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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7화 (57/488)
  • 57화

    르네가 사라지고 난 곳에 홀로 남겨진 노아는 두 주먹을 바르쥐었다.

    문득 20년 전이 떠올랐다. 황실기사단 중 제 1기사단원들은 전부 늑대들로 꾸며진 집단이었다. 그만큼 늑대들은 황실에 충성했고, 인간과 가까웠으며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제 1기사단을 모조리 원정을 보내 놓고, 그사이에 나머지 기사단들이 황제의 명을 받아 늑대들의 영지에 쳐들어와 암컷을 무작위로 학살하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노아―’

    노아의 어머니 루나도 그날의 희생양이었다. 이종족의 능력을 막아 낼 수 있는 보호석으로 잔뜩 치장한 채 영지로 들어온 기사단들은 이곳을 피의 평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노아는 승계 수속을 밟고 있었고, 아비를 따라 제 1기사단과 함께 원정을 떠났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아버지 무어와 함께 영지로 돌아왔을 땐, 루나를 비롯한 모든 암컷들과 수컷 일부가 죽어 버린 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황폐한 영지와 작위를 노아에게 떠넘기고 모두가 죽어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왕이시여.”

    곁으로 다가온 안드로가 노아를 불렀다. 핏줄이 다 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던 그는 새파란 안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안드로는 제 왕이 오랜만에 보이는 지치고 피곤한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저들이 떠납니다. 그의 말에 노아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겨우 시선을 올렸다.

    “안드로.”

    “예, 폐하. 명령하십시오.”

    “황실 역사서를 가져와라.”

    “네? 황실이라고 하시면…….”

    “그래. 르뷔 제국서. 아마도 불타 버린 황궁 도서관에 있을 테지. 뒤져서라도 찾아오도록 해라.”

    “예, 폐하. 하지만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당시에 보이는 족족 다 태워 버려서.”

    “로빈은 갖고 있을지도 몰라.”

    “…….”

    “암암리에 아랫것들을 시켜 찾아내라.”

    “예, 폐하.”

    노아는 안드로의 곁을 지나쳐 떠날 채비를 하는 이종족들에게로 향했다. 특히나 그가 주시하고 있는 자들은 뱀들이었다. 괜히 르네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엘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었다.

    노아는 로빈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로빈은 미련 없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그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반면 저 멀리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하이에나 세쌍둥이는, 참…….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군. 미간을 찌푸리며 노아가 그들을 노려봤지만 세 남자는 아랑곳 않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참 열렬한 시선이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노아의 옆으로 늑대의 모습을 한 주드가 다가왔다. 고개를 끄덕인 노아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금세 닫아 버렸다. 영문을 모르는 주드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제 주인이 할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손을 뻗어 주드의 털을 쓰다듬은 노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오헬은?”

    “오헬이요?”

    “그래. 뭘 하고 있지?”

    “오드를 도와서 이것저것 하던데요. 제가 나오기 전까진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

    “내일이면 밖으로 나올 수 있어서 좋아하던걸요.”

    웃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음울한 소년이었지만 이따금 그 나이 또래의 인간들처럼 활짝 웃기도 했다. 좋고 싫음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정말 가끔은, 좋아하는 걸 말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주었던 그 장미 봉오리를 가장 좋아한다고.

    “걱정 마십시오, 폐하. 옆에 테르들이 잘 지키고 있으니까요. 이제 뱀들도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괜찮을 겁니다.”

    “그래.”

    “그리고 폐하께서 당분간 총기도 허가하셨다면서요. 여차하면 쏘겠죠, 뭐. 보기보다 강한 녀석입니다, 오헬은.”

    마냥 보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한다. 주드 본인도 몇 차례나 이엘에게 보호받았으니까.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은 제 왕의 눈치를 보며 주드는 형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숨기는 게 많구나, 넌.

