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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9화 (59/488)

59화

새끼 늑대가 힘겹게 눈을 뜨며 이엘을 발견하곤 웃었다. 오헬이다! 늑대의 눈빛이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붉게 충혈되었던 늑대의 커다란 눈망울에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 달리고 말았다. 이엘은 참담함과 분노를 삼키며 황급히 재갈을 풀어 주었다.

“돌아가자, 슈프.”

기운 없이 헉헉거리는 늑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새끼 테르라고 해도 그 덩치는 인간에 비할 수 없다. 조금 전에 남자 넷이 달려들어 겨우 질질 끌고 갈 정도였으니까.

조급해졌다. 슈프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데다가 유독가스가 빼곡한 공간에 장시간 노출되어 있었다. 서둘러 오드에게 데려가야 해. 이럴수록 더 차분해져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급했다.

“역시…… 너였구나, 레타 출신 놈…….”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남자들 중 빼빼 마른 남자가 이엘을 알아보았다. 피가 흐르는 허리를 부여잡고 나무에 기댄 채 숨을 헐떡거리던 남자가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네가 늑대들이랑 지낸다고 해서…… 완전히…… 완전히 늑대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냐, 꼬맹이……?”

“…….”

“보스가 널 찾고 있다. 네놈이…… 황자의 반지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

“이번 습격. 늑대가 목표라고…… 생각했나? 아니. 네가 목표야.”

뱀과 연합한 인간들이 이렇게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건, 단순히 늑대들을 잡아가기 위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눈앞에서 새끼들을 빼앗겼으니 다시 납치하러 온 거라고. 그래서 슈프도 데려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뱀도, 인간도 나를 노렸다고?

슈프의 안전을 살피던 이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가 어찌 됐든 슈프를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죗값은 받아야지.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라이플을 장전한 채 그를 향해 조준했다. 남자는 피를 토해 내면서도 이엘을 쳐다보며 낄낄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곧…… 인간의, 인간의…… 시대가 다시 올 게다.”

“죽기 전에 하는 말치곤 말이 너무 많네요.”

“꼬마야.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짐승 놈들의 발만 닦으며 살 줄 알았냐……? 천성이 위에서 놀던 놈들이…… 우리 인간이야. 바, 반란은…… 시작될 거라고…… 커억……!”

남자는 피를 잔뜩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말은 새로운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1차 전쟁이 터지고, 2차 전쟁이 터졌을 때부터 이런 상황은 이미 예견된 미래였다. 저 남자의 말처럼 인간들은 날 때부터 위에 존재하던 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상황이 뒤바뀐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란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건 이종족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황자의 반지가 내게 있다고 누가 그러죠? 저는 갖고 있지 않은데요.”

“화, 황녀의 반지를 갖고 있다면…… 그 쌍인 황자의…… 반지도 이, 있을 테지…….”

“어림짐작한 거군요.”

그 순간 남자는 또 한 번 입 밖으로 핏덩이를 토해 냈다. 굳이 총을 쏘지 않아도 얼마 못 가 숨이 멎을 것이다. 이엘은 죽음을 앞에 두고 주절거리는 남자의 허리를 발로 밟았다. 총알이 박힌 곳에서 피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커헉!”

“그렇게 죽여 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아도 아저씨는 곧 죽어요.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만하시죠.”

“여, 역시…… 너 뭔가 수상……하……구나. 뭔가…… 수, 숨기고 있어…….”

역시 인간은 눈치가 빠른 종족이다. 이엘은 다시 한 번 남자의 허리를 발로 꾹 누르며 총구를 그의 이마 위에 붙였다. 이제 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의 목숨을 걷어 갈 시간이다.

“이, 인간들의 시대가 오면…… 화, 황위는 황자의 바, 반지를 갖는 사람이…… 황제가 될 거야. 그리고 그건 우, 우리 보스가…….”

말을 다 마치지 못한 남자가 눈을 홉뜨고 입을 벌린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마에 짓누르듯 붙이고 있던 총을 내린 이엘은 잔혹한 현장을 눈에 담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총을 들고 있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밭은 숨도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죽였다…….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어. 아무리 자기 위로를 해도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황자의 반지. 이엘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말을 곱씹었다.

황가에는 두 개의 반지가 존재했다. 황자와 황녀의 반지. 각각 황제와 황후로부터 받는 것으로 값비싼 것은 같지만 가치는 달랐다.

황자의 반지는 그 자체가 옥새를 의미했다. 비상시 황제의 대리 역할을 할 정도로 승계권이 있는 황자에게만 주어지는 반지였고, 실제로 그 반지를 받은 황자가 황위에 오르는 게 전통이었다.

반면 황녀의 반지는 루비로 치장된 값비싼 반지에서 그칠 뿐이었다. 어차피 반지를 받은 황녀는 혼례를 올리면 황궁을 떠날 테니, 황녀가 태어날 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반지가 황녀의 반지였다.

