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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3화 (63/488)

63화

무슨 소리야, 그게! 소리를 바락 지르는 이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그러지 마, 아니야……. 제발…… 안 돼, 주드. 그러지 마! 크게 부정하는 이엘의 이름을 주드가 한 번 더 불렀다.

“……어차피 난 죽어. 그러니까 네게 줄게, 내 기름. 가져가…….”

“싫어! 필요 없어. 이제 안 필요해, 그딴 거.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조금만 견뎌. 내가 해독제를 구해 올게. 뱀의 소굴로 가서 내가……,”

“오헬. 내 얘기 들어……. 이제 난 성체니까 네가 필요한 만큼의 기름을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받아 줘. 네게 주고 싶어.”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잖아……. 이렇게 허탈하게 끝나는 게 어디 있어. 몇 번이나 고비에서 살아왔잖아. 이렇게 갑자기 끝나는 게 어디 있어. 아니야! 절대 안 보내! 안 돼, 제발…….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이엘을 보던 늑대가 커다란 몸을 조금씩 움직여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올렸다. 그러곤 천천히 기름을 몸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빨리 가져가. 바닥에 다 버릴 거야……?”

“주드, 제발 그만해! 이러지 마…… 안 돼, 기름 내보내지 마. 이러면 정말 살 수 없어!”

“은혜…… 갚고 싶었어. ……처음부터 날 살려 줘서 고마워. 우논인데도 외면하지 않고 구해 줘서 고마워. ……네가 너무 좋아, 오헬.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어서. 버리지 마, 제발……. 끊어질 듯한 주드의 음성에 이엘은 눈을 감고 말았다. 기름이 나오는 순간부터 주드의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오드는 말없이 병을 가져왔다. 엘. 오드의 말에도 멍청하게 기름이 흐르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내가 떠난다고 했잖아. 내가…… 다른 늑대를 찾겠다고……. 두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로 얼룩진 제 손바닥을 늑대가 조심스레 핥았다.

“어서…… 가져가…….”

“싫어…….”

“생사의 기로에 있다며.”

“싫어, 제발…….”

“네 혈육…… 장례를 위해 가져가. 응?”

“…….”

“가는 길은 네 형제와 함께 갈 테니 외롭진 않겠다.”

거짓말이야. 이온의 장례를 위해 기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온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거야. 혈육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했는데. 그게 너라니. 아니야, 그건 정말 아니잖아…….

제발 그러지 마.

제발 나 버리지 마…….

“어서. 응……?”

기름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충혈된 눈으로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름을 병 안에 모아 담기 시작했다. 병엔 기름이 차고 있는데 그녀의 마음은 텅 비어 가는 기분이었다. 끔찍했다.

내게도 넌 소중한 친구인데……. 나도 처음 생긴 친구였는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게 거짓말만 했어. 내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았어. 끅끅 울음소리를 참아 내며 기름을 주워 담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주드. 나…… 내 이름은 오헬이 아니야.”

“뭐야.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미안해. 속여서 미안해……. 미안해. 아…… 어, 어떡하지……. 나…… 나 어떡해, 주드…… 제발…….”

“괜찮아, 오헬. 아니,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점점 기운이 빠져서 말할 힘이 없어진 주드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천진난만한 웃음은 잃지 않았다. 이엘은 눈물로 얼룩진 제 얼굴을 닦아 내고는 습관처럼 주드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타니엘.”

“응……?”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

“그게 내 이름이야.”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감겨 가던 주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너 설마……. 주드의 놀란 표정을 바라보며 이엘이 떨어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결국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아.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제게 엎어져 울기 시작한 어린 소녀의 체온을 느끼며 주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녀였네……. 내 친구가 황족이라니.”

“주드. 미안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다 내 탓이야…… 용서하지 마, 나를.”

“내가 더 미안해.”

“…….”

“네 모든 것을 뺏어 가서 미안해, 나타니엘. 우리가 다 잘못한 거야. 네 잘못 아니야…….”

“…….”

“너의 세상을 뺏어서 미안해, 황녀님…….”

빠져나오는 기름의 양이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많아졌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엘. 나지막한 오드의 목소리에 이엘이 울음을 꾹 참으며 마지막으로 주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주드의 털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신음을 참았다.

“……안녕, 나타니엘.”

“안녕, 주드…….”

“지켜 주고 싶었는…….”

끝내 주드는 이엘의 품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

“이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안타까움에 오드가 이엘을 흔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밤이 꼬박 새도록 제 무릎 위에서 눈을 감은 주드를 끌어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드가 새벽 내내 다친 늑대들을 살펴보며 그녀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이엘은 미동도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주드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잿빛 털을 쓰다듬던 이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밝아오는 여명이 늘 그렇듯 아름다웠지만 오늘따라 유독 스산하게 느껴졌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처럼 마냥 따갑기만 했다.

