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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6화 (66/488)

66화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 위로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겁과 두려움, 후회와 고통만 남은 녹색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울지 마. 괜찮다니까.’

‘애, 앤디 님…….’

‘녀석이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영지 내에서 모르는 늑대는 없을 거다.’

‘…….’

‘그리고 네가 얼마나 늑대들을 사랑하는지 또한. 모르는 자가 없어.’

‘…….’

‘몇 번이나 네 목숨을 걸고 새끼들을 지켜 냈지. 우리 주드뿐 아니라 로날드나 슈프, 리퍼도. 숱하게 지켰잖아, 네가.’

이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에요. 그렇게 저를 두둔하지 않아도 돼요. 울음이 꽉 찬 입 안에선 윽윽― 짐승의 것과 비슷한 소리만 맴돌았다.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모종의 일이 있었나 보구나, 너랑 주드.’

‘…….’

‘걱정 마.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니까.’

앤디는 다시 한 번 씁쓸하게 웃었다.

다만 미련이 남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빨리 숨을 거둬야 했나. 기름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더 숨을 쉬었을 텐데. 어차피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을 순 없었겠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앤디는 주먹을 꾹 쥔 채 이엘의 곁을 지나쳤다.

‘미안하다. 널 보는 게 조금은 힘드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는 동안, 이엘은 앤디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니.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앤디를 피했다. 그게 앤디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엘은 종이를 펴고 명령을 내리는 앤디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다시 성전 안으로 들어왔다. 왕성보다 먼저 복구 작업을 시작했던 성전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비록 그 안에서 뛰놀던 개체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씁쓸하게 난간을 손으로 쓸었다. 마음이 여전히 어렵구나.

“엘. 잠깐 들어와.”

위층에서 오드가 손짓했다. 로날드에게 손을 흔들어 준 이엘은 오드가 들어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고 노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엔 안드로를 비롯한 귀족들 몇이 서 있었다.

“폐하를 독수리들의 영지로 옮길까 한다.”

“폐하를요?”

안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어째서……. 그만큼 위중하신가요? 그녀의 떨리는 물음에 안드로는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럼 오드도 함께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곁에서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널 불렀다. 너도 오드와 함께 가거라.”

“네? 저도요? 제가 왜……,”

“폐하께서 독수리의 영지로 가는 건 외부에 비밀이다. 뱀들이 또 언제 습격할지 모를 일이니. 뱀의 표적인 너 또한 함께 그곳으로 피신해 있어라.”

“하지만……!”

“너를 보는 게 힘든 공작을 위해 가라.”

“…….”

“앤디는 지금 무리할 정도로 일에 전념해 있다. 그를 위한다면 잠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 있어.”

물론 늑대들은 모두 주드의 일에 관해 이엘을 탓하지 않았다. 그녀를 보호할 명령을 내렸던 것은 노아였고 앤디 역시 제 동생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허락했으니까. 이번 일은 명백히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동료를 위해 죽는 건 명예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미안하다. 널 보는 게 조금은 힘드네.’

그의 서글픈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채비를 하라.”

“참고로 나는 안 가, 오헬.”

어느 틈에 끼어 있던 밀로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저가 어딜 가든 함께하겠다는 밀로가 저렇게 나오자 이엘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함께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너라도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도와줄 일이 많아서. 미안, 오헬.”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몸 조심히 지내, 미르. 사고 치지 말고.”

“응, 나의 엘.”

오늘따라 밀로가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오히려 불안에 떠는 건 자신 같았다. 오드와 함께 방을 나설 때까지도 밀로는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날에도 챙길 짐이 없었다. 다소 간소한 짐을 들고 나온 이엘을 바라보며 독수리들이 몸을 부르르 털었다. 그들은 모두 제 왕의 명령대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들판에 모여 있던 독수리들이 일제히 비상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오드는 안내를 받아 커다란 독수리의 등에 올라탔다. 눈을 감고 있는 노아 역시 르네의 위에 올려져 있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이엘은 밀로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려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팔불출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밀로는 마중조차 나오지 않을 모양인가 보다.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하는데…….

“안녕하십니까, 오헬 님.”

미련이 남은 얼굴로 한참이나 영지를 돌아보는데 제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예의를 차려 저에게 인사를 하는 남자를 보며 흠칫 놀랐다. 얼결에 같이 인사를 하긴 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독수리인가? 의문에 찬 그녀를 보며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일전에 새끼 독수리를 구해 주신 적이 있으시지요.”

“아…… 혹시 암시장에서…….”

“네. 맞습니다. 거기서 구출된 메이슨이라는 아이의 조부 되는 자입니다. 엔리케라고 하며, 작위는 후작이지요.”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헬이라고 합니다.”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독수리들은 인간에 적대적인 종족 중 하나였다. 지금도 이엘과 오드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기는 독수리들이 태반인데, 높은 작위를 가진 독수리가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다니. 이엘은 그게 내심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수군거리던 소리는 줄어들었지만.

