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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7화 (67/488)
  • 67화

    르네는 먼저 도착해 알현실에서 이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오드와 합류한 이엘은 르네를 향해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살던 곳과 달리 이곳은 고도가 높은 편이니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적응하겠습니다.”

    “많이 불편하면 말하도록.”

    “네.”

    적대적인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르네의 곁에 서 있는 귀족들과 병사들이 대놓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동맹도 아닌데 왜 늑대의 왕을 여기까지 데려오며, 거기에 인간까지 떠맡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감히 제 왕에게 입을 열지 못하니 원망은 이엘에게만 쏟아졌다. 오드는 축복받은 종족이니 이엘에 비하면 반기는 쪽에 가까웠다.

    “후작. 저들에게 지낼 공간을 주거라.”

    “네.”

    “저는 성전에 지내고 싶습니다, 폐하.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 넌 그곳에서 지내도록 해라. 노아의 간호 역시 네가 맡고.”

    오드는 왕의 허락을 구하고 성전에 머물기로 했다. 이엘 역시 그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무언가 말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분위기였다. 르네는 제게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를 환영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떨거지에 불과했다.

    르네는 잔뜩 긴장한 채로 기가 죽어 있는 인간 소년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처음 제 앞에서도 떨고 있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기가 죽지는 않았는데. 그 주드라는 늑대의 죽음이 소년에게 큰 충격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인사를 마친 이엘은 후작이 안내하는 대로 알현실을 나가려 했다.

    ‘이제 겨우 살아갈 의지가 생겼는데.’

    그 힘에 부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잠깐.”

    르네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후작과 이엘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오드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와 르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는 성 안에서 지내도록 해라.”

    “폐하? 어찌 인간을 성에 두십니까?!”

    “폐하!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왕의 명령에 귀족들이 반발하며 나섰다. 절대 안 된다며 항명하는 그들을 가볍게 제지한 르네는 흥미를 잃은 듯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가 비로드 융단을 걸어와 그녀의 옆을 무심히 지나쳤다. 앞서 걷기 시작한 왕의 뒤를 따라 후작과 이엘, 오드가 함께 알현실을 나왔다. 오드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며 힘을 주었다.

    “후작. 그대가 오드를 성전으로 안내해 주게.”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물러나고 이엘과 르네만이 남겨졌다. 르네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엘은 말없이 뒤따를 뿐이었다. 뚜벅뚜벅, 두 사람이 걷는 소리가 커다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복도 곳곳엔 아름다운 초상화와 풍경화가 가득했다. 늑대를 비롯해 여러 왕실을 오갔지만 이렇게 과거 황실과 비슷한 왕성은 처음이었다. 같은 공작 가문인 늑대와도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왠지 낯익은 왕궁의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벽을 손으로 쓸었다.

    “아르세니온.”

    “…….”

    “……이었던가. 황자의 이름이.”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갑자기 왜 또 이온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역시 여전히 날 의심하고 있는 건가.

    그는 어린 시절의 이엘을 만난 적이 있었다. 제 손으로 확실히 숨통을 끊었으니 황녀는 죽었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게다가 쇄골 아래에 심겨진 인식표도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니 의심을 하는 건 황자 쪽. 황녀와 황자가 똑 닮은 쌍둥이란 사실을 공작이었던 그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 황자가 그대로 컸다면 딱 너만 했겠군.”

    “그런가요.”

    떨리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온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안위도 아닌 이온의 이름.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게 내가 될지언정, 이온은 절대 안 돼. 계속해서 르네의 뒤를 따르며 이엘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불가피하다면 내 정체를 드러내서라도 혼선을 줘야 할까. 그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만들었다.

    “살아갈 의지라고 했었나. 그 주드라는 늑대가.”

    “…….”

    “그럼 지금은 살 의지가 사라졌나?”

    독수리들은 다 저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늑대의 영지에 머무르던 내내 르네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

    이엘에게 르네는 여전히 까다로운 왕이었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고, 그의 마음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한 번 죽였던 적이 있는 자다. 분명 자신의 원수이지만, 어떻게 보면 은인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행복했을 테니까.

    “살 이유가 하나 사라졌다고 죽을 마음은 없습니다.”

    “…….”

    “계속해서 이유를 만들어야죠. 죽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전 살 거예요. 이제 그만하란 식으로 대화를 끊어 버린 이엘의 대답에 르네도 더는 묻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유를 만들겠다? 곧 죽기로 마음을 먹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였다.

    “하프네요.”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르네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엘은 감탄에 찬 얼굴로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프를 켜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마치 정말 살아서 연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도 음악을 좋아하시나요?”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르네는 침묵했다. 그저 천천히 걸어와 이엘의 옆에 나란히 서서 초상화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초상화 속 여자는 그의 동생 릴리였다. 형제가 모두 죽고 그의 곁에 남았던 유일한 동생이었다. 독수리답게 고상하고 영리하고 아름다웠다. 르네는 말없이 손을 뻗어 초상화 위에 묻은 먼지를 떼어 냈다.

    “아니. 싫어한다.”

    “…….”

    “그중에서도 하프는 끔찍하게 싫어해.”

    이 사람이 당신의 여동생인가요. 이엘은 차마 묻지 못하고 그의 떨리는 손끝을 응시했다.

    그는 단순한 초상화 하나에도 각별한 애정이 담긴 손길로 감히 만지지도 못한 채 슬퍼하고 있었다. 끝내 주먹을 쥐며 손을 떨어뜨린 르네는 제복 망토를 흩날리며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바짝 따라잡은 이엘은 부러 시선을 흩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기가 전혀 없는 곳이다. 이렇게까지 황량한 곳은 또 처음이었다. 로빈의 음울한 성에서도, 노아의 차가운 영지에서도, 레온의 공허한 성벽에서도.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무기력함이 이곳에서 느껴졌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체념한 듯한 공간 같았다. 그 총기 많던 눈동자는 죄 식어 버렸고 영지 전체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폐하는.”

