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식사를 따로 해도 괜찮겠지? 후작이 좋은 곳으로 마련해 줄 것이다.”
“아…… 네, 그러겠습니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왕께서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먼저 인간의 의견을 물으시다니. 안 그래도 왕의 성에 인간이 머무는 것도 못마땅한데 대체 자신들의 왕께선 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몇몇 귀족이 작게 혀를 찼다. 후작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저를 따라오라 말했다. 이엘은 르네를 향해 꾸벅 인사를 마쳤고 그는 와인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 답했다.
홀을 나오니 그제야 숨통이 터졌다. 줄곧 자신을 지켜보던 르네가 보다 못해서 내보낸 건지, 그게 아니면 배려를 해 준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위기는 면했다. 어느새 후작은 근처에 있던 또 다른 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서 식사하면 된다네.”
“감사합니다, 후작님. 오늘 초대해 주신 것 정말 감사해요. 같이 식사는 못 하게 됐지만.”
“혼자 식사해도 괜찮겠나?”
“네, 그럼요. 괜찮습니다.”
후작은 이엘을 한번 보고는 편하게 식사하라며 문을 닫아 주고 나갔다. 그사이 옆문으로 들어온 시종들도 테이블 위에 식사를 차려 주고 홀을 나갔다. 커다란 테이블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지만 차라리 지금이 편했다.
이엘은 나이프를 들고 마음 편히 스테이크를 썰며 배를 채웠다. 그러고 보니 스테이크는 밀로가 제일 좋아했는데……. 늑대들과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다.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할 텐데. 대체 거기서 할 일이 뭐길래 배웅도 안 해 주고. 다시 생각하니 섭섭하고 울적해졌다.
한참 식사에 몰입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금 전 시종들이 나갔던 문이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이곳이 후작의 저택이란 것도 잊어버리고 본능적으로 나이프를 손에 움켜쥐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할아버지?”
처음 이엘이 주드를 만났을 때, 주드는 딱 저만한 소년이었다. 겉나이로 보면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문고리를 잡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은 우논이었다. 그리고 소년의 두 눈엔 검은 천이 둘러져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야……?”
연신 할아버지를 찾는 꼬마를 쳐다보며 그녀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이 없다. 저 어린 소년에게 있어야 할, 독수리에게 가장 중요한 그 눈이…… 없다. 소년은 둘러진 검은 천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 번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 불안한 음성이 공기를 타고 그녀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암시장에 테르뿐만 아니라 우논도 있었단 거구나. 어쩌면 그것마저 주드와 닮았을까.
후작이 말한 손자 메이슨이 바로 저 꼬마였다. 이엘은 물끄러미 소년을 쳐다보았다. 저 아이는 단순히 눈을 잃은 게 아니었다. 독수리의 능력은 눈을 통한 투시이니, 삶의 전부를 잃어버린 것과도 같으리라.
독수리의 눈알.
아, 다시 또 속이 불편하다. 주드와 닮은 소년의 안대를 보며 이엘은 침음했다. 눈알을 가져간다는 건 그 독수리의 삶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다. 그걸 내가 어떻게 가져가겠어. 내가 어떻게…… 다른 이의 삶을 빼앗아.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외면하고자 해도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그런데도 이온을 포기하지 못해서……. 이온만 포기하면 되는 건데. 그는 자신의 전부라서.
그래서 매일매일이 고통과 슬픔이다.
“할아버지 냄새가 아닌데……. 누구야? 누구세요?!”
불안한 목소리로 문고리를 꽉 잡은 채 묻는 꼬마에게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 이엘도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먼저 움직인 건 이엘이었다.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다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빼 일어났다. 그 마찰음에 꼬마가 흠칫 놀라며 문을 닫고 와다닥 뛰어 도망쳤다.
쫓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엘은 고민 끝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기다란 복도, 그 가장 끝 방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다시 홀로 돌아가 식사를 마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긴 한데.
‘우리 메이슨이 그대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네.’
하필 지금 후작의 그 말이 귀에 울리다니. 하필, 메이슨이란 아이가 주드와 비슷한 나이일 줄이야.
하필 난. 아직도 그 아이를 보내지 못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느꼈지만 새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현명하다. 새끼일수록 정을 쉽게 줄 테고, 결국 이엘도 마음이 동해 곁을 허락하게 될지 모르니까. 차라리 인간에게 발톱을 세우는 성체들이 상대하기 더 낫다. 하지만…….
“……메이슨?”
이엘의 목소리가 복도의 공기를 타고 흘렀다. 아주 조금 열려 있던 틈 사이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아이가 모습을 조금 드러냈다. 메이슨. 다시 한 번 그녀가 꼬마의 이름을 부르자 방문이 완전히 열렸다.
“누구세요?”
“아…… 나는 후작님의 초대로 오게 됐어. 안녕, 메이슨.”
“……인간이야? 인간 냄새가 나.”
“응. 맞아. 인간이야. 냄새가 심해?”
그러고 보면 독수리들은 자신을 볼 때마다 코부터 틀어막았다. 저도 모르게 제 옷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던 이엘이 제 쪽을 향해 가만히 서 있는 꼬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꼬마는 그렇게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불쑥 이엘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와.”
