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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8화 (68/488)
  • 68화

    뒷짐을 지며 그가 먼저 방을 나섰다. 이엘은 잠든 노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그를 따라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르네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무작정 걸어가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홀을 지나 커다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열린 창문들 새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있었다. 찬 바람이 뺨을 스치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어느새 길어진 머리끝을 움켜쥐며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자라니 다시 구불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자를 때가 됐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덧입혔다.

    “하프를 켤 줄 아나?”

    “네? 하프요?”

    뜬금없이 하프 이야기를 꺼내는 르네의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사이 르네는 걸음을 멈추고 바로 옆에 있는 금빛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굳게 잠겨 있던 릴리의 방이었다.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주저하는 이엘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곤 거리낌 없이 릴리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위치한 방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기분 좋게 일어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릴리는 늘 이 방에서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지난 20년간 그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았던 릴리의 방은 여전히 깨끗하고 따뜻했다. 하루에 두 번씩 르네가 손수 청소하고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침실 중앙에 거대한 피아노가 한 대 있었고 그 옆에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현악기가 줄을 이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화장대 바로 옆에 초상화 속 그 하프가 놓여 있었다. 이엘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입을 벌리며 감탄에 젖은 탄성을 외쳤다. 그야말로 온갖 악기가 그득한 곳이었다.

    “그 많고 많은 초상화들 중 네가 멈춰 선 곳은 릴리의 초상화였다.”

    “…….”

    “정확히는 릴리가 켜고 있던 하프였고.”

    르네는 피아노를 쓰다듬다가 이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하프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워낙 상류층에서만 사용하던 악기였기 때문에 릴리도 배우기 힘들었던 악기였으니까. 제국민들 자체가 음악에 관심은 있었어도 악기에 관심은 없었다. 역시 저 인간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엘은 저를 바라보는 노골적인 시선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하프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어릴 때 아주 딱 한 번, 어머니가 연주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있다. 워낙 어릴 때라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분명 아름다운 곡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이엘도 어머니의 악기를 몇 연주해 보려 했지만 음악엔 영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금방 포기했다.

    오히려 악기 연주는 이온이 잘했다. 저가 겨우 옷을 혼자 갈아입을 때쯤 이온은 바이올린을 켰고 피아노를 쳤다. 수준급의 연주 실력으로 궁중 악사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하지만 그 이온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악기를 손에 잡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잡지 못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아비인 황제가 전부 박살을 내 버렸으니.

    “켜 봐도 좋다.”

    “아뇨. 저는 음악에 영 소질이 없어서요. 음치에 박치거든요.”

    “전혀 못 치나?”

    “네. 부끄럽게도요…….”

    정말 부끄러운 건지 이엘은 제 목덜미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귀족 자제가 악기 하나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건 상당히 창피한 일이었다. 그러니 황족이었던 그때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겠는가. 아비가 대놓고 손가락질을 해도 변명할 자격조차 없었다.

    제국이 사라진 지금은 전혀 창피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엘은 그게 부끄러워 괜히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귓불이 발개진 것까진 숨기지 못했다. 르네는 그녀를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의외의 모습이군.

    그는 말없이 피아노의 덮개를 열었다. 매일 청소하고 관리를 하긴 했지만 건반을 눌러 보는 건 정말 20년 만이었다.

    사실 피아노를 먼저 배웠던 건 르네였다. 어린 시절 제도 내 성전에 있는 오르간을 보고 배우고 싶다고 졸랐던 것이다. 그런 르네를 따라 릴리가 뒤늦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릴리는 르네의 실력을 한참이나 앞서게 됐다. 그녀는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으니까.

    르네는 자리에 앉아 건반을 하나씩 천천히 눌러 보았다. 그날 이후로 조율을 한 적이 없어서 소리가 많이 어긋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아한 소리였다. 피아노 특유의 맑고 딱 떨어지는 소리가 릴리의 방에 울려 퍼졌다. 도에서 도까지 하나하나 눌러 보던 르네의 옆으로 이엘이 쪼르르 다가왔다. 르네의 길쭉한 손가락을 쳐다보며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앉아라.”

    “그래도 돼요?”

    냉큼 그의 옆자리에 앉아 얼른 르네가 치길 기다렸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온이 피아노에 앉아 있고 자신은 그 옆에 붙어서 지켜보고 있던 그 시절로.

    이윽고 르네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음악 쪽은 완전히 문외한이라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아름다운 곡이었다.

