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는 인간이었다. 이종족과 인간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릴리는 공작의 딸이었다. 직계는 되도록 이종족과 결혼하는 게 그 당시의 풍습이었다.
연회에서 만난 남자는 낯설어하는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그의 친절함에 반해 버린 릴리는 한동안 상사병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결국 공작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그와의 만남을 주선해 보려 했지만 거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남자는 황실기사단이었고 가정이 있는 자였다.”
“…….”
“결국 릴리는 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어.”
그러나 연정이 어떻게 쉽게 사라질까. 끝끝내 제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지독한 짝사랑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릴리가 황실로 잡혀 갔을 때. 누가 그 아이를 데려간 줄 아나?”
갑작스런 르네의 물음에 이엘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그자였다.”
“…….”
“릴리가 사랑했던 그 남자.”
“…….”
“그러니 내가 인간을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을 다 빼앗았는데, 인간을 좋아할 수 있을까.
“물론 그자는 내 손으로 죽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자만큼은 내가 죽여야 했으니까.”
“…….”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는 걸, 나는 릴리를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다시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좋아해서도 안 된다고. 르네는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춤을 봐줄까?”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 못한 화제였다. 릴리의 이야기로 줄곧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려는 것처럼. 이엘은 들으면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키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르네는 이엘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엘은 황실에서도 보지 못한 예우에 살짝 당황했다.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주저하던 손을 얹었다. 르네는 제 손바닥에 놓인 이엘의 손을 맞잡아 세웠다. 그러곤 그녀의 허리 위에 다른 손을 얹었다. 동시에 이엘도 르네의 어깨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원래 연회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 함께 춤을 추는 게 일반이었지만, 때론 분위기에 따라 어른과 아이가 함께 추기도 했다. 내일 열릴 연회가 바로 후자였다. 어린 독수리들을 에스코트하며 리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른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
“저는 누구와 함께 첫 춤을 춰야 하는 건가요?”
“…….”
“메이슨은 후작님이랑 춘다고 해서요.”
메이슨 말고는 아는 어린 독수리가 없어요. 고개를 아래로 내린 채,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 이엘이 주절거리듯 토로했다. 하긴, 제게 에스코트받고 싶어 할 독수리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들 나만 보면 코부터 막던데. 그 말을 하면서도 이엘은 혹 발에 걸려 넘어지진 않을까, 고개를 위로 들 수가 없었다.
르네는 어리숙하게 리듬을 타는 인간 소년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싹 잡아당겼다. 제 허리에서 느껴지는 힘 때문에 이엘이 몸을 흠칫 떨었다. 움직이던 발도 차차 멈추며 줄곧 내려 박고 있던 시선을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후작에게서 메이슨을 뺏어 주면 되겠나.”
“무슨……!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답답해 죽겠네. 가기 싫단 거잖아! 이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못 알아먹겠네, 이 독수리. 머리 좋은 거 맞아?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발에서 왼발로 넘어가는 구간이 늘 문제였다. 가볍게 살짝 뛰어서 자연스럽게 왼발로 착지를 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아니면 메이슨에게서 후작을 뺏어 주는 건.”
“그거 농담이세요?”
역시나 왼발의 발꿈치를 오른발로 치고 만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달밤에 춤을 추고 있는 이 상황도 웃기고, 저 눈치 없는 독수리의 왕이 던지는 농담도 어이가 없어서 웃겼다. 딴에는 웃기려는 것 같은데.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들었다.
“아니면 폐하께서 절 에스코트해 주시겠습니까?”
“…….”
“그게 아니면 제가 폐하를 에스코트하는 것도 좋습니다.”
“뭐?”
“아시다시피 이 영지에서 저와 이야기를 해 주는 건 오직 폐하뿐이라서요.”
제가 에스코트받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폐하를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마치 골탕 먹이려는 듯 피실피실 웃으며 저를 쳐다본다. 르네는 기가 찬 대답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제 쪽으로 확 잡아당기는 그녀의 동작에 발이 꼬여 앞으로 몸이 기울었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기도 전에, 제 품에 작은 체구가 들이닥쳤다.
“이제 보니 폐하도 춤 쪽으로는 영 실력이 없어 보이시네요.”
굳이 받아 주지 않아도 되는데 품 안으로 들어와 저를 잡아 준 이엘이, 르네를 보며 얄밉게 웃었다. 폐하가 아니면 저도 연회 안 가렵니다. 그 말과 함께 이엘은 할 말을 잃은 르네를 이끌며 다시 춤을 이어 갔다.
*
이엘은 줄곧 품 안에 숨겨 놨던 반지 하나를 꺼냈다. 붉은 루비와 선명하게 대조되는 녹색 에메랄드. 황족의 상징인 그 에메랄드가 박힌 황자의 반지였다.
