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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2화 (72/488)
  • 72화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독수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앞을 못 보는 개체들을 위해 점자를 가르쳐 줄 인간을 알아보려고 했다. 당시에 점자의 존재를 아는 이종족은 오직 독수리들뿐이었다. 그것도 공작이라는 작위를 이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래된 서적을 뒤적거리고 수소문 끝에 맹인들을 위한 글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나 그건 도입할 수 없었다.

    이제 르뷔 제국엔 점자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들 중엔 눈이 없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점자란, 그들에겐 도태된 도구에 불과했다.

    ‘결국 앞을 못 보는 건 우리뿐이었다.’

    ‘…….’

    ‘너흰 평생 우리의 눈으로 살아가면 될 테니 점자와 관련된 서적과 정보를 전부 버렸고.’

    ‘…….’

    ‘우린 희망을 버렸다.’

    그게 점자를 도입할 수 없는 이유라고, 르네의 눈이 말했다. 이엘은 한동안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간의 도구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고 가르쳐 줄 마음 따위 없었다.

    인간에게 이종족은 노예 이하로도 취급받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인간은 그들이 눈을 잃게 됐다고 해서 아량을 베풀어 줄 족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정보를 다 없애 버린 거지. 자신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결국 자신의 질문은 무례한 질문이 아니라, 모두의 치부를 드러내는 질문이었다. 독수리들의 무능력함과 인간의 비열함 모두를.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자고 한 말이 아닌데.’

    왜 네가 사과를 하는 것이냐. 르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엘은 그의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점자를 도입하실 마음은 있으십니까?’

    ‘뭐?’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무 이유도 묻지 말고요.’

    ‘…….’

    ‘제가 점자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하면. 도입하실 건가요, 폐하?’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르네가 눈을 크게 치떴다. 제발 묻지 마세요. 이엘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르네는 이엘이 지금, 모든 것을 자신에게 내어보였다는 걸 알아챘다.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 소년은 다 내어보였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저가 얻는 이득 따윈 없을 텐데도.

    ‘어째서지?’

    ‘속죄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

    ‘르네 님이 절 언제까지고 의심하실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

    ‘그럼 대답 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제게 묻지 마십시오. 그 어떤 걸 물어보셔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사라진 점자책. 점자와 관련된 서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그의 기억으로 단 하나의 서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 책이었다. 오직 자격을 가진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책.

    ‘저를 그 무엇으로 생각하셔도 저는 정직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저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

    ‘당신의 의심을 사더라도 제가 속죄할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 건가.’

    르네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너를 무엇이라 의심해도, 충분하다? 네 존재를 우리의 위협으로 생각할 텐데도? 르네의 침묵에, 인간 소년은 물끄러미 피아노를 내려보다가 작게 웅얼거렸다.

    ‘노아 님은, 제게 속죄할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요…….’

    그 대목에서 이엘이 실소했다. 그는 그녀에게 죄는 대물림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니 아비의 죗값을 대신 속죄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위로했다.

    하지만 자신은 일반 백성이 아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명백한 황족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속죄를 해야만 한다. 적어도 여기선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내’가 갖고 있을 때, 나는 주어야 한다.

    ‘제가 점자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건은 그것입니다.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그걸로 서로에게 큰 값을 치른 걸로 해요, 르네 님.’

    ‘네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아니요. 제가 얻는 게 더 많은 계약입니다.’

    르네는 피아노 위에 얹어진 얇고 마른 손가락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앞의 소년은 오랜 시간 잘 먹지 못해 체구가 작고 빼빼 말랐다. 한창 자라야 할 때 먹지 못했던 게지. 원래대로였다면 호의호식했을 텐데. 그래, 저 검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 네가 황족의 씨라면 풍요롭게 자랐을 텐데.

    ……그래서였나. 자신은 계속해서 이 소년을 볼 때마다 죄책감과 죄악감에 사로잡혔다. 너무도 닮은 그 외관 때문에.

    네가 속죄를 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 역시 속죄해야 한다. 너를 닮은 그 소녀를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여 버렸던 그때의 내 모습에, 분명한 죗값을 받아야 한다.

    릴리를 핑계로 릴리만 한 황녀를 죽였다. 그래. 너를 숨겨 속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르네는 석양빛이 얼비쳐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대체 누구지? 황족의 버려진 씨앗일까, 숨겨진 씨앗일까, 그게 아니면 살아난 씨앗?

    그래, 모든 점자책이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남은 책이 하나 있었다. 군주가 배워야 할 모든 학문과 인격, 덕목이 담겨 있는 책. 그건 바로 제왕학이었다. 오직 황위를 계승할 자에게만 주어지는 학문이었다.

    ‘그게 네 속죄라면.’

    ‘…….’

    ‘기꺼이 허락한다.’

    그러니 이제 이 소년에겐, 독수리들의 영지에서 제 권위를 주장할 만한 자격이 주어졌던 것이다.