    처음 봤을 때부터 모든 게 드러난 인간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조사를 해도 그의 뒤는 알 수가 없었다. 제 입으로 아비가 연구원이라고 했지만, 탄광지에선 빈민가 레타 출신이라 말했다. 이곳으로 올 때도 가진 것 없이 맨몸으로 왔으면서도 암시장에서 주드를 사기 위해 황녀의 반지를 꺼냈다고 했다.

    그래, 황녀의 반지. 르네가 의심할 법도 했다. 새카만 머리색과 보기 드문 녹색 눈동자. 거기에 황녀의 반지까지 갖고 있었다?

    황녀의 반지는 매년 새로 만들어져 새로 태어난 황녀에게 주기 때문에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것도 아니었다. 황녀가 혼례 후 황실을 나가 자신의 딸에게 그 반지를 유품으로 남기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반지를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황족의 피가 섞이긴 했다는 뜻이 된다.

    뭐, 레타 출신으로 황실에 들어가 노략질을 해서 가져간 게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불확실하나 지금 상태론 둘 다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노아는 분명 그 모든 걸 알고도 그를 제 무리에 넣어 주었다. 단지 주드를 구해 주었단 이유만으로. 저가 내린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20년 전, 가장 큰 배신을 당했던 건 너희 일족이 아니던가.’

    인간의 욕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간다고 했던가. 노아는 자신의 마음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단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곁을 주고 무리를 만들어 줄수록 노아와 늑대들도 이엘에게 바라는 것들이 많아졌다.

    적어도 자신들에겐 비밀이 없었으면 했다. 적어도 속이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20년 전에 이미 크게 인간에게 데었기 때문에. 또 곁을 준 자가 뒤통수치는 일은 없었으면 해서.

    *

    모든 종족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성지로 가는 걸 막고 있던 것들이 열렸다. 늑대들도 주드와 로날드, 리퍼, 슈프만 남고 모두 제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오늘 저녁에 노아가 성전으로 와서 식사를 같이 하겠다는 전언이 있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돌연 약속이 취소됐다. 덕분에 이엘은 오랜만에 오드, 주드와 나란히 단란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젠 편식 안 하는구나?”

    “넌 아직도 나를 애로 보는 거야?”

    “어머. 네가 아직 성체는 아니잖아.”

    “성체 바로 직전이거든?!”

    이엘의 약 올림에 흥분한 주드가 씩씩거리자, 바닥에서 고기를 먹고 있던 늑대 세 마리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새끼 테르들이 저를 보고 웃는 걸 알아챈 주드는 금세 본체화를 해서 세 마리를 응징하느라 한바탕 난리였다. 결국 보다 못한 이엘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 나서야 주드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 번만 더 놀리기만 해. 그땐 너라도 정말 가만 안 둬.”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어서 드세요, 우논 님.”

    “야!”

    “농담이라니까.”

    긴장이 사라진 곳에선 웃음소리만 터져 나왔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주드는 며칠 새에 더 자랐다. 이제는 정말 어엿한 성년의 모습이었다. 겉나이도 이엘보다 한참 많아 보일 정도로.

    “이제 보니까 너 정말 많이 컸다, 주드.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

    “그걸 이제 알았어?”

    목소리도 낮아지고 얼굴선도 더 굵어졌다. 주드를 신기한 듯 바라보자 바닥에서 먹이를 먹던 새끼 테르가 입을 열었다.

    “원래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금방 성장한대.”

    “그렇구나.”

    “주드 님은 널 지키려고 성장하신 거야!”

    “우리도 널 지키고 싶으니까 빨리 성장할래!”

    “그건 우논에게나 해당되는 거야, 이 어린 테르들아.”

    짐짓 위엄이 실린 목소리로 핀잔을 주는 주드 때문에 또 웃음이 터졌다. 계속해서 자신을 얕보는 듯한 그녀의 웃음에 주드가 완전히 골이 나서 미간을 확 찌푸렸다.

    “또 왜 웃는데?”

    “아니, 그냥. 좋아서 웃지.”

    “좋긴 뭐가 좋아.”

