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평화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오드도 결계를 치면서 혀를 찼다. 그의 또 다른 결계가 땅 아래 이온에게 걸려 있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로니, 정신 차려 봐. 응? 로니!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날드는 눈을 감고 정신을 잃었다. 늑대를 끌어안으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오, 제발…….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는 사이, 밖에 나갔던 주드가 날랜 발로 뛰어 들어왔다.
“슈프가 없어!”
“뭐?”
“슈프가 사라졌어.”
이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옆에는 쓰러져 있는 로날드와 리퍼뿐이었다. 한 마리가 없다. 슈프가 없어.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결계를 치고 있던 오드가 고개를 저었다. 세 사람이 방심한 사이에 누군가 슈프를 데려갔다.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진 새끼 늑대를 떠올리며 소녀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어째서……? 목표는 내가 아니었나? 뱀들이 공격한 게 아니었어?
“일단 넌 위에 올라가 있어. 나오지 마, 오헬.”
“슈프는? 슈프를 찾아야 해.”
“그건 폐하께 맡기자. 나는 널 지키는 게 우선이야. 올라가.”
잠깐이지만 이엘도 이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 화약 냄새가 틀림없다. 그리고 그 화약 사이로 유독가스를 흘려보낸 거야.
그래. 이건 인간들의 짓이다. 뱀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새끼 늑대들을 노리고 벌인 짓이야. 턱수염이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손톱을 까득 깨물며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왜 영지 안은 모든 늑대들에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인간들이 반격을 할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적어도 마지막 밀매장 습격 사건 때 첨단 장비를 들여왔던 것을 잊고 살지는 말았어야 했다. 머리를 굴리는 수준이 벌써 그 정도까지 올라갔다면 영지를 습격하는 일은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순간 저 멀리서부터 커다란 하울링이 들려왔다.
“폐하께서 걸음을 돌리셨어. 오실 수가 없다고……,”
주드의 말과 동시에 갑자기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귀를 때리는 듯한 폭약 소리와 엄청난 총성이 영지 전역에서 들려왔다. 은은하게 달빛만 비치던 성전 밖이 아수라장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터진 화약이 번쩍번쩍 하늘을 수놓았다. 동시에 넓은 영지 가득,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비웃듯 폭발음이 훨씬 크게 연달아 들려왔다.
“인간이야.”
“…….”
“인간들이 온 것 같아.”
이엘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화롯가 근처로 다가갔다. 노아의 허락하에 구해 온 장총을 하나 들고 성전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앞을 잿빛 늑대가 말렸다. 안 돼! 그녀의 옷 끝을 이빨로 물며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는 주드를 뿌리쳤다.
“보면 몰라, 주드?”
“오헬!”
“지금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
“인간들이 복수를 하러 온 거라고. 너희를 잡으러 왔어.”
“오헬.”
“누군가 정보를 흘렸어.”
“…….”
“종족회의 기간과 장소를 누군가 흘린 거야.”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 있는 종족이 누굴까. 이엘은 긴 총을 들어 올려 자세를 부드럽게 잡았다.
“뱀이야.”
“뭐라고?”
“뱀이 인간과 손을 잡았나 봐.”
말도 안 돼. 주드가 놀란 눈을 끔뻑거리는 새에 이엘은 성전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오드는 지팡이를 꾹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성전 밖은 불벼락이 내린 것처럼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오드의 결계가 아니었다면 모두 화염에 휘말려 죽었을 것이다.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주드.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오헬! 가지 마!”
“슈프를 데려올게.”
만일 상대가 뱀만이었다면 어떻게든 성전 안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함께 있다면 되레 위험한 것은 늑대들이었다.
그러니까 내 목숨은 내가 지켜야 할 차례야. 여기까지 도움을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적어도 이엘은 눈앞에서 뺏겨 버린 슈프를 찾아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면목이 선다.
그래야 노아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
“오드. 부탁할게. 주드랑 로날드, 리퍼를 잘 숨겨 줘.”
“엘. 대체 어쩌려고 그래.”
“있잖아, 오드. 난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냈으면 좋겠어.”
“이엘.”
“다녀오면 우리 여길 떠나자.”
“…….”
“내가 할 일을 자꾸 간과하게 돼. 이러다 정말 이온을 잊어버리겠어.”
이러려고 땅 위로 올라온 게 아니잖아. 이엘의 덧붙여진 말에 오드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저를 믿어 주는 오드의 말에 이엘이 빙그레 웃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은혜를 갚는 쪽은 자신이 되어야 했다.
슈프는 내 손으로 되찾겠어.
*
“뭐 하냐?”
“아니…… 자꾸 뭐가 따라오는 것 같단 말이야.”
“시끄러워. 보스를 만나기 전까진 절대 허튼짓하지 마. 소음기도 망가져서 총이라도 쐈다간 늑대 새끼들한테 걸린다고. 지금 우리 인원으론 늑대들한테 걸리면 전멸이야.”
“그, 근데 우리 이렇게 습격해도 되는 거야? 보복당하면 어떡해…….”
“야. 너는 그렇게 간이 작아서 어떻게 살래? 지금 우리가 더 물러날 곳이 어디 있냐. 보복당해 봐야 죽는 게 다잖아.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똑같다고, 멍청한 놈아!”