그러니 황녀의 반지를 받게 된 그 턱수염이 황자의 반지를 노리는 것도 이해는 됐다. 내가 둘 다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들의 생각대로 다시 인간이 상위로 올라가는 시대가 온다면, 그 황위는 이제 누구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그들은 황족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황자의 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황위에 오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슈프. 괜찮니?”

일단 쓸데없는 생각을 정리하고 슈프의 안전부터 챙겼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가늘어진 숨소리로 힘겹게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그나마 이엘의 목소리를 들은 덕분인지 억지로 제 숨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타까움에 이엘이 슈프를 끌어안을 때쯤, 그렇게 기다리던 아군이 도착했다.

“오헬. 네가 왜 여기에……,”

“폐하! 슈프가 다쳤어요!”

안개 속에 뒤섞여 있던 인간 냄새 중에 너도 있었을 줄이야. 노아는 그녀를 확인하자마자 벼락처럼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다급하게 저를 찾는 이엘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처럼 슈프가 우선이었다. 노아의 지시에 늑대들이 달려들어 기절한 슈프를 부축해 세웠다.

“오헬. 내가 분명 성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다른 늑대들은 어디에 있지?”

“주드와 로날드, 그리고 리퍼는 성지 안에 있습니다. 오드가 결계를 쳐 놨으니 안전할 거예요.”

“그들의 안전을 묻는 게 아니잖아!”

그들은 너를 보호하기 위해 붙여 둔 호위병이었거늘. 노아가 눈을 감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일 먼저 공격을 받은 곳은 성지였다. 성지에서 들려온 하울링에 황급히 달려갔지만 갑작스레 영지 곳곳에 총과 폭탄이 터지며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뱀과 인간이 기어코 손을 잡은 것이다.

“너는 내 말이 우습나? 내가 분명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진 성전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를 보호하려는 날 우습게 생각하는 건가?”

“아니요,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운이 빠진 채로 순순히 잘못을 고하는 이엘을 바라보며 노아는 차마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간 잘 가꿨다고 생각했던 영지는 온통 쑥대밭이 되었고, 다친 개체들이 상당했다. 그나마 성지에 안전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인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됐다. 그것도 총을 들고 얼굴엔 피가 잔뜩 튄 채로.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던 노아는 인간 남자들이 전멸한 것을 확인하고는 이엘을 돌아보았다. 긴 총을 들고 있는 소년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제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겠지.

그녀의 코 아래로 엉성하게 묶인 천이 그의 눈에 거슬렸다. 노아는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뻗어 이엘의 입을 가려 주던 천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금 제대로 묶어 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이엘이 손을 홱 뻗어 노아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너무 빠른 행동에 노아는 방어를 하거나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검을 뽑자마자 노아를 밀쳐 내고 순식간에 검을 두어 번 휘두르며 상대를 푹 찍어 버렸다.

“폐, 폐하!”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순식간에 남자의 숨을 앗아 갔다. 목과 상체에 길게 상흔을 남겼고 정확하게 가슴 위에 꽂혔다. 이엘이 마지막에 다리에 총을 쐈던 남자였다. 여태 기절한 척하다가 노아의 뒷모습을 보고 달려든 모양이었다.

이엘은 남자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고 바닥에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기운이 죄 빠져 버렸다.

“오헬!”

달려오려는 앤디를 말린 노아가 친히 이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엘은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제 손을 뻗어 잡았다.

이엘을 일으켜 세운 노아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손수 닦아 주었다. 그는 묵묵히 새하얀 얼굴을 적신 피를 닦아 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얼굴을 덮어 주고 코부터 입까지 단단히 동여맸다.

“네 덕에 나와 슈프가 살았군.”

“타이밍이 좋았던 거예요.”

검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이엘은 부러 노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네가 해야 할 일도 알고 있겠지?”

“네. 성지로 돌아가 안전하게 기다리겠습니다.”

“앤디. 슈프와 오헬을 성지까지 데려다주거라.”

“네, 폐하!”

이엘은 가볍게 앤디의 등 위로 올라탔고 그 외에 몇 마리가 슈프를 태운 채 빠르게 숲을 빠져나갔다. 안드로는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노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진 그의 검을 들어 노아에게 건넸다.

“폐하. 보셨습니까?”

“…….”

“분명 황실 검술이었습니다.”

아주 찰나와 같은 순간에 발견했다. 검을 쥐는 순간부터 그 검을 뽑아 휘두르고 찔러 넣을 때까지. 모든 순간순간이 느린 장면처럼 눈에 박혔다. 아주 익숙한 동작이었다. 태어나 선별된 우논 늑대들이 검을 쥐는 순간부터 배우던 일련의 동작들.

과거 공작 가문 시절 늑대들은 황실기사단, 그중에서도 제 1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어릴 때부터 황실 검술을 연마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황실 검술을 잘 안다.

“폐하.”

“지금은 영지 수습과 추격에 집중하도록.”

노아는 손을 들어 안드로의 말을 제지했다. 그러곤 서둘러 도망친 자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늑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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