    오랜만에 치는 탓에 몇 번 음이 이탈했는데도 옆에 앉은 소년은 눈까지 감으며 제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들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도 기뻤던 걸까. 그게 아니면 묻어 두고 살던 릴리를 떠올릴 수 있어서일까. 이유야 어떻든 듣는 사람도, 치는 사람도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오시게.”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엘은 후작 엔리케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폐하께서도 누추하지만 안으로 드십시오.”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 기쁘군, 후작.”

    “저희야말로 광영입니다, 폐하.”

    거기다 제 주변에 있는 자들은 전부 독수리의 고위급 인사들이었다. 어째서 귀족과 왕의 만찬에 자신이 끼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엘은 모든 독수리들이 순차적으로 거대한 후작의 저택에 들어가고 나서야 쭈뼛쭈뼛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후에 르네와 함께 다과를 하고 노아의 간호에 전념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명령이 왔다. 후작의 저택에서 이루어지는 저녁 식사에 참석하라는.

    속이 또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노아의 피나는 노력 덕에 이제 겨우 왕과의 식사가 어렵지 않게 되었는데……. 그래도 역시 노아, 당신이 필요해.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간절하게 그를 바랐다.

    자신이 없었다. 분명 식사 내내 저를 향한 못마땅한 시선들과 훑어보며 품평하는 손가락질이 이어질 텐데,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오헬? 어서 들어오게.”

    “아…… 네. 후작님.”

    한 발, 또 한 발.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쓰였다. 괜찮아. 노아가 괜찮다고 했잖아. 실수해도 괜찮다고 그가 그랬어.

    “흠흠, 인간도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오? 폐하께서도 계신데 어찌하여 냄새나는 인간을…….”

    “그러게나 말이오. 난 후작이 통 이해가 가질 않소.”

    “눈치껏 빠지거라.”

    환영받지 않는 곳에서의 식사는 역시 어렵다. 이엘은 저들의 말처럼, 차라리 자신을 내보내길 기다렸다. 이대로는 그녀 역시 도저히 식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김없이 나이프와 포크를 떨어뜨릴 테니까.

    이엘이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처분을 기다릴 즈음 긴 적막이 깨졌다.

    “후작. 인간은 사체를 먹지 못하니 알아서 잘 준비하게.”

    “염려 마십시오, 폐하. 잘 준비해 두었습니다.”

    상석에 앉은 르네의 말에 눈치를 주던 우논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별말 아닌데도 은근한 압박을 주는 말투였다.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이엘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얼결에 가장 끄트머리에 앉은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제발 나에게서 신경 좀 꺼 줬으면 좋겠는데.

    음식이 차례차례 나오기 시작했다. 잘 익은 베이컨과 스테이크, 스튜까지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졌다. 스튜를 수저로 저으면서도 이엘은 자신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를 빼면 전부 우논에 귀족 혹은 왕족인 것 같은데, 대체 후작은 왜 날 부른 걸까. 이렇게 모두 자신을 싫어하는데.

    “폐하. 이 스튜는 저희 아이가 만든 것입니다. 맛 좀 보십시오.”

    “맛이 좋군.”

    “예. 꼭 폐하께 드리고 싶다며 아침부터 만든 것입니다.”

    “후작은 가만 보면 참 팔불출이오. 손주가 그리 예쁘시오?”

    “당연한 것 아니겠소? 내 핏줄만큼 또 귀애할 만한 자가 어디 있겠소?”

    만찬 속엔 웃음이 넘쳤다. 오직 이엘만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불편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손에 쥔 나이프와 포크를 떨어뜨리지 않게 꼭 잡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화제가 후작에게 넘어가 모두가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틈에 작게 썬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맛이 일품이었다. 여태 앓던 긴장이 죄 사라질 만큼 입 안에서 적당하게 녹는 고기의 맛이 최고였다. 워낙 사체를 즐기는 종족인지라 불편한 식사를 각오하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엘은 감탄에 젖었다. 늑대들의 영지에서 노아와 함께 하던 식사도 좋았지만 이곳의 맛은 훨씬 더 뛰어났다.

    하지만 역시 가장 뛰어났던 건 스튜였다. 그 맛은 황궁에서 먹던 것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맛이 괜찮은가?”

    흐뭇하게 웃으며 넌지시 묻는 후작의 물음에 이엘이 화들짝 놀랐다. 졸지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제게 박히자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네…….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소리로 대답하곤 다시 고개를 스튜 쪽에 박았다.

    “후작.”

    “예, 폐하. 하명하십시오.”

    “그대들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데.”

    “그럼 식사 후에 회의를 진행할 공간을 마련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여기서 하도록 하지. 오헬.”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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