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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4화 (54/488)
  • 54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레온의 짜증에도 노아는 웃을 뿐이었다. 어느덧 종족회의라는 명목하에 모여 연회를 연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1차적 안건이었던 인간들의 밀매장은 모조리 땅 위로 들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겁도 없이 테르부터 우논까지 잡아들이기 시작한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대부분의 종족들은 인간을 아예 몰살하자는 쪽에 표를 던졌지만 노아와 르네를 비롯한 몇몇 종족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과거와 같은 우를 다시 범할 수는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줄곧 제 종족이 대량 학살을 하는 것에 두 눈을 감고 있던 레온 역시 무효표를 던지며 반대에 가까운 입장을 보였다. 그로 인해 회의가 잔뜩 살벌해졌지만.

    “근데 의외였어. 네가 무효를 선포할 줄은 몰랐다.”

    “기본적으로 네 의견에 동의해. 과거와 같은 멍청한 짓을 반복할 순 없지.”

    “…….”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감히 밀매장을 열어 새끼들을 납치한 것들에겐 응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무효표를 던진 거야.”

    신뢰받지 못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레온은 제 백성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왕이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어쩌면 노아보다 더 왕다운 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보복까지는 눈감겠다는 소리구나. 노아의 말에 레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먼저 가서 쉴게.”

    “그래. 되도록 하이에나와 마주치지 않길 빈다.”

    “끔찍한 농담 하지 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싫으니까.”

    큭큭 웃는 노아를 뒤로하고 인상을 찌푸린 레온은 툴툴거리며 응접실을 나왔다. 아직도 제 코에서 빌어먹을 하이에나들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멍청한 왕자 셋을 왜 종족회의에 초대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노아는 일을 허투루 하는 놈이 아닌데. 한참이나 그 생각에 젖어 있다가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아예 떠올리지를 말아야지.

    며칠 내내 쏟아지던 눈도 오늘 낮부터 그치기 시작했다. 노아의 말에 의하면 심술궂은 놈의 심술이라는데, 그놈의 심술도 이제 슬슬 멈추려는 모양이었다. 하늘을 쳐다보던 레온은 문득 달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금회색 눈동자가 닿은 곳은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정원이었다.

    루나의 정원…….

    그에겐 친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죽음은 노아만큼이나 레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노아의 아버지, 무어의 자살 역시.

    왕좌에 오른 이후로는 이곳에 들른 적이 없었다. 영지에 초대받아 왕성까지는 왔어도, 그녀의 정원엔 발길을 향한 적이 없었다. 황폐한 곳을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노아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저곳은 추억이면서 동시에 죄책감이기도 했다.

    레온은 뭐에 홀린 것처럼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거대한 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넋을 놓고 걸어가던 그는 온실을 바로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루나 님.”

    정말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이 온실 안팎 정원에 빼곡했다. 만개한 꽃들은 차가운 눈 따위 우습게 여기며 보란 듯이 고개를 위로 쳐들고 있었다. 넋을 놓듯 꽃을 바라보며 그는 온실 안으로 걸음을 향했다.

    그 시절.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루나의 품에 안겨 훌쩍여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던 그 시절로…….

    “레니 님……?”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고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 바로 앞에서 화염이 피어올랐지만 금세 사그라졌다. 저만큼이나 놀란 표정의 이엘이 한 손을 보이며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오히려 제 안부를 묻는 이엘을 온전히 확인하고는 레온은 안도의 숨과 함께 바닥에 내려앉았다.

    “레니 님?”

    “뭐야. 피신 간 거 아니었어?”

    “피신이요?”

    영문을 모르는 이엘이 되묻자 레온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엘은 얼굴에 흙을 묻힌 채로 눈을 깜빡거리며 레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레니 님도 종족회의로 오신 건가요?”

    “아……. 그래. 맞아. 우리 폐하를 따라왔지.”

    “역시 그분도 오셨나 보군요.”

    “왜? 폐하를 뵙는 게 아직도 무서워? 듣자 하니 네가 씨앗을 훔친 건은 엘타 사건으로 넘어가신 걸로 아는데.”

    레온은 여전히 ‘자신’을 꺼려하는 이엘을 쳐다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엘타의 일이 아니었어도 제 손으로 직접 이엘에게 씨앗을 찾아 건넸으니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은 없었다.

    다만 여전히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의 일을 핑계로 씨앗 사건은 무마하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좋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구요.”

    “…….”

    “그냥…… 마주치면 조금 힘들겠다 싶어서.”

    그들의 왕은 타이곤이라고 했었지, 로처럼.

    그녀에겐 독수리도, 타이곤도 모두 불편한 존재였다. 그들을 마주하면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처럼 속이 타는 존재들이었다. 억지로 잊고 살고 있는 자신의 의무감을 마주해야만 하는 불편한 현실이었다.

    이엘의 알 수 없는 표정을 쳐다보던 레온은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손에 들린 촛대를 홱 가져왔다. 아까 자신이 손바닥으로 방어하면서 불이 꺼진 모양이었다. 레온은 가볍게 심지 위에 검지를 올렸다가 뗐다. 작은 촛불이 일렁이며 어둡던 온실 안을 환하게 비췄다.

