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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4화 (64/488)

64화

“말도 안 돼……. 그, 그럼 대체 어디 계세요?!”

“지금 르네 님이 모시고 오는 중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하늘 너머로부터 검은 구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떼의 독수리들이었다. 쌔애액 소리와 함께 가장 앞서고 있던 적갈색의 독수리가 엄청난 속도로 활강하더니 폐허가 된 들판 위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는 땅 위에 자신이 태우고 왔던 검은 늑대를 내려놓았다. 이엘과 늑대들이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르네 님!”

“로빈의 해독약이 여기 있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르네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엘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르네가 허리를 숙여 쓰러져 있는 검은 늑대의 가슴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노아. 네 영지다. 안심해도 돼.”

검은 늑대는 가슴 위에 커다란 흉터가 새겨져 있었고 그 위가 일부 얼음으로 얼려져 있었다. 로빈의 공격을 받고 독이 더 퍼지지 않도록 제 얼음으로 막은 모양이었다.

르네의 말을 들은 늑대는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간이 된 노아는 더 끔찍한 몰골이었다. 왕의 참담한 모습에 늑대들이 낑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슬퍼하며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얼려 놓은 가슴 부위는 심장 때문에 오래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곁에 선 늑대들이 재빠르게 제 주인을 등에 업었다.

“해독제가 있는 곳으로 어서 안내해라.”

“네.”

이엘은 성지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도 노아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곧 죽을 것처럼 노아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 위로 자꾸만 주드가 겹쳐 보여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괴로움을 삼켰다.

강하다고 생각한 그 노아마저 이렇게 되다니……. 절망적인 시간의 연속이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간 늑대들이 제 왕을 가장 너른 곳에 옮겼다. 안쪽에서 결계를 잡고 있던 오드가 놀라 뛰쳐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로빈, 그자의 공격을 직격으로 받았어. 우리를 대신해 폐하께서 모조리 받는 바람에……. 로빈의 해독약이 여기 있다고 눈을 감기 전에 노아 님이 그러셨어. 혹시 남았나?”

“네. 우선은 살펴보겠습니다.”

그나마 몸을 얼려 둔 덕에 독이 퍼지는 건 가까스로 면했다. 이엘은 초조한 마음으로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드는 먼저 그의 몸에서 뽑아낸 독과 로빈이 남겨 둔 해독제를 섞었다. 그 모습에서 주드가 떠올라 그녀는 차마 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독이 정화되는 게 보였다. 오드가 노아의 입술 안으로 해독약을 조금 밀어 넣자 보랏빛으로 변해 있던 환부의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의식은 없었지만 조금 전보다 혈색이 많이 좋아졌다.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잠들어 있던 환자들도 눈을 떴다. 새벽 내내 오드의 성력으로 푹 잠들어 있던 그들은 하나둘 제 무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틈에 있던 로날드과 슈프, 리퍼도 낑낑거리며 제 왕을 쳐다보다가 홀로 서 있는 이엘을 발견하곤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오헬. 괜찮아?”

“오헬.”

“넌 아픈 데 없어?”

세 마리가 하나같이 걱정이 담긴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오드의 치료로 기운을 차렸지만 세 마리 모두 독기에 털이 엉망이었다. 슈프는 하얀 털이 붉은 피로 뒤덮였고 리퍼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리고 털갈이 중이었던 로날드는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새겨졌다.

그래도 세 마리는 무사했다. 부상은 입었어도, 살아 있었다.

상처로 얼룩진 늑대들을 내려보던 이엘은, 늘 그 틈에 함께하던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아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나 제일 먼저 달려오던 주드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영영 볼 수 없다.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는 이엘을 바라보며 세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 오헬?”

“폐하가 다쳐서 그래?”

“괜찮아. 폐하는 강하시니까 금방 돌아오실 거야.”

이엘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다가, 말없이 일어나 옆방으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방을 들어서면서부터 늑대들은 예민한 코를 찡긋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 생기가 전혀 없는 방.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슈프와 리퍼를 뒤로하고 로날드는 이엘을 따라 더 깊게 걸어갔다.

“오헬. 왜 그래?”

“주드가 여기…… 여기 있어.”

로날드는 천천히 이엘이 있는 곳까지 향했다. 그녀는 덮어진 하얀 천을 걷었다. 잿빛 늑대가 마치 잠을 자듯, 고요한 모습으로 쓰러져 눈을 감고 있었다. 로날드는 감히 더 다가서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췄다. 오헬……? 불안하게 그녀를 불렀다. 이엘은 로날드를 바라보며 더 크게 울먹거렸다.