    “정말 날 지키려고 성장한 거야?”

    “이래 봬도 은혜는 갚을 줄 알거든.”

    “근데 내가 널 몇 번이나 구해 줬더라. 암시장에서 한 번, 사냥 나갔다가 절벽에서 또 한 번, 앤디 님한테 혼날 때 두 번…… 아! 그리고 며칠 전에 하이에나 왕자님에게서 또 한 번.”

    “야.”

    “나한테 은혜 엄청 갚아야겠다, 너.”

    저게 또 약을 올려? 주드가 으르렁거리며 금방이라도 식탁을 엎을 기세를 퍼붓자 이엘이 깔깔거리며 포복절도했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던 오드도 작게 웃었다.

    즐거운 한때였다.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과 평안함에 성전 안이 들썩였다. 그렇게 옥신각신 떠들며 식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이었다. 바닥에 늘어져 서로 장난을 치고 있던 로날드와 리퍼, 슈프가 갑자기 귀를 쫑긋거리며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냄새가 나.”

    “이게 무슨 냄새지?”

    “탄 냄새 같기도 하고…….”

    이런 비슷한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는 새끼들이 저들끼리 중얼거리며 자리를 뱅뱅 돌다 마침내 성전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밖은 온통 검고 찬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늑대 세 마리는 잔뜩 경계하듯 몸을 부풀리고 성전을 막았다.

    이상하다. 이런 인조적인 냄새는 어디서도 맡아 본 적이 없는데. 로날드가 본능적으로 숨 쉬는 것을 일순 멈췄다.

    그때였다. 제일 먼저 뛰어나가 코를 킁킁거리던 리퍼가 별안간 바닥에 툭 쓰러지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슈프도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깜짝 놀란 로날드는 숨을 멈춘 채로 둘에게 다가가 혀로 핥았지만 두 늑대는 깨어나지 못했다.

    습격이다.

    짐승의 본능이었다.

    아우우―! 연기를 마시고 쓰러질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하울링으로 경보를 울렸다. 아우우―! 다시 한 번 경보를 울리자, 이곳저곳에서 로날드를 향한 답신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로날드가 탁해진 시야 속에서 닫힌 성전 문을 확인했다. 노아가 명령한 대로 주드는 이엘을 보호하기 위해 성전 문을 닫는 것을 택했다.

    로날드는 바닥에 휙 쓰러져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이번엔 내가 오헬을 지킨 거야. 나도 주드 님처럼 은혜를 갚은 거야…….

    “안 돼, 오헬!”

    “이거 놔! 로니! 리퍼! 슈프!!”

    “오헬!”

    “놔! 놓으라고!!”

    제 이름이 들리는 곳을 바라보며 로날드가 컥컥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쉬면 쉴수록 제 폐부 안으로 들이치는 가스 때문에 온몸이 고통스러웠다. 바닥에 닿은 귀에 대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아군이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날드는 이제 거의 정신력으로 눈을 뜨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아 버리면 영영 죽어 버릴 것만 같아서 억지로 생을 붙잡고 있었다.

    “로니. 정신 차려 봐, 응?”

    결국 주드를 뿌리치고 성전 밖으로 뛰쳐나온 이엘이 축 늘어진 로날드를 살피기 시작했다. 혀를 입 밖으로 내밀고 거의 죽어 가는 늑대 세 마리를 바라보며 이엘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뒤따라 나온 오드가 지팡이를 들고 몇 번의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그사이 주드는 쓰러진 늑대 중 하나를 이빨로 물고 성전 안으로 질질 끌어 옮겼다.

    이엘도 다시 뛰쳐나온 주드와 함께 로날드를 옮기는 것을 도왔다. 그녀는 결계를 치는 것에 집중하던 오드를 다급히 불렀다.

    “오드! 빨리 치료를!”

    “안 돼. 지금 결계를 강하게 치느라 둘러볼 여유가 없어.”

    “어떡해. 아이들이 죽어 간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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