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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6화 (56/488)

56화

*

이엘은 피시와 작별 인사를 마치고 성전 안에서 오드를 돕고 있었다. 오드는 종족회의 기간 내내 성전과 왕성을 번갈아 다니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멸족된 줄 알았던 종족인 오드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이종족들이 꽤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노아와의 협의대로 오드는 왕성을 출입하며 혹시나 성지에 타 종족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시선 유도를 맡았다.

“이렇게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엘.”

“그러게. 종족회의 기간 동안 네가 너무 바빴잖아.”

“맞아. 그래도 폐하께서 회의가 끝나면 휴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어. 그럼 우리 잠깐 이온에게 다녀올까?”

“응. 그러자.”

한동안 이온에게 가지 못했다. 이온의 얼굴을 마주하면 계속해서 압박감에 시달려야 할 것 같아서…….

땅 위에서 보장된 기간은 겨우 열한 달 남짓이었다. 넉넉하게 열두 달 정도 될까. 그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체취도, 호르몬도 감추지 못한 채 땅 위에 남겨지게 된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과연 이온을 깨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보장된 1년 안에 해결하는 게 좋을 텐데.

지금밖에 기회가 없는데…….

“오헬! 이제 나가서 놀자!”

벌써 눈 위에서 한바탕 뒹군 모양인지, 늑대 여러 마리가 온몸에 눈을 달고 이엘을 불렀다. 이엘은 그들의 부름에도 가만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왜 그래, 엘? 오드가 옆에서 톡 건드렸지만 이엘은 들고 있던 서류를 꼭 쥐고 입을 다물었다. 엘……? 오드가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기름…….”

“응? 뭐라고, 엘?”

“……약이 얼마나 남았지, 오드?”

“글쎄. 대여섯 병. 넉넉히 반년 정도 남았겠구나.”

늑대의 무리로 들어온 지 한 계절을 지나, 두 계절을 채워 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이엘은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늑대를 만났지만 그들의 기름을 얻지 못했고, 독수리를 만났지만 그들의 눈알을 가져올 수 없었으며, 타이곤을 만났지만 감히 갈기털을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서 저를 향해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는 늑대들을 바라보며 이엘이 손을 뻗었다. 어린 개체 한 마리로 턱없이 부족하다면 저기 모인 여러 개체에게서 가져가면 될 것이 아닌가. 한순간 귀에서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엘은 뭐에 홀린 것처럼 제 앞에 둘러앉은 늑대들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성전 문은 닫혀 있다. 성장한 주드는 노아의 부름으로 왕궁으로 가 버렸고 여기에 남겨진 건 어린 늑대들과 자신, 그리고 오드뿐이었다. 늑대들이 그녀에게 잔뜩 호감을 느끼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성문이 열려 다른 이종족들이 돌아가는 틈을 타, 자신과 오드도 늑대의 무리를 탈출하면 된다.

기름을 얻어서 탈출하면……,

“무슨 일 있어?”

“오헬. 밖에 나가기 싫어? 추워?”

“오헬은 우리랑 달라서 감기에 잘 걸려. 우리끼리 나가서 놀자!”

“나도 쓰다듬어 줘!”

“아냐, 나만 쓰다듬어 줘!”

그녀의 손바닥 안으로 부드러운 털들이 감겨 왔다. 검푸른 늑대 한 마리가 푸르릉―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이엘의 뻗은 손 안에 제 머리를 들이댄 것이다.

그를 신호로 멀뚱히 바라보던 다른 새끼 늑대들도 이엘에게 달려들었다. 저마다 안아 달라며, 쓰다듬어 달라며 그녀를 향해 재롱을 한껏 부리고 있었다.

“엘.”

뒤에서 오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서 말없이 달려드는 늑대들을 쓰다듬고만 있었다.

……어떻게 이 애들을 죽일 수 있겠어, 내가. 정을 주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향해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끔찍하고 암담한 현실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먼저 나가 있을래? 나도 금방 나갈게.”

“알겠어, 오헬. 빨리 나와!”

“추우니까 망토 입고 와!”

“가자, 얘들아!”

