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출발해야 돼, 엘.”

    “아. 그랬지, 새벽에 출발한다고…….”

    주섬주섬 마르지 않은 옷을 주워 입고 노아의 곁으로 먼저 향했다. 여전히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밤새 열은 내린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열이 내렸네. 커다란 독수리가 열에 들뜬 자신을 날개로 덮어 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통 기억나질 않는다.

    이엘은 시선을 모로 틀어 옷을 털고 있는 르네를 보았다. 그는 제복을 털다가 저를 바라보는 이엘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포갰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이엘은 르네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고 르네는 가볍게 그 인사를 받았다. 난리 속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인사였다.

    한편 독수리들은 제 왕의 명령을 받아 뒷산을 소탕 중이었다. 대부분의 뱀들은 리플의 명령대로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지만 르네의 예상대로 끄나풀들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를 처리하는 건 독수리들에게 일도 아니었다. 투시로 은신까지 꿰뚫을 수 있는 독수리는 뱀들에게 최악의 천적이었으니까.

    근위대가 뒷산을 점령한 것을 확인한 르네가 빠르게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서 타라.”

    이엘과 오드는 노아를 먼저 태웠다. 뒤이어 이엘이 올라탔고 오드가 결계를 지우며 마지막으로 르네의 등에 탔다. 거대한 독수리는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하늘 위로 솟구쳤다. 대지와 창공을 빼곡하게 채운 독수리들 덕분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괜찮아, 엘?”

    “응. 그럭저럭.”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속이 메스꺼웠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오드의 성력이 제 몸을 감쌌지만 땅을 내려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이엘은 노아의 옆에 나란히 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모로 누워 노아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겨 주었다. 다행히 노아 쪽은 경과가 좋아지고 있었다.

    “왕께선 곧 깨어나실 거야. 밤새 많이 회복하셨어.”

    “응. 다행이야.”

    그는 우논이었고, 그중에서도 직계인 왕이었다. 이 정도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멀끔히 나을 테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눈을 감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본다는 건 여러모로 그녀에게 고통이었다. 부디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 눈을 뜨면 좋을 텐데……. 이엘은 노아의 옆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비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좋은 환경이라곤 날씨뿐이었다. 마치 먹구름이 알고 피하는 것처럼, 그들이 가는 곳만 날이 밝았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극악의 상황이었다.

    몸이 좋지 않은 이엘은 물론이고, 쉴 틈 없이 결계를 치며 성력을 사용하느라 오드 역시 안색이 나빴다. 두 사람 모두 늑대와 독수리의 영지에서 긴장을 풀 새도 없이 전쟁을 연이어 겪었다. 이대로 가다간 노아가 깨어나기도 전에 누구 하나 쓰러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르네마저 이상하게 온몸이 간지럽고 열기가 느껴지는 탓에 빠른 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온 신경이 흐트러져 좀체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르네는 가까운 산 중턱으로 활강해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쉬었다가 가지.”

    이엘은 마지막으로 노아의 안위를 살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 근처 좀 다녀올게. 오드의 대답을 듣지 않고 이엘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오드는 결계 치는 것을 마무리 짓고 이엘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르네가 그를 말렸다.

    “내가 따라가겠다.”

    “제가 가는 편이……,”

    “아니. 넌 노아를 지키도록. 오헬은 내가 살필 테니.”

    그렇게 말하고 르네는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 이엘의 냄새를 따라 르네는 주변을 살폈다. 내려오기 전에 이곳을 뱅뱅 돌며 이종족이 없는 것을 확실히 확인했으니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인간이 혼자 돌아다니는 건 썩 내키지 않는다. 바스락, 그가 밟은 나뭇잎이 으스러지는 소리에 저 너머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르, 르네 님이세요?!”

    평소완 다르게 고음으로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에 르네가 황급히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려 했다.

    “오, 오지 마십시오!”

    새된 비명이 다시 터져 나오자 수풀을 걷어 내려던 손이 주춤했다. 그의 예리한 눈의 능력이 우거진 수풀을 지나 커다란 계곡까지 닿았다. 소년은 그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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