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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5화 (65/488)

65화

정말 독수리답다. 눈썰미가 좋은 데다 머리도 좋아. 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르네에게서 시선을 돌려 황량한 들판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독수리들이 곳곳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잊고 있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땅 위에서 눈을 감기 직전.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갔던 그 독수리 떼의 습격이.

사체를 먹는 독수리가 눈앞에 있으니 또 한 번 죽음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동안 잊고 살았지만 늘 자신에게 가까웠던 그 죽음이.

“지금이 더 마음이 아픕니다.”

“…….”

“르네 님이 이것까지도 믿지 않으신다면……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만.”

내 손으로 가꾼 정원.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 그리고 원수인 나를 받아 준 무리들. 그 무엇 하나 내가 애정을 주지 않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때와 비교를 해. 누군가에 의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살았던 그때와 내 의지로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는 지금이, 어떻게 비교가 돼.

비록 신분은 낮아졌어도, 비록 갖고 있는 재물은 빼앗겼어도. 어떻게 과거를 비교할 수 있겠어.

“이제 겨우 살아갈 의지가 생겼는데.”

“…….”

“그걸 빼앗긴 지금이 더 슬프지 않겠어요?”

저를 향해 꾸벅 인사를 마친 인간이 성전 안으로 돌아갔다. 르네는 황량한 들판과 무너진 왕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귓가에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눈을 감아 버렸다.

‘오빠!’

나에게도 한때는 살아갈 의지가 있었는데.

*

앤디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에 늑대들의 얼음으로 주드를 얼려 두었다. 이엘은 다친 늑대들과 노아의 간호를 도맡으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제 3기사단이 안드로와 함께 돌아왔고 도망치던 인간들의 끄나풀 몇을 사로잡아 왔다. 노아가 끌고 나간 1기사단과 달리 이쪽은 피해가 극심했다. 총에 맞아 죽은 늑대들이 상당했고 부상자도 꽤 많았다.

결국 원흉인 턱수염은 잡지 못했다. 이번 습격 때 지시만 내리고 습격엔 참여를 안 한 건지, 그게 아니면 발 빠르게 도망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엘은 안드로가 턱수염을 잡아 오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

“오헬. 그만 들어가자.”

“…….”

“오헬.”

얼음으로 얼려 둔 늑대들 속에 검은 머리 소년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밀로는 말없이 다가와 로브를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감기 걸려, 나의 엘. 장난기가 사라진 그의 목소리에 이엘이 시선을 그에게로 틀었다.

“차라리 그냥 로빈을 따라갈 걸 그랬어.”

“…….”

“그랬다면 주드도, 폐하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았을 거야, 오헬.”

“…….”

“너는 모르겠지만, 난 네가 없으면 이깟 땅. 아무 의미가 없거든.”

전부 박살을 내고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정도로. 뒷말은 삼킨 밀로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작은 위로를 건넸다.

이엘은 건조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제 앞에 있는 얼음 무덤을 또 가만히 응시했다. 외롭지 않게, 앤디가 올 때까지 그녀는 매일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름을 너무 늦게 알려 줬어. 네게 내 애칭 하나 허락하지 못했는데. 따뜻한 말, 따뜻한 웃음 하나 보여 준 적이 없는데. 잘해 줄걸……. 많이 웃어 줄걸. 함께 사냥 가자고 조를 때 그러자고 할걸. 폭포에서 수영하자고 할 때, 무서워도 함께 놀걸.

후회와 미련을 손가락으로 세어 보니 양손이 부족했다.

생각보다 내가, 정을 많이 줬다.

그리고 나흘이 더 지나고 나서야 그토록 기다리던 제 2기사단과 앤디가 영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처참하게도 살아 돌아온 개체는 몇 없었다. 명령대로 연구소의 습격은 성공했지만 뱀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앤디 역시 피로 얼룩진 채 성지로 들어왔다. 성전 안으로 들어온 잿빛 늑대는 저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오헬. 폐하는 어디……,”

“폐하께선 뱀의 습격으로 안정 중이십니다.”

