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5화 (55/488)

55화

“뭐라고 그랬는데요?”

“아, 별건 아니고. 고맙다고, 글자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이제 단어를 조금 쓸 수 있게 됐다고…….”

그래요? 그렇게 묻는 인간의 얼굴에 생기가 잔뜩 피어올랐다. 별것 아닌 말인데도 이엘은 한껏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잘 됐네요, 정말로. 심지어 레온을 바라보며 웃기까지 했다.

쳇! 인간이 타고 있던 늑대의 입에서 괜한 투덜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깟 호랑이가 뭐라고! 늑대가 심술을 부리며 질투하자 이엘이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니, 너 질투하니? 그녀의 말에 로날드가 툴툴거렸다.

레온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참, 생경한 모습이다.

“엘타는 건강한가요?”

“어…… 응. 잘 지내.”

“이빨은 치료가 안 될까요?”

“그래. 치료하기엔 너무 늦었거든.”

인간들과 달리 이종족의 영지엔 의사가 따로 없으니 빠른 치료는 무리였다. 설령 근방 마을에 의학 지식이 있는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한들 인간의 도움을 받았을 리도 없고. 아쉽지만 엘타에겐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엘은 안타까움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레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졸지에 그녀의 시선을 받게 된 레온은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 엘타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아, 전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못할 것도 없지.”

“잘 지내고 있으라고. 꼭 만나러 가겠다고. 글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리고 빨리 성장하라고. 그렇게 전해 주세요.”

“…….”

“당신의 폐하께서 제가 방문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하셨으니 다음에 꼭 가겠습니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영지에 인간을 반길 이종족 따윈 없었다. 이 일과 무관한 사자는 당연했고, 호랑이들도 무리 생활을 하지 않으니 엘타의 사건이 있건 말건 인간의 재방문을 반기진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엘타의 가족 정도만 반기겠지.

하지만 왕인 자신이 허락한다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레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럼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레니 님.”

“그놈의 님 소리는.”

애칭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일까. 그게 아니면 그 애칭을 불러 주던 여자가 평생을 살았던 정원이라 그럴까. 레온은 가만히 늑대를 타고 사라진 인간을 쳐다보며 씁쓸하게 한참을 서 있었다.

*

“드디어 내일이면 자유야!”

아침 일찍부터 야단법석을 떠는 늑대들을 보며 주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시작과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 법인데 저렇게 날뛰어서야. 혀를 차는 주드를 보며 이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주드가 인상을 구긴 건 당연했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웃겨서.”

“뭐가 웃기냐고!”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애들이랑 같이 놀던 네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아서.”

“너 지금 나 놀리지?”

“음. 의도는 아니었는데 약 올랐어?”

실실 웃는 이엘을 향해 짜증을 부렸다. 회의가 열리는 기간 내내 펑펑 내리던 눈도 어제 낮부터 완전히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자 늑대들도 오랜만에 성전을 나가 따뜻한 날씨를 맘껏 즐겼다.

비교적 안정적인 날의 연속이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성지 안으론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다. 인간들과 다르게 신앙심이 깊은 종족들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그 모든 협정을 개의치 않고 찾아오는 인물이 있었으니까. 시간을 확인하며 서류를 정리하던 이엘은 로브를 걸치고 성전 문을 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올 확률이 높다고는 생각했지만…….

“안녕, 오헬.”

정말로 올 줄이야.

머리색과 비슷한 회백색의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나타난 피시는 이엘을 향해 작은 미소를 건넸다. 노아와 마주한 뒤부터는 성전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마지막 인사를 할 생각인 것처럼 오랜만에 그가 찾아왔다. 벌써부터 성지에서 뛰놀던 늑대들이 으르렁거리며, 여차하면 하울링을 할 생각으로 그들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가기 전에 인사하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피시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초조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제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 오헬……. 말까지 더듬으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피시는 끝내 손끝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불안 증세가 다시 생긴 것처럼 떨리는 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아, 헤어져야 해. 내가 여길 떠나면 영영 못 만나. 그 사실이 피시를 몹시 괴롭게 만들었다.