“근데 정말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것 같다고!”
겁에 질린 퉁퉁한 남자의 말에 빼빼 마른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긴 총을 어깨에 걸치고 퉁퉁한 남자가 가리킨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곳에선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침까지 꿀꺽 삼키며 우거진 수풀 가까이로 다가간 남자가 빠르게 손으로 홱― 수풀을 헤쳤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겁쟁이 새끼. 아무것도 없잖아!”
“아, 아닌데……. 정말 뭔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구.”
“이런 멍청한 새끼는 대체 왜 데리고 오자고 한 거야.”
장총을 다시 둘러멘 빼빼 마른 남자가 퉁퉁한 남자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덕분에 큰 덩치로 뒤뚱거리며 중심을 잃은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며 질질 끌려가고 있던 슈프의 꼬리를 짓누르고 말았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눈을 홉뜬 슈프가 괴상한 소리와 함께 고통에 몸부림쳤다.
“닥쳐!”
깨앵―!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후려 맞은 슈프가 힘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렇게 아무 힘도 못 쓰고 쓰러졌는데도 남자들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늑대를 아예 죽여 버릴 작정인 건지 미친 듯이 후려 패기 시작했다.
“개새끼!”
“더러운 이종족 새끼들!”
“죽어, 이 쓰레기들아!”
“감히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감히 너희가?!”
끝없는 분노로 얼룩진 폭력을 작은 새끼 늑대에게 풀어 대고 있었다.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모든 걸 지켜보던 이엘은 참혹한 광경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원래는 기회를 보다가 안개를 이용해 슈프를 빼돌려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총을 들고 왔다고 해도 사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눌 순 없었다. 중요한 건 자신과 슈프의 안전이었으니까.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슈프가 죽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능숙하게 총에 소음기를 장착하고 탁해진 시야 확보를 위해 심호흡을 깊게 했다. 손에 검과 총을 쥔 이상, 누군가는 이 차가운 물체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엘은 땅 아래서 그 대상이 오직 이종족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종족이 아닌 인간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이종족을 구하기 위해.
놈들은 다섯 명. 하나라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슈프도, 자신도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요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라이플을 잡고 조준을 마친 이엘은 거침없이 손을 당겼다.
“커억!”
“뭐, 뭐야!!”
소리 없이 날아간 총알이 정확하게 빼빼 마른 남자의 허리에 박혔다. 죽지 못한 남자가 괴성을 질러 댔고 슈프를 때리던 남자들은 당황해서 허공을 향해 의미 없는 총질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 무턱대고 총알만 쏘아 대는 것이다.
나무 위에 올라 바짝 숨어 있던 이엘도 제 옆으로 터지는 총성에 귀를 막으며 더욱더 몸을 깊게 숨겼다. 그사이 빠르게 탄을 갈아 끼운 그녀가 잽싸게 몸을 돌려 총알을 바꾸고 있던 검은 머리 남자를 향해 쐈다.
“컥!”
“토, 토마스!”
벌써 둘이나 바닥에 쓰러져 버리자, 검은 안개 속에서 인간들은 당황하며 조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실수를 연발했다. 확실히 안개는 자신을 가려 준다는 점에선 약이었지만, 상대마저 가린다는 점에서 독이었다. 이엘 역시 시야를 확보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다. 오감이 마비된 것처럼 안개 앞에 무기력해진 남자들과 달리 이엘은 안개를 이용하는 쪽을 택했다. 오랜 시간 캄캄한 곳에서 지낸 터라 눈이 잘 안 보이는 편이니 안개가 있건 없건, 그녀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일렁거리는 공기를 느끼고 망설임 없이 총을 쐈다.
다시 한 번 탄을 갈아 끼우려 할 때, 자신이 앉은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대지를 흔드는 엄청난 발 굴림 소리였다. 총소리를 들은 늑대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엘은 인간들이 무의미한 총질을 하는 새에 빠르게 나무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우거진 숲 사이에 다시 몸을 숨긴 이엘은 뻑뻑해진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가를 비볐다. 아무래도 이 안개엔 유독 물질이 묻어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 입고 있던 소매 끝을 부욱 찢은 이엘은 대충 제 코와 입을 가렸다. 눈은 포기했다 치더라도 예민한 코까지 잃을 순 없었다.
“이 늑대 새끼들이!!”
광분한 채로 성급하게 총을 쏴 대던 남자의 손을 향해 차분히 방아쇠를 당겼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료들이 하나하나 죽어 나가자 남자들이 겁에 질렸다.
반쯤 미쳐 버린 건지, 살아남아 있던 남자 두 명 중 하나가 제 손으로 다른 남자를 쏴 죽이고 말았다. 동료를 죽였다는 것에 놀라, 겁에 질린 채 다리를 달달 떨던 남자는 끝내 옷에 실금해 버렸고 이엘은 가볍게 그 남자의 다리를 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슈프! 정신이 들어?!”
모두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달려가 슈프의 안전부터 챙겼다. 얼마나 맞은 건지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리 중에서도 아름다운 하얀 털색을 자랑하던 슈프였는데……. 그 하얀 늑대의 털색이 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