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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60화 (60/488)

60화

*

“야! 정신이 들어?”

“저는 괜찮아요.”

“너는 진짜…….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하여간 한마디도 안 져. 앤디의 투덜거림에 이엘이 작게 웃었다. 그녀는 앤디의 등에 올라탄 채로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슈프의 안전도 확인했다. 약속대로 슈프를 되찾았고 자신도 다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 이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린다. 조금 전, 다급한 마음에 노아의 검을 빼서 사용했는데……. 무의식적으로 황궁 검술을 사용한 것만 같아서 초조해졌다. 검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검술 스승에게 배웠으니 습관적으로 자세가 나왔을 것이다. 제발 아무도 눈치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른 종족이라면 몰라도 늑대는 곤란하다. 날 때부터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을 받았던 종족이니까 봤다면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다. 아냐. 일단은 접어 두자. 이런 생각은 불안만 증폭시켜.

“근데 주드 이놈은 널 지키라니까 뭘 한 거야?”

“주드 덕분에 피해가 적었어요. 제가 하도 떼를 쓰니 절 말리지 못한 것뿐이죠.”

“하여간 그 자식은 성장해도 어린애라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주드가 얼마나 어른스러워졌는데요. 앤디 님보다 더 믿음직스러운데요.”

“야, 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옥신각신 다투다 보니 어느새 성지 부근이었다. 역시나 불투명한 돔 형태로 만들어진 결계 덕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엘을 내려준 앤디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성전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오드의 인사를 대충 받고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드!”

“형?!”

“너, 인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오헬을 지키는 게 네 일이라고 했잖아!”

“……미안해. 내 잘못이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주드가 순순히 제 형의 꾸지람을 받았다. 뒤이어 열린 문으로 옷에 피가 묻어 있는 이엘과 늑대들에게 실려 온 슈프가 나란히 들어왔다. 주드는 이엘이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라 다급히 뛰어갔다.

“오헬! 너 어디 다친……,”

“안 다쳤어. 난 괜찮아. 그보다 슈프가 많이 위중해. 오드, 슈프를 어서 치료해 줘.”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계가…….”

“걱정 마라. 밖은 우리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넌 이 녀석들을 치료하는 것에 집중하면 돼.”

“네. 알겠습니다.”

앤디와 주드를 비롯한 늑대들이 전부 성전 밖으로 나갔다. 잠시 결계를 푼 오드는 서둘러 슈프의 몸 위로 손을 뻗었다. 모두가 제 일을 하는 동안 이엘은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준비해 슈프의 피를 닦기 시작했다.

이엘은 슈프를 살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로날드와 리퍼도 걱정이었다. 늑대들에게 치명적인 가스였던 걸까? 치명상은 아니라며 오드가 안심시켰지만 그녀는 새끼들이 걱정이었다.

……분명 그때, 나를 지키기 위해 주드가 성전 문을 닫아 버렸어.

‘뭐 하는 거야?! 아이들이 쓰러졌잖아!’

‘안 돼. 경보를 울렸으니 곧 폐하가 오실 거야.’

‘문 열어.’

‘안 돼, 오헬. 넌 나갈 수 없어.’

새끼 늑대 세 마리가 혀까지 입 밖으로 내민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어떻게 두고 보라는 거야. 절대 안 된다며 자신을 막는 주드를 밀쳐 내고 끝끝내 성전 문을 열었다.

눈을 감고 시름시름 앓던 로날드의 커다란 눈동자에 자신이 담겼다. 나 하나 지키겠다고 어떻게 새끼들을 포기해. 난 그걸 바라고 여기에 몸을 의탁한 게 아니야…….

참 웃겼다. 늑대의 기름을 얻기 위해 이곳에 와 놓고, 새끼를 위해 내 목숨을 던질 뻔하다니. 누가 이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녀는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물수건으로 슈프의 털을 닦는 데 집중했다.

아우우―!

절박에 가까운 하울링에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치료에 집중하는 오드를 뒤로하고 커다란 창문으로 달려가 커튼을 걷었다. 연이어 들리는 하울링에 밖에 서 있던 늑대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앤디를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아우우― 다시 한 번 다급한 소리가 들려오자 앤디가 커다란 늑대로 변했다.

“주드! 넌 여기서 오헬을 지켜. 절대로 성지 밖으로 나오면 안 돼. 알았어?!”

“알겠어. 걱정 말고 다녀와, 형.”

앤디는 다 큰 제 동생을 바라보며 걱정의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하는 주드 쪽이 더 형 같아 보일 정도였다. 주드는 빨리 가라며 앤디와 우논들을 채근했고 한참 고민하던 그들은 다시 들려오는 하울링에 빠른 발로 달려 사라졌다. 형이 떠난 것을 확인한 주드가 고개를 돌려 창 너머로 이엘을 쳐다봤다.

“들었지, 오헬?”

“응. 조심해, 주드.”

“걱정 마.”

주드를 비롯해 늑대의 모습을 한 둔 세 마리와 테르 여섯 마리가 남았다. 이엘은 앤디와 일행이 사라진 쪽을 주시했다. 불길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늑대들은 얼음을 다룰 수 있으니 불은 금방 사라지겠지만 하울링으로 구조 신호를 보낸 늑대들이 문제였다. 다치지는 않았을까? 온갖 걱정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번 습격. 늑대가 목표라고 생각했나? 아니. 네가 목표야.’