“미안해. 내가, 내가 지키지 못했어……. 내가 어떻게든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아니. 그녀를 지키는 게 늑대들의 몫이었다. 그러니 이엘이 늑대를 보호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은 도움을 받은 꼴이었다. 로날드는 아픈 다리를 움직이며 흰 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코로 천을 툭툭 건드렸다.

“주드 님……?”

주드 님. 일어나세요……. 웅얼거리는 로날드를 멀거니 바라보던 이엘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드 님이…… 안 일어나셔……. 그렇게 한참을 주드의 곁에서 빙빙 맴돌던 로날드가 커다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너진 인간 소년의 모습이, 주드가 우리의 곁을 떠났다고 또 한 번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로날드는 가만히 주드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다시 이엘에게 다가가 코를 비볐다. 울지 마, 오헬……. 그를 신호로 눈치를 보던 슈프와 리퍼도 그녀에게 다가가 꼬리로 감쌌다.

“미안해하지 마, 오헬.”

“…….”

“넌 잘못 없어. 괜찮아.”

“주드 님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주드 님은 이제…….”

“오헬…….”

하지만 그렇게 위로하던 세 마리의 새끼 늑대들도, 이엘의 품에 안겨 끝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

황폐한 땅을 바라보며 뻑뻑한 눈을 깜빡거렸다. 노아는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고 제 2기사단과 제 3기사단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드는 다친 늑대들을 치료하느라 바빴고 밖은 거대한 독수리들로 북적였다. 이엘은 성전 앞 계단에 주저앉아 멍하니 들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헬!”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초점 없이 그곳을 바라보다가 푸른 머리카락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밀로였다. 빠르게 제 앞으로 달려온 밀로가 저를 안기도 전에 그녀는 밀로의 안부부터 살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기억까지 잃은 밀로가 또다시 전쟁을 겪지 않았던 게, 그나마 이 끔찍한 상황 속 유일한 안도였다.

“오는 길에 무슨 일 없었어, 미르? 다친 곳은 없는 거지?”

“응. 멀쩡해, 아주!”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야.”

“넌. 괜찮은 거야? 다친 데 없어? 여긴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사정이 있었어. 난 괜찮아. 나는 괜찮은데…….”

울적한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는 이엘을 바라보며 밀로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본체화를 하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는 다른 이종족에 비해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용들은 보통 한 형태로만 있으려고 하는 편이었다.

종족회의가 끝나자마자 재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만 하루가 걸렸다. 그사이 제 아래 있던 땅에 전쟁이 터졌고 그는 무능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밀로는 다시 한 번 이엘을 끌어안았다. 그에겐 이엘의 안부가 제일 중요했다. 다른 늑대 놈들이 죽든 말든, 그건 자신과 무관했다. 오직 이엘만 괜찮으면 됐다.

하지만 제 소중한 사람의 눈동자가 총기를 잃고 눈물로 얼룩져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썩 좋지 않았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왜 그래, 오헬?”

“주드를 떠나보냈거든.”

“…….”

“나는 괜찮은데…… 주드만…….”

미르, 주드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힘에 부친 이엘은 밀로를 지지대 삼아 그 넓은 품에 파묻혔다. 밀로는 말없이 그녀를 토닥거려 주며 달랬다.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놈에게 받는 위로라니.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큰 위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꼬마 녀석이 사라진 거야?”

밀로의 물음에 울음을 꾹 참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품에 안기듯 들어온 작은 정수리를 내려보며 밀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분명 오헬만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지 모르겠다.

“늑대 왕은 어디 있어?”

“폐하는 쉬고 계셔. 뱀을 추격하다 다치셨어.”

“멍청하긴. 그 상황에 추격을 하다니. 그렇게 지키라고 했는데 대체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미르? 너 지금 무슨 말을…….”

“아니야, 아무것도. 들어가자.”

살벌하게 느껴질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밀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밀로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이엘은 계속해서 밖에 서 있었다.

저 멀리 늘 곧게 서 있던 높은 왕성이 무너져 내린 게 보였다. 불에 탄 모습이 자신이 살던 황궁과 겹쳐 보였다. 내가 떠나던 날에도 이렇게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는데.

“이건 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겠군.”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이엘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와 자신의 옆에 섰다. 르네는 이엘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매번 불편했다. 모든 걸 뚫어 보는 독수리의 눈에서 혹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네 눈엔 어떠하지?”

“무엇을 물으시는 건지, 미련하여 모르겠습니다.”

“10년 전, 네가 살던 제도가 불에 탄 것과 지금 이곳의 모습이. 너에겐 어떠한지 물어보는 것이다.”

“폐하께선 여전히 저를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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