    일 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귀족 중 가장 똑똑한 후작 엔리케가 그 일의 진행을 맡았다. 그는 왕의 제안에 뛸 듯이 기뻐하였고 이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했다. 이엘은 자신이 알고 배웠던 모든 지식과 방법, 정보를 후작에게 전해 주었고 후작은 단 두 번의 만남 끝에 온전히 터득하게 되었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내일쯤이면 새롭게 점자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는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 제 옆에서 걷는 이엘의 작은 머리꼭지를 내려보다가 뒤를 흘끔 쳐다봤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따라오던 근위대에게 짧게 눈짓하자, 두 사람 주변에 서성거리며 쳐다보던 다른 독수리들이 하나둘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

    “이게 편해서…….”

    “아무도 네게 관심 없으니 그리 가리지 않아도 되는데.”

    하여간 말 진짜 비뚜름하게 해. 이엘이 속으로 툴툴거리며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제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독수리들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숨을 돌리며 르네의 곁에 서서 독수리의 영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다른 여러 영지와는 확실히 달랐다. 테르들은 높고 커다란 나무에 둥지를 만들어 살고 있었고 우논들은 구름이 낀 거대한 바위 위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 체계나 규율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하고 말았다.

    “이렇게 나왔으니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도록. 점자에 대한 값으로 사 줄 테니.”

    “괜찮습니다. 점자는…… 말씀드렸지만 제 속죄 값이에요. 오히려 제가 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폐하께 받을 순 없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 주겠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후회할 텐데.”

    “정 그러시면. 나중에 제가 무언가 여쭤보면 답해 주십시오.”

    “인간인 네가 독수리인 내게?”

    “네. 독수리의 왕인 폐하께, 자문을 구하는 날이 있지 않을까요?”

    이엘이 웃었다. 그 웃음이 르네는 썩 마음에 들었지만, 그는 괜히 소년의 당황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말을 툭 내던졌다. 그편이 르네에겐 더 재밌으니까.

    “춤 연습은 잘 되어 가고 있나?”

    “될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약 올려? 웃던 낯을 지우고 이엘은 그를 불퉁하게 쳐다보며 답답한 듯 제 가슴 언저리를 주먹으로 쳤다. 왜 춤 교사까지 붙여 줬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정작 본인은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을 거라면서. 생각하니까 조금 화나네.

    “즐기라고 배려해 주었더니 불평이 많군.”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을 텐데 제가 어떻게 즐기겠습니까? 그리고 저 춤 못 춘다니까요!”

    “안 그래도 네 엉망진창 춤은 들어서 다 알고 있다.”

    일전에 말한 것처럼 몸치에 박치였다. 억지로 붙여 둔 교사는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포기했단다. 그 대목에서 르네는 짧게 웃었다. 춤을 영 못 춰서 발이 꼬이는 것도 꽤 볼 만하겠군. 뭣하면 그 꼴이라도 보러 연회에 잠깐 들를 의향도 있었다.

    “이번 연회는 새끼 독수리들을 위한 연회이다.”

    “…….”

    “새 삶을 살게 된 그 어린 개체들이 즐길 수 있게, 후작이 어련히 알아서 준비할 테니 너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고 즐겨라.”

    독수리들은 늘 품위와 교양을 우선시 여겼다. 특히 연회는 형식적이었지만 그 안에 항상 우아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가꾸고 준비하고 즐겼던 자들은 암컷들이었다. 인간과 다른 포식자들로부터 새끼와 종족을 지키느라 바빴던 그들은, 연회를 통해 모든 스트레스를 풀었고 에너지를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암컷들을 위해 수컷들이 준비하는 연회는 완벽하고 유쾌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기꺼이 서로가 헌신하며 준비하는 즐거운 연회. 하지만 그 연회는 20년 전을 기점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가장 기뻐하며 즐길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에.

    “원래는 암컷을 에스코트하며 함께 춤을 춰야 하는 게 맞지만.”

    “…….”

    “그들을 대신하여 어린 독수리들을 연회의 주인공으로 하려 한다. 그러니 너도 함께 즐겨도 좋다.”

    뒷짐을 진 채로 르네는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춤이라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항상 재기가 넘쳤던 릴리도 춤을 참 잘 추었다. 그 아이가 못하는 게 무엇이겠느냐마는. 릴리는 데뷔탕트를 무척 기다렸다. 데뷔탕트를 준비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동안 연회실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기대하고 기뻐하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의 입에서 릴리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엘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르네는 여전히 뒷짐을 지고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엘은 조심스레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그 아이는 데뷔탕트를 기대하던, 여느 영애와 다를 게 없던 아이였지.”

    “…….”

    “밤새 춤 연습을 하고, 그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고르고. 아버님은 사랑스런 그 아이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데뷔탕트를 준비해 주셨다.”

    볕이 따뜻하게 내려오는 그 방의 주인. 성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그 주인.

    “그리고 그 아이는 데뷔탕트에서 만난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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