새끼 테르들이 전부 나가고 이엘은 두 손을 펼쳐 얼굴을 그 위에 파묻었다. 차마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존재라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냈다. 오드는 들고 있던 촛대를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엘, 괜찮아. 늘 그의 위로가 따듯했지만 오늘따라 차가운 마음을 좀체 녹여 주지 못한다.

“오드.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엘.”

“이러다 이온을 구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

“저 애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니, 내가.”

천진난만하게 눈밭을 뒹굴며 뛰노는 늑대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바닥에 흐트러진 서류를 주워 들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 가는데 바보 같은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이러다 정말 이온이 죽어 버릴 수도 있는데…….

평생을 함께한 피붙이보다 겨우 몇 달 지낸 이종족에게 마음이 쏠리는 건 또 무슨 일이야. 이온을 부정하는 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은데. 이엘은 한숨을 집어삼키며 계속해서 자책했다.

“가끔 무리와 지내지 않는 이종족들도 있어. 무리에서 축출당하거나 스스로 뛰쳐나온 개체들도 있고.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늑대들은 만날 수 있어. 어려워도 찾으면 되니까. 네가 힘들다면 우린 이쯤에서 이 무리를 나가는 게 좋겠다.”

오드의 말이 옳다. 이곳에 계속해서 머문다고 해결 방도가 나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움만 가증될 뿐이었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드의 부축을 거절하고 2층으로 향했다. 역시 이온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온몸이 무거워진다.

*

“르네 님. 출발 준비를 할까요?”

“잠깐. 대기하고 있어라.”

“네.”

영문을 모르는 독수리들이 널따란 평원 위에 줄을 맞춰 서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한 손으로 정리한 르네가 한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성전이 있는 성지였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눈이 좋은 독수리가 그곳에 머물고 있는 인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르네는 성전 높은 곳에서 창문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이엘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 황녀와 닮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그대로 자랐다면 딱 저만 했을 텐데.

“그만.”

르네의 시야가 누군가로 인해 막혔다. 제 머리색처럼 새카만 정복을 입고 선 노아가 눈썹까지 틀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른 놈들이면 몰라도 너희가 저쪽을 보는 건 성지에 함부로 들어서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보는데.”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군. 미안하다.”

완전히 늑대의 무리에 속한 모양이군. 이렇게 왕이 친히 나서서 감싸는 걸 보면. 르네의 나지막한 말에 노아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르네의 시선이 다시 그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자세를 올곧게 유지할 뿐이었다.

“노아. 1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있나?”

“글쎄.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10년 전, 내가 황국의 황녀를 죽였던 것을 너도 알고 있겠지.”

“…….”

“황자는 네가 죽였고.”

그랬지. 노아는 여전히 무뚝뚝한 낯으로 대꾸했다.

“닮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무슨 말이야.”

“네가 보호하고 있는 그 인간.”

“…….”

“나는 첫눈에 내가 죽인 줄 알았던 그 황녀라고 생각했다.”

“뭐라고?”

“그때 확실히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으니 그 황녀는 절대 아니겠지, 성별도 다르고.”

“르네.”

“하지만 닮아도 너무 닮았어. 저 새카만 검은 머리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에메랄드를 박은 듯한 눈동자.”

“…….”

“완벽하게 황족의 씨앗을 닮았다고.”

르네의 말을 들으며 노아는 무의식적으로 저도 모르게 시선을 성지로 향했다. 그의 눈앞에 잔상처럼 남아 있는 이엘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론 그 머리색과 눈동자 색은 르뷔 제국 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뱀 종족이거나 황족이거나 혹은 그들의 혼혈이거나.

그러나 노아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추궁하지 않았던 것은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 학살을 잇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엘이 황족의 씨앗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내가 저 인간을 죽이길 바라는 거야?”

노아의 질문에 르네가 작게 웃었다. 이제 와서 무슨. 뒤이어 르네가 입을 열었다.

“다만 네가 또 속지 않기를 바란다.”

“…….”

“20년 전, 가장 큰 배신을 당했던 건 너희 일족이 아니던가.”

“…….”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것은 너희였으니.”

또 인간으로 인해 배신당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이야. 르네는 뒷말을 뱉고 제 무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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