그에게 이별의 종류는 무엇이 되었든 슬픈 것이었다. 조이나는 물론이고 남은 두 형제와도 헤어지는 건 싫었다. 그게 패티스에게 구박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성을 나갈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그는 헤어지는 게 싫었다. 어떤 종류의 헤어짐도, 자신을 아프게 한다.

한편 피시의 이상행동에 늑대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날드는 저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뛰어오기 시작했고 주드 역시 늑대의 모습으로 빠르게 돌아간 상태였다. 다른 늑대들은 이엘의 옷 끝을 이빨로 물어 뒤로 당겼다. 피해! 다급함에 소리를 쳤지만 이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말리고 피시의 앞으로 더 다가갔다. 초조해진 늑대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오헬!”

“잠깐만. 괜찮아.”

“위험해!”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발발 떨고 있던 피시의 움직임이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아 가며 피시는 가쁜 숨을 천천히 돌렸다. 이엘은 품 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식은땀이 맺힌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그녀는 피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의 모습에선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보였으니까.

“괜찮습니다, 전하.”

“…….”

“여긴 아무도 전하를 괴롭히지 못해요.”

여전히 식사할 때마다 손에 땀을 쥐는 것도.

“전하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오, 오헬…….”

“그러니까 저를 따라 크게 심호흡해 보실래요?”

아직도 캄캄한 옷장 안을 두려워하는 것도.

하이에나 왕자님과 자신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피시도, 이엘도 모두 피해자일 뿐이다. 서로에게 남겨져 있던 것들을 빼앗긴 피해자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이엘은 피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손가락질하며 미친놈이라고 욕할 수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차차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고 있는 자신처럼 피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제넘은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가 하이에나의 이름을 걸고 제 편이 되어 주기로 했다면. 그녀 역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왕자님. 앞으로는 조금씩조금씩 세상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

“아직도 20년 전에 머물고 계시면 안 돼요. 이제 그만 알을 깨고 나오세요.”

피시는 물끄러미 이엘을 쳐다보았다. 이엘은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던 손수건을 돌돌 말아 피시의 손목 위에 묶어 주었다. 마치 며칠 전에 피시가 했던 것처럼.

“전하께서 제 편이 되어 주신다고 했으니 저도 전하의 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오헬.”

“이제 혼자 떠안고 계시지 않아도 돼요.”

그는 그저 기댈 곳이 필요한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의 형제들은 아마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의 주군이 사라졌고 무리를 이끌 자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우애를 가려 버렸다. 이제는 자신들의 앞만 볼 수밖에 없었고 옆에서 뒤처지는 피시는 그들에게 짐짝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피시만 여전히 20년 전에 머물러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끌어 줄 조이나가 죽어 버려서. 군주를 눈앞에서 잃어버려서.

“이제 그만 폭군에서 벗어나세요.”

피시의 손등 위로 이엘이 제 손을 얹어 작게 토닥거렸다. 피시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붉어진 뺨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맹목적인 눈빛으로 이엘을 바라보며 수줍은 소년의 얼굴이 되어 버렸다.

“얼굴…… 너무 보고 싶어서. 늑대 왕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 보러 왔어.”

“오늘 돌아가시는 거죠?”

“응. 그 남자가 잘해 줘……?”

“그 남자요? 노아 님이요?”

“응. 그 남자.”

잘해 주냐고 묻는다면……. 이엘은 안경 너머로 피시의 순수한 갈색 눈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네. 과분할 정도로요.”

“내가 그런 남자가 될 수 있을까……?”

“물론이에요. 전하께서 그럴 의지만 있으시다면.”

피시는 손가락으로 동그란 안경을 올리며 이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럼 그때 내게 와 줄 거야?”

“…….”

“응?”

“아……. 그게 놀러 가는 의미라면 노아 님께 말씀드려서 가 볼게요.”