“그래도 돼?”
“응, 들어와.”
얼쯤얼쯤 메이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선 이엘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늑대의 영지에서 봤던 어린 우논 늑대들이 지내던 곳과는 전혀 달랐다. 장난감이라고 부를 만한 건 하나도 없었고 가구나 장식품도 거의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대리석 바닥을 거의 다 덮고 있는 커다란 러그와 침대가 전부였다.
메이슨은 손으로 벽을 짚으며 조심히 걸음을 옮기다가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 거대한 방에서 맘껏 뛰놀지 못하게 된 메이슨은 입꼬리를 내린 채 방문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날 구해 준 인간이야?”
“구해 줬다기보다는…….”
“……스튜 어땠어?”
“어? 스, 스튜?”
“응. 저녁으로 나온 스튜. 맛이 어땠는데?”
갑자기 왜 스튜를……. 그러다 문득 아까 식사 자리에서 후작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손자를 칭찬한 것이 떠올랐다. 설마 그 스튜를 만들었다던 손자가 메이슨이었나?
“그거 네가 만든 거야?”
“응. 왜? 맛이 없었어?”
“아…… 아니. 너무 맛있었어. 너무 맛있어서 전문 요리사가 만든 줄 알았는데…….”
“진짜?”
아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방긋 웃었다.
“그거 너 주려고 만든 거야.”
“어?”
“너한테 꼭 주고 싶었어. 할아버지가 널 데리고 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선물해 주고 싶었거든. 근데 나는 보이는 게 없어서 아무것도 못해. 그래서 집사의 도움을 받아서 스튜를 한번 만들어 봤어. 맛이 있었다니 다행이다.”
“그럼 오늘 날 초대한 게…….”
“응. 나야.”
꼬마는 부끄러운 건지 귀가 빨개졌다. 이엘은 가만히 메이슨을 바라보다가 그 근처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가 앉는 소리에 메이슨은 입을 열어 조곤조곤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너무 과보호하셔.”
“…….”
“내가 다칠까 봐 가구를 전부 치워 버리셨거든.”
커다란 방 안이 추울 정도로 너무 텅 비어 있었다. 지금 보니 침대 헤드를 비롯한 모서리 부분에 모두 푹신한 스펀지가 붙어 있었다. 눈을 잃어버린 손주를 위해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이엘은 차마 메이슨의 얼굴 쪽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위로 창에 찔렸던 어린 주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또 그 위로 죽어 가던 어린 이온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왜 약자는 늘 당해야만 하는 걸까. 이렇게 보호해 주기도 부족한데. 나는 사실 약육강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넌 이름이 뭐야? 난 메이슨이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헬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메이슨.”
“응, 오헬. 반가워.”
이름을 나누고 나니 마음까지 줘 버린 건지, 메이슨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주드완 다르게 조숙해 보이긴 해도 아직 어린 우논이었다. 이렇게 방 안에 누군가를 초대한 것조차 오랜만이니, 상대가 인간이라 할지라도 꽤 반가웠던 모양이다.
메이슨은 그날 그렇게 구출된 이후로 꼼짝없이 저택 안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괜찮다는데도 조부인 후작은 그의 안전을 염려해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저택은 이렇게 큰데 저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은 만날 수가 없으니 그간 꽤 외로웠을 것이다. 이야기 한 보따리를 이엘의 앞에 풀어놓았다. 이엘은 귀 기울여 듣고, 적당히 공감해 주었다.
“그래서 오헬은 가족이 있어?”
“아…… 가족. 응, 있긴 한데 지금은 죽었어. 형이 하나 있었거든.”
“그렇구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다 돌아가셨어.”
“나돈데. 나도 아빠가 죽었어.”
전쟁에 휘말렸나. 그렇게 생각하며 이엘은 창밖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기울었다. 곧 만찬이 끝날 테니 르네를 따라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엘은 메이슨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어진 메이슨의 다음 말에 그 자리에서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죽였거든.”
“……뭐?”
“우리 아빠가 잘못을 크게 했대. 나는 그게 큰 잘못인지 잘 모르겠지만.”
“…….”
“여자를 죽인 게 잘못이야?”
“…….”
“너희도 우리 이종족의 암컷을 다 죽였잖아.”
아이는 아무런 악의도 담기지 않은 어투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 순간 이엘은 무언가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이야, 메이슨……? 여자를 죽였는데 아버지가 왜…….”
“나도 모르겠어. 왜 할아버지는 우리 아빠를 죽인 건지. 인간들이 먼저 우리 엄마를 빼앗아 가서 아빠도 죽인 것뿐인데.”
“…….”
“그때 우리 아빠랑 마르틴의 아빠랑 리키의 삼촌까지 모두 죽었어. 우리 할아버지랑 폐하의 손에.”
“여자를 죽였기 때문에…… 르네 님이 죽였다는 말이야? 그게 이유였다고? 하지만 그때 분명 모든 종족이 다 여자를……,”
“아니야.”
“…….”
“할아버지가 그랬어. 우린 여자를 죽이려고 전쟁을 한 게 아니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