자꾸만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남았다. 황자의 반지 때문에 나 하나 잡겠다고 뱀과 연합했다고?

황자의 반지를 노렸다는 건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즉, 인간이 다시 이종족을 누르고 황권을 되찾겠다는 뜻이었다. 그걸 뱀들이 알게 된다면 자신들도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슈프를 미끼로 날 이끌어 내려던 걸까? 아니. 그런 것치곤 슈프를 데려가던 놈들의 수가 너무 적었다. 그놈들은 정말 새끼 늑대를 데려가려던 무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있을 턱수염이 날 노리는 걸까? 하지만 어째서 나타나지 않았지? 내가 성전에 있다는 걸 몰랐던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그 어떤 것보다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뭐라고, 엘?”

“왜. 뱀들이 보이지 않는 걸까.”

이엘의 작은 목소리에 치료를 하던 오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인간의 단일 소행인 걸까? 그냥 늑대를 약탈하고 내게서 황자의 반지를 훔쳐 가기 위해 인간들이 무턱대고 쳐들어온 건 아닐까?

아니. 인간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그들은 확신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서지 않아. 하필 종족회의가 끝난 이후, 경비가 가장 허술할 때를 노린 것은 정보가 새어 나갔기 때문이다. 모든 종족이 종족회의에 오는 건 아닐 테고 매번 장소와 시간이 달라지니, 결국 정보는 안에서 새어 나갔단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뱀들이 아니라 다른 종족인 걸까? 단순히 늑대와 척을 진 다른 종족이? 지금 같은 상황에 대체 왜? 왜…….

“오헬!! 도망쳐!!”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주드의 고함 소리와 함께 성전 문이 박살 났다. 큰 폭발음이 뒤이어 들리며 이엘은 제 몸이 하늘 위로 붕 뜬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 느릿하게,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귀에 이명이 들리더니 곧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됐다.

분명 자신은 창가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화롯가까지 튕겨져 벽에 부딪친 뒤였다. 귀가 먹먹했다.

본능적으로 습격을 당했다는 생각과 더불어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벽에 부딪치며 팔과 다리 어딘가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이엘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으며 흐르는 피 사이로 뿌연 시야를 확인했다.

희뿌연 먼지들 사이로 쓰러진 늑대들이 보였다. 흰 옷을 입은 오드 역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 결계가 풀려서…….

바닥을 기어가기 위해 있는 힘껏 손을 뻗었지만 몸에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모두가 죽어. 그 생각이 그녀를 살게 만들었다.

“아, 거룩한 성지를 이렇게 파괴하다니. 우린 정말 몹쓸 종족이군.”

뚜벅뚜벅. 누군가 성전 안으로 들어왔다. 삐 소리만 들리던 귀가 차츰 웅얼거리는 소리로, 또 점차 또렷한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구나, 오헬.”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에 이엘의 낯이 창백하게 변했다.

“나의 성으로 돌아가자.”

제복을 잘 차려입고 등장한 미남자가 이엘의 앞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아, 안 돼……! 정신을 차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주드를 발로 걷어찬 로빈이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저를 향해 죽일 듯한 눈동자로 노려보는 인간 소년은 온몸이 잿더미에 피투성이였다. 쯧, 더럽힐 생각은 없었거늘. 로빈이 혀를 가볍게 찼다.

그러나 낯이 이전보다 좋아 보였다. 처음 그가 주웠을 땐 안 그래도 작은 체구가 잔뜩 마른 탓에 더 작아 보였는데, 지금은 재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얼굴에 생기가 있었다. 죽어 있던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 눈부시게 빛이 났다.

빌어먹게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주웠고 분명 내 소유라 말했는데, 어째서 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건가. 자신과 같은 색을 갖고 있던 눈동자가 개들과 같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더러운 소굴에서 너를 데리고 나가리라.

“폐하.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죽여, 전부.”

목례하며 물러선 뱀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쓰러진 늑대들을 하나씩 붙잡아 재갈을 물렸다. 이미 상당수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터라 제압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엘은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대충 지휘를 마친 로빈은 품속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엘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이엘은 로빈을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길 하나하나에 배려가 담겨 있어 소름이 끼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캐한 연기 속에 스며든 가스로 인해 점차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이엘은 흐릿한 시야를 잃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지만 오래 견디진 못하리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돼. 어떻게든…….

“너 하나 잡자고 쓸데없는 일에 피를 많이 흘렸다. 알고는 있나?”

로빈은 이엘의 목 뒤로 팔을 넣어 그녀를 일으켰다. 이엘은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경비를 서고 있던 늑대들이 죄 쓰러져 있었고 성전 안으로 침입한 뱀들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은신이 가능한 자들이니 지금도 이 성지를 둘러싸고 있을 개체수가 상당하겠지. 이쪽은 전부 둔과 테르였고, 뱀들은 우논이 훨씬 많았다. 이 모든 게 결계를 허물고 우논 늑대들을 빼돌리기 위한 함정이었다.

“도망치더라도 늑대의 소굴로 가지는 말았어야지.”

“당신……!”

“개들의 냄새에 네가 가려질 거라 생각했나? 오히려 더 튄다는 건 전혀 몰랐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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