    “…….”

    “살아갈 이유가 있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그녀의 물음에 르네가 또 한 번 걸음을 멈췄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멈춰 선 곳은 릴리가 머물던 방 앞이었다.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 있고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구역.

    살아갈 이유 따위 있을 리가 없지 않나.

    20년 전부터 르네는 모든 걸 버리고 싶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따라 죽어 버리고 싶었다. 모든 암컷이 죽어 버렸다. 그 안엔 르네와 약혼을 했던, 이제는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 암컷도 있었다.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내 소중한 것들은 이미 다 죽어 버렸는데 내가 살아갈 이유 따위 만들어서 뭘 할까. 난 너랑 다르게 인간이 아닌 것을.

    “폐하의 백성은 그 이유가 될 수 없나요.”

    무례한 발언이란 걸 알면서도 이엘은 입을 열었다. 영지가 죽어 가고 있다. 왕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가 아니라, 왕이 제 생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왕이 종족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어서.

    그녀는 암시장에서 죽어 가던 새끼 독수리들을 떠올렸다. 눈알이 파인 채로 울부짖던 독수리들은 자신의 왕이 저희를 구하기 위해 도착한 것을 알자마자 기뻐하며 흥분했다. 아직도 생을 붙잡고 살아가는 독수리가 남아 있는데.

    “제게 주드가 죽었기 때문에 살아갈 의지가 사라졌냐고 물어보셨죠.”

    “…….”

    “하지만 주드가 사랑하는 형이 아직 살아 있어요. 주드가 존경하는 왕께서도 살아계십니다. 주드가 아끼던 친구들도 살아 있어요.”

    “…….”

    “그리고 주드가 좋아했던…… 저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왜일까. 왜 이번에도 릴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그것만으로도 제가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폐하?”

    릴리를 위해 만들고 싶었던 아름다운 영지. 릴리가 살아가기에 어렵지 않게 해 주고 싶었던 정책들. 천성이 착해서 약한 독수리들을 외면하지 못했던 자신의 동생을 위해, 그는 곧 자신의 영지민이 될 독수리들에게 성군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릴리가 죽은 지금까지도 제 종족을 위해 동생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티 내지 않았다. 감정은 내려놓고 이성만 붙잡았다. 오직 네가 사랑했던 영지니까.

    “누군가에게 폐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

    “새끼 독수리들에겐 부모가 필요하겠죠. 마찬가지로 독수리들 모두에겐 폐하가 필요할 겁니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애정을 담아, 릴리가.

    사랑스러운 그의 동생은 애정을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아 생을 포기하려는데, 나의 동생은 언제나 나를 사랑했구나. 내 종족이 또 한 번 잘못을 저지르고 신의 노여움을 받을까 두려워, 나는 릴리가 사랑했던 나의 종족을 포기하려 했구나.

    모든 귀족과 백성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성인 개체들만 동의했을 뿐이다. 새끼 독수리들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았다. 어린 개체들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에 동의할까? 우린 그 약자들의 의견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 나는, 백성들의 소리에 과연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정말 나는 감정을 내려놓았던 건가.

    “폐하의 영지에 봄이 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빠.

    릴리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르네는 시선을 돌려 굳게 닫힌 릴리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매일 청소하고 걸어 두는 커다란 자물쇠가 문고리에 사슬과 함께 걸려 있었다. 그 자물쇠가 꼭 자신의 마음 같았다. 단단하게 닫혀서 열릴 틈이 없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을.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녹슬었던 자물쇠의 마감 부위가 툭 하고 끊어지며 떨어져 버렸다. 커다란 복도를 가득 채울 만큼 시끄러운 소음이 퍼졌다. 거짓말처럼 그의 눈앞에서 20년 만에 자물쇠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잠가 놓았던 그 자물쇠가 사라졌다.

    알을 깨고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가려져 있던 것들로부터 눈이 떠졌다.

    왜 나는 내 백성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을까. 왜 나는 뱀들의 핑계를 대며 쉽게 그들을 버리려 했을까. 결국엔 모두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했기 때문이다. 성군이 아니라 폭군이었군. 르네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갑자기 방문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가 떨어져 놀랐던 이엘은 엷은 웃음을 짓는 르네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저 얼굴에서도 웃음이 나오긴 하는구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동안 르네는 그 커다란 금빛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떨어진 자물쇠를 주워 들고 방문을 채우고 있던 체인까지 모두 뺐다.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

    “네?”

    “겨울이 끝났으니 곧 봄이 올 것이다.”

    “…….”

    “이곳은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니까.”

    이엘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다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다시 르네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노아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셨습니다. 독은 완전히 치료되셨으니 곧 깨어나실 겁니다.”

    “수고 많았다.”

    이엘은 르네에게 인사를 마친 오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드는 독수리의 영지로 와서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병들고 아픈 독수리들과 새끼 테르들이 성전으로 쏟아지는 바람에 할 일이 많아진 것이다. 성 안에만 지내는 이엘과는 다른 행보였다. 이엘은 방을 나가는 오드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보다가 물수건을 짜서 노아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밖에 나가고 싶나?”

    르네는 침울한 표정의 인간 소년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이엘은 그의 배려가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웃음으로 무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녀는 이곳으로 와서 노아의 간호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늑대의 영지에서나 할 일이 많았지, 이곳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객식구이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잠깐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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