    “그나저나 이렇게 종족회의에 같이 오신 걸 보니, 역시 레니 님은 귀족이셨군요.”

    “그래. 맞아. 근데 그 님이라는 호칭은 좀 안 붙이면 안 돼?”

    “네?”

    “내가 너보다 한참 위에 있기는 해도 말할 때마다 님이 붙는 거 꽤 듣기 싫거든.”

    아직 왕이라는 호칭도 낯설었다. 미간까지 찌푸리며 거절하자 이엘이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에 빠졌다. 그럼 다른 호칭으로 불러 드릴까요? 작위가 어떻게 되세요? 그녀의 물음에 레온이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졌다.

    적당하게 둘러대려면 낮은 작위 정도가 좋겠지만, 그때도 왕궁을 손쉽게 드나들었고 이렇게 왕을 따라 종족회의에 올 정도면 작위가 꽤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후작 이상은 돼야 의심하지 않을 테니……. 애당초 근위대라고 했으면 좋았으려나.

    “레니 님?”

    “됐어. 작위는 무슨. 너한테 내가 그런 걸 알려 줄 것 같아?”

    “아. 하긴 그렇겠네요. 어쨌든 저는 레니 님의 아군은 아닐 테니.”

    “그 님이라는 호칭 좀 빼라고.”

    “그러면 이름으로 부르라는 건가요? 그건 좀…….”

    “어차피 너랑 난 오늘 보고 안 볼 사인데 그게 뭔 상관이야. 여긴 너랑 나밖에 없는데.”

    맞는 말이긴 한데…….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신분이신 귀족께서 싫다고 하시는데 계속 우기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괜히 예우 따르려다 책잡힌다. 이엘은 최대한 다른 종족과 엮이지 않고 싶었다. 거기다 사자와 호랑이들은 이제 그만 알고 싶고.

    그의 말처럼 오늘 보고 안 볼 사이니 이 정도 선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다. 대충 고개를 숙이며 레온과 작별하려는데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근데 넌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네.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 종족회의 중이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인간이랍시고 덤벼들면 어떡해?”

    “괜찮습니다. 밤을 타서 움직이는 정도는 안전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붙여 주신 늑대들도 밖에서 대기 중이고요.”

    “…….”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생각해 주나 보네. 이엘은 다시 한 번 레온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실 이엘도 며칠 만에 성지를 벗어난 일탈이었다. 온실을 가겠다는 구실로 찌뿌둥한 몸 좀 풀 겸 산책을 나왔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레온을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처음 바스락 소리와 함께 온실 문이 열렸을 땐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노아의 개인 공간인 이 정원에 함부로 들어오는 자가 있다니. 노아일까? 그러나 달빛에 비친 모습은 노아와 상당히 다른 체격이었다. 늑대들은 제 주인의 개인 공간에 들어갈 리가 없으니 명백한 침입자, 다른 종족이 틀림없었다.

    몸을 숨긴 채로 빠져나가려던 이엘은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복슬거리는 금발 머리의 주인공은 성에서 만났던 ‘레니’라는 남자였다. 그래도 한 번 도움을 받았던 처지이니 모른 척하고 숨어 있기도 민망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먼저 알은척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까지 마친 이엘이 온실을 빠져나오자,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로날드와 주드가 가까이 다가왔다. 빨리 돌아가자며 그녀를 보채는 로날드를 향해 웃으며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주드는 코를 킁킁거리다가 몸을 낮추며 온실 안을 향해 공격 태세를 취했다.

    “주드?”

    “안에 누군가 있어.”

    “이, 있긴 누가 있어? 아무도 없어. 그냥 가자, 주드.”

    “아니. 침입자야.”

    대외적으로 두 종족의 왕이 친분 관계라 할지라도 늑대 무리와 사자, 호랑이 무리가 우호 관계인 것은 아니었다. 영지 밖을 벗어나면 먹이를 두고 서로 경쟁을 하는 관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종족회의 기간이었다. 절대로 작은 소동도 일어나선 안 된다. 흥분하다시피 이를 보이며 으르렁거리는 주드를 말리기 위해 이엘이 서둘러 손을 뻗었다.

    “주드, 그만해! 내 친구야!”

    “뭐?”

    “전에 호랑이의 영지에서 만난 친구야. 길을 잃었대. 그만 가자, 응?”

    “하지만 이 냄새는……!”

    “반가워. 오헬의 친구이자, 우리의 왕을 모시고 온 레니라고 해.”

    어둠 속에서 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 님……? 주드가 그를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레온이 더 빨랐다. 쉿― 주드를 보며 검지를 입에 댄 채로 작게 속삭였다.

    주드는 경계 태세를 풀고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조금 물러났다. 왕께서 왜……? 우리의 왕을 모시고 왔다는 말은 또 뭔 말이야……. 누가 들으면 경악할 말을 무심하게 툭 던진 레온을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레니.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참. 엘타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어.”

    “엘타가요?”

    이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금방이라도 늑대의 등에서 뛰어내릴 태세로 저를 쳐다보는 인간 소년의 눈은 의외였다. 만났을 때부터 강단 있기는 했지만 생기는 없었는데. 그래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내 영지가 불편해서였나?

    이엘은 빨리 말해 달라는 듯, 레온을 쳐다보며 미간까지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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