“……주드.”

땅 위로 올라와 사귄 친구들 중에 첫 우논 친구였다. 하루 중 반나절 이상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소중한 친구. 황궁에 갇혀 지내던 시절에도, 땅 아래 숨어 살던 시절에도 이엘에겐 오드를 제외하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오드마저도 사실은 이온의 친구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러니까 주드는,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내어주었던 소중한 가족이었다.

짧지만 잊히지 않을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 상처 입었던 모습과 날을 세우고 자신에게 대적하던 모습.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을 등에 태우고 함께 넓은 평원을 뛰어다녔던 모습과 영지에서 함께 장난치던 모습까지. 그 어떤 것 하나도 잊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엘. 괜찮니?”

다시 늑대들의 상태를 보고 돌아온 오드가 걱정스레 그녀를 불렀다. 이엘은 조금 전보단 나아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은 그늘져 있었지만 고통스러워하던 표정은 많이 사라졌다. 오드가 건넨 물을 받아 마시며 이엘은 고개를 성전 밖으로 돌렸다.

“앤디 님을 보면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

“억장이 무너지겠지.”

친족이 다 죽어 버린 앤디에게 얼마나 소중한 동생이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온이 쓰러졌던 때에 자신도 그러지 않았던가. 유일한 피붙이의 존재는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앤디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앤디는 또다시 가족을 잃게 되었다. 자신 때문에.

“오드. 여기를 떠나자는 말 취소해도 될까?”

“괜찮겠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땅 아래서 보낸 그 10년이 우스울 정도로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

“…….”

“또 사라졌어. 겨우 친구가 생겼는데…… 또 나를 떠나갔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 여길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해. 자조적인 말투에 오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엘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무릎 위에 누운 주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창가로 걸어가 밖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멀리 흙먼지가 짙게 일어난 것이 보였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오드. 총을 줘.”

“누가 오고 있어?”

“응. 결계를 단단히 해. 외부의 침입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했지?”

“그래. 그러니까 엘. 너도 여기 있어. 위험하게 나갈 필요 없잖아.”

찢어진 붕대 사이로 다시 피가 새어 나왔지만 그녀는 대충 닦아 내고 붕대를 아예 벗어 버렸다. 걱정하며 붙잡는 오드를 뒤로하고 바스러진 성전 문을 넘어 밖으로 향했다.

영지는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한밤중엔 보이지 않던 곳까지 새벽빛에 비춰져 모두 드러났다. 이렇게까지 황폐해지다니.

……노아의 정원은 괜찮을까? 괜찮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그곳은 성전만큼이나 안전하길 바라던 곳 중에 하나였는데. 이엘이 정성을 들이고 밀로가 돔을 세우고. 오드의 성력이 들어갔으며 주드가 일군 정원이었다. 이곳의 모두가 사랑하던 곳.

용서할 수 없다.

이엘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총을 들고 조준했다. 범위 내로 들어오면 가리지 않고 전부 격추시킬 심산이다. 주저할수록 빼앗기는 건 이쪽일 테니까.

성전 안엔 다쳐서 정신을 못 차리는 늑대들이 태반이었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이엘과 오드뿐. 성전 안에서 누군가에게 구해지기만을 기다리는 건 이제 지쳤다. 노아가 오기 전까진 어떻게든 이곳을 지켜야 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먼지구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엔 누굴까. 숨어 있던 인간들? 아니면 여전히 은신하며 기회를 보고 있던 뱀들? 마지막으로 탄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쪽 눈을 감았다.

상대는 어림잡아도 대략 몇십 정도 되어 보이는데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부디 마음을 돌려 돌아가 주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온 힘을 다해서 끝내 버릴 것이다. 그녀가 심호흡 끝에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였다.

아우우―!!

컹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멈췄다. 마치 함성이 쏟아지는 것처럼 일제히 터져 나온 하울링에 이엘이 총을 집어 던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늑대야. ……노아가 돌아왔어. 늑대들이 돌아왔어! 그녀가 달려오는 모습에 멈췄던 먼지구름도 다시 일어났다. 늑대들이 빠르게 이엘을 향해 마주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헬!”

달려온 늑대들이 코와 얼굴을 마주 비비며 안부를 전했다. 멀쩡하게 돌아온 개체는 없었지만 분명 모두 돌아왔다. 이엘은 손가락으로 일일이 늑대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제 1기사단이야. 노아와 함께 뱀을 추격하러 갔던 그 1기사단이었다. 하나하나 1기사단의 숫자를 세던 이엘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가 비었다. 한 명이 모자라.

“폐하는 여기 안 계셔.”

“네? 그게 무슨……,”

“뱀의 왕에게 공격을 당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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