‘화, 황녀의 반지를 갖고 있다면…… 그 쌍인 황자의…… 반지도 이, 있을 테지…….’
영지를 습격했던 자들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이 달라졌듯, 중심도 달라졌다. 이온이 살아난다고 해도, 모든 인간이 그를 황제로 인정할지 어떨지는 이제 미지수가 됐다.
그 누구도 황족이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황족은 씨가 말랐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러니 정당성이 황자의 반지로 옮겨 간 것이리라.
그날의 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황자의 반지만 있다면 누구든 황위에 오를 수 있을 거라니. 황족의 피가 아닌 겨우 반지 하나가, 제국을 이끌어 간다는 말인가. 반지가 황위를 제공한다면, 이 반지의 존재 자체가 황위 찬탈로 이어지진 않을까? 반지를 가진 자면 누구든 황위에 오를 수 있게 된단 소리인가.
그렇다면 이온이 살아나도……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겠구나. 설령 ‘그’가 만든 새로운 세계 속에 산다고 해도, 단단한 지지대가 없으면 황제가 된다고 한들 이온은 오래가지 못해. 금세 끌어내려질 거야. 모두가 만족할 만한 영웅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너는 네 오라비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알겠느냐?’
귀가 따가웠다. 더는 들을 수 없는 소리인데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자꾸만 고막이 뜨거웠다.
“이온. 널 살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난 널 다시 황위에 올릴 생각이었어.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가 죽고 그 뒤를 이어야 하는 건 당연히 너라고 생각했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넌 어떻게 생각할까.
너도 그 자리를 원해?
나는……. 나는, 다시 황녀가 되는 게 맞아? 내가 황녀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그 자리가…… 내가 원하는 자리가 맞는 걸까?
나는 그냥 평범한 삶을 바랐는데.
이엘은 반지를 다시 품 안에 넣고 커다란 방을 나왔다. 늑대의 기름. 모든 걸 포기하고 늑대의 영지에서 나가려는 이엘에게 주드가 건넨 마지막 선물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버린 선물.
과연 내가 하려는 이 일이, 주드 너보다 가치 있는 걸까? 나는 그날 끝까지 널 붙잡고 버텨야 했던 건 아닐까? 두 마리의 뱀에게, 그것도 우논의 독이 퍼졌으니 견디지 못했을 것을 알고 있는데도, 이 기름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주드.
너를 바꾸면서까지 내가…….
“엘. 왔니?”
먼저 노아의 방에 와 있던 오드가 그녀를 반겼다. 이엘은 그에게 걱정을 끼치는 게 싫어서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노아는 곤히 자고 있었다. 그렇게 강한 노아도 이렇게 몇 주를 앓고 있는데……. 주드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결국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것이 터져 버렸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오드가 작게 혀를 찼다.
“엘. 무슨 일 있었니?”
“…….”
“견디기 힘들면. 우리 여기서 나갈까?”
내겐 네 결정이 전부야, 나의 엘. 오드가 그녀를 달래며 다독였다. 정을 주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그게 참 내 마음대로 되지 않나 봐. 그녀의 작은 웅얼거림에 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나갈까? 오드의 물음에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어. 주드를 버릴 순 없어.”
“…….”
“어떻게든 이온을 깨울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드가 너무 가엾잖아. 오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엘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땅 위로 올라와서 제법 성장했구나, 엘. 그의 장난스런 위로에 이엘이 작게 웃더니 의자에 앉았다.
“노아는?”
“많이 좋아졌어. 왜 눈을 못 뜨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고 있을게. 성전으로 돌아가, 오드.”
“이곳에 와서는 성전으로 오지도 못했구나.”
“응. 왕궁에서 나갈 수도 없는 처지라.”
인간에게 박대받았던 오드는 이곳에서 환영받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왕궁만 나가도 따가운 눈길이 박히지 않았던가. 아쉽지만 성내에 있는 예배실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오드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다독거려 주곤 짐을 챙겨 성을 나갔다. 다시 홀로 남겨진 이엘은 의자에 앉아 잠든 노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거야? 꼭 이온 같았다. 이대로 두면 이온처럼 영영 눈을 뜨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이온은 생의 집착이었다. 버리고 싶고 끝내고 싶은 삶에서 유일하게 살아야 할 이유였다. 그때의 그녀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오직 하나였다. 애증만 남은 피붙이.
하지만 이젠 아냐. 이젠 당신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돼. 주드가 존경해 마지않는 당신. 내게 성군이 되어 준 당신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야.
나는 당신을 보며 군주가 가져야 할 것들을 배우고 있어.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아. 노아, 제발 눈을 떠 줘요. 제발 나와 함께 늑대들의 영지로 돌아가요. 내게 다시 한 번 소속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우는 건 또 처음 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