엔리케의 등 위에 오른 이엘은 정든 영지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자신을 쫓아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참 웃긴 감정이다. 사치스러운 감정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그때 멀리서 상황을 정리하던 안드로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고 이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안드로는 격려하듯 이엘을 달래며 당부했다.

“그럼 폐하를 잘 부탁한다.”

“네.”

르네가 먼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비상했다. 그의 뒤를 따라 차례차례 하늘로 떠올랐고 후작인 엔리케는 무리가 모두 떠오른 뒤에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이엘은 독수리의 등에서 떨어질까, 털을 꼭 쥔 채 긴장을 놓지 못했다. 모든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가고 나서야 후작도 날갯짓과 함께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오헬!!”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내렸다.

앤디였다.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게 며칠 만인지 모르겠다. 앤디는 전처럼 웃는 낯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잘 다녀와라! 폐하를 잘 부탁한다!”

아마도 앤디 역시 자신 때문에 떠나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닌 척해도 여전히 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앤디는 미안한 낯이었다. 이엘은 그런 앤디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뗐다. 피붙이를 잃은 그의 앞에서 이런 사치스런 감정을 갖는 것 자체가 죄악이야.

끝끝내 밀로를 보지 못한 채 날아올랐다. 그래도 넌 배웅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번엔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지 않았던 거야? 왜, 낯설게 느껴지는 거야. 이엘은 한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전쟁이 나에게 있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내가 겨우 만들었던, 나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가져갔어.

나는 또 혼자가 된 것 같아.

*

하늘을 나는 건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기압과 바람의 저항으로 처음엔 숨조차 쉬지 못했지만 안정적인 고도로 진입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 옛날, 기분 전환으로 하늘을 나는 것에 올라타던 사람들이 이해가 갔다. 그 시절의 이엘은 황궁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타 본 것이라곤 마차가 전부여서 알지 못했지만.

“오헬 님. 아래를 보시지요. 기분 전환이 되실 겁니다.”

“네. 정말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보다 말씀 낮추세요. 후작 각하께서 말씀을 높이시니 제 입장이 매우 곤란합니다.”

“그래도 될는지요. 먼저 허락을 구합니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엔리케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엘이 지루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 주었다. 과연 살아온 연륜이 있는지라 그와의 대화가 불편하지 않았다. 대화할 상대가 적었던 이엘이 마음 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따뜻한 자였다.

“우리 메이슨이 그대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네.”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르네 님과 다른 독수리분들이 오히려 저를 도와주셨는걸요.”

“왜 우리 아이를 구출해 주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그 행위가 나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의외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인간들은 그런 행위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엔 모든 이종족들이 인간의 가장 낮은 계급보다도 낮은 자였고, 설령 작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우받지도 못하는 말뿐인 작위였다.

눈을 뽑고 털을 뽑고 학대하고 학살해도, 그 누구도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제국엔 오직 ‘인권’만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도 너희 인간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데, 그래도 구해 줄 생각을 하는 게 신기하군.”

“만약 인간을 그렇게 대했다면, 그때도 저는 나섰을 것입니다.”

“…….”

“누구도 그렇게 취급할 권리는 없어요.”

아버지의 만행으로 얻은 교훈이었다. 모든 걸 누리던 황족이었기에 그 시절의 불평등을 잘 알지 못했다. 비록 차별은 느꼈어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걸 잃고 나서야, 그 취급을 당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야 비틀어진 것을 바꾸려고 하니 가진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럼 그대는 지금 이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의 취급이 나락으로 떨어진 지금 말이네.”

“글쎄요. 그런 걸 제가 함부로 운운할 수 있을까요. 제겐 아무런 힘도 없는걸요.”

“…….”

“다만 죄를 지은 자는 죗값을 받게 되겠지요. 오직 신으로부터.”

“그래. 맞네.”

두 사람이 무의미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구름을 지나간 독수리 떼는 거대한 나무가 울창한 숲에 도착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도착할 정도로, 확실히 땅으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빨랐다.

이엘은 가히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하며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나뭇가지 위에는 커다란 둥지가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둥지 위에서 독수리들이 돌아온 제 왕과 병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마다 자신을 향해 빽빽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이엘은 결국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냄새가 난다며 날개를 퍼덕거리고 급기야 헛구역질까지 하는 독수리들을 보며 황당했다. 사체를 먹는 자신들보다는 냄새가 덜 날 텐데.

“폐하를 따라 왕궁으로 가겠네.”

“네.”

왕궁은 가장 높고 너른 바위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안개가 자욱해서 흡사 공중에 떠 있는 섬 같을 정도였다. 성문 안에 이엘을 내려 준 후작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의 뒤를 따라 이엘은 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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