“뭐? 괜찮으신 거냐?”

“네. 괜찮으세요.”

“그래. 다행이네. 우린 피해가 좀 컸거든. 시신을 다 데려오진 못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보고 올려야겠네.”

“……앤디 님.”

“내 동생 어디 있어?”

주드의 부고는 이엘이 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연습했지만 현실은 더 고역이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앤디는 말없이 제 동생의 냄새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어디에도 주드의 냄새가 섞여 있지 않았다.

“밖에 있어.”

뒤에 서 있던 밀로가 그를 불렀다. 앤디는 이엘을 지나쳐 성전 밖으로 향했다. 성전 뒤뜰에는 수많은 얼음 동산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전쟁을 숱하게 겪은 앤디는 한눈에 무슨 상황인지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얼려진 시체 사이로 주드를 찾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마침내 고통밖에 남지 않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엘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슬픔에 감히 내 슬픔을 갖다 붙일 수가 없었다.

*

“공작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거 같아.”

로날드의 걱정 어린 말에 이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할 정도로 영지 복구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앤디를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드의 장례가 끝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지만 여전히 노아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 공작인 안드로와 앤디가 일 처리를 하는 건 당연했지만, 앤디는 유독 무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앤디에게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유일한 피붙이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공작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엘은 장례가 끝나던 날 오후를 떠올렸다. 늑대들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떨어지던 날이었다.

‘괜찮아, 오헬.’

앤디는 씨익 웃으며 이엘의 머리를 습관처럼 쓰다듬어 주었다. 녹진하고 피곤한 눈동자로 한참이나 이엘을 바라보던 앤디는 주드가 묻힌 땅을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늘 철이 없었어.’

‘…….’

‘근데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성장하더니 어른처럼 굴더라.’

‘…….’

‘우논은 지키고 싶은 게 있거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갑자기 성장하는 경우가 간혹 있거든.’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갑자기 공작 위를 받은 앤디는 노아를 따라 일을 하느라 매일이 바빴다. 어린 동생은 유독 성장이 더뎠고 철이 없었다. 그런 동생이 친구를 지키겠다고 갑자기 성장을 하고, 이엘의 말처럼 어느 날은 자신보다 어른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방심은 내가 했지.’

‘…….’

‘왜 동생이 죽을 거란 생각을 전혀 못 했는지. 나도 참…….’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을 덧대고 덧댈수록 후회만 늘었다.

왜 나는 추격을 하자는 폐하를 말리지 못했을까. 왜 나는 영지 수습을 우선적으로 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끝까지 동생이 안전할 거라고 믿었을까. 이제 겨우 성체가 된 어린 개체일 뿐인데.

‘그러니까 그건 다 내 잘못.’

‘……앤디 님.’

‘넌 내 동생이야. 비록 피는 전혀 섞이지 않은, 완전히 다른 종족이지만.’

‘…….’

‘울지 마, 인마. 너라도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데.’

거짓말. 거짓말이다. 차라리 내가 죽기를 바란 거잖아. 이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앤디는 그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미안하다, 오헬. 네게 이런 짐을 지우게 해서.’

‘아닙니다. 다 제가 모자라서 그런 거예요. 제가 알아챘더라면……,’

‘아니. 내 잘못이라고 했잖냐. 넌 잘못 없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작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의 슬픔은 감히 나 따위와 비교할 수 없겠지. 결국 앤디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울음을 참듯, 그렇게 한참을 숨죽이던 앤디가 손바닥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이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늑대는 죽을 때 기름이 나와.’

‘…….’

‘아주 찰나와 같아서 금세 시체에 흡수되지만.’

그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드의 사체엔 기름이 전혀 없었어.’

‘…….’

‘그리고 과할 정도로 바싹 말랐거든.’

‘…….’

‘그건 녀석이 의도적으로 기름을 많이 빼냈다는 말이기도 해.’

물론 사인은 독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기름이 그렇게까지 나오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숨을 쉴 수 있었을 텐데. 앤디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차갑게 식은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네가 갖고 갔어? 주드의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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