“그 남자가 널 쫓아내면?”

쫓아낼까? 노아가 나를…… 쫓아내는 날이 올까? 내가 늑대의 기름을 훔치고 그들을 배신하면. 아니. 내가 황족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를 쫓아낼까. 나를 죽일까?

“글쎄요. 노아 님이 쫓아내신다면 갈 곳이 없긴 하네요.”

“그럼 나에게 와. 내가 있는 변경으로 와 줘.”

“…….”

“아니면 나를 불러. 내가 어디가 됐든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애틋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적극적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새끼가 처음 본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처럼.

이엘은 그런 피시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외로움 속에서 자꾸만 보이는 어린 시절의 제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다.

한편 뒤에 있던 늑대들은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우리 폐하가 오헬을 왜 버려?! 새끼들이 소리를 지르고 주드는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저 자식은 왜 자꾸 오헬을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진짜 미친놈이네. 주드와 로날드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언제라도 공격을 할 수 있게 몸을 크게 부풀렸다.

하지만 역시나 이엘이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말렸다. 그러니 다시 꼬리를 내릴 수밖에.

“내가 더 좋은 왕자가 되도록 노력할게. 꼭 그럴게, 오헬.”

“그래요. 왕자님은 그렇게 되실 거예요.”

“그때 널 왕으로 맞이할 거야.”

“네……? 백성도 아니고 왕이라니요……. 저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왕의 자리는……,”

“응. 오직 암컷만 가능하니까.”

“……전 남자예요, 전하.”

“그래?”

안경 너머로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며 피시가 예쁘게 웃었다. 그 어떤 것보다 순수한 존재를 앞에 두고 있으니 이엘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지금 이 짧은 대화에서도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이 소년은 거짓 하나 없이 제 모습을 다 보여 주고 있다. 새하얀 눈 위에 더러운 흙탕물을 붓는 기분이었다.

“네게 나는 냄새를 잊지 않을 거야.”

“무슨 냄새요? 이상한 냄새가 나나요?”

갑작스런 말에 당황한 이엘이 서둘러 입고 있는 옷자락을 끌어 냄새를 맡았지만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냄새였다. 냄새를 맡는 그녀를 쳐다보며 피시는 제 손목에 묶인 이엘의 손수건을 풀었다. 그리고 곱게 접어 제 품 안에 넣었다.

“아니. 좋아, 네 냄새.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

“네 냄새도. 네 얼굴도. 네 목소리도. 영원히 잊지 않아.”

“왕자님.”

“안녕, 오헬.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꼭, 데리러 갈게.”

그는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미간을 찌푸린 이엘에게 한 걸음 다가와 조심스레 그녀의 손끝에 제 손끝을 마주 댔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작은 스침이었다. 서로의 검지 끝이 닿았다. 그리고 이엘은 피시를 피하지 않았다.

허락이 떨어졌으니 피시는 조금 더 손을 뻗어 그녀의 손가락을 소중하게 움켜쥐었다.

“꼭 만나자. 꼭.”

그땐 나도 그 남자처럼 성장해 있을 거야. 키도 크고 몸도 커져서 그 남자랑 다시 붙어도 지지 않을 거야. 너를 버린다면 그 남자를 내가 응징할 거야. 그러니까 부디, 제발, 꼭 만나자. 그러자, 오헬.

“……발견했습니다.”

성지의 경계 바로 앞에서 커다란 회색 뱀이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녹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성지 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이에나 왕자와 함께 있습니다. 피시라고 하던, 그 정신이 좀 이상한 왕자 말입니다.”

그의 보고가 숲을 타고 숨어 있던 뱀들에게 조용히 전해졌다. 이대로 성 안에 있는 로빈에게 전달될 것이다. 리플은 예리한 눈으로 두 사람과 늑대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해가 저물면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샤아아― 듣기 싫은 뱀의 혓소리가 바람을 타고 성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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