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새파랗게 어린놈이 건방지긴. 딱 봐도 내 온실에서 훔친 꽃을 가져온 것 같은데. 노아는 있는 대로 열이 받았지만 고개까지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는 놈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저 녀석, 정말 소문의 그 녀석이 맞긴 한 걸까? 패티스 놈이 변장이라도 하고 온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의심까지 하며 사라져 가는 피시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툭툭, 눈을 털며 성전 앞에 선 노아가 문득 시선을 위로 올려 하늘을 쳐다봤다. 저건 하늘을 지키라고 했더니 심술이 났나. 웬 눈을 이렇게 퍼붓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용들이란. 혀를 한 번 차며 성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옷을 갈아입은 이엘이 작게 웃으며 노아를 향해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가만히 이엘을 쳐다보던 노아는 들고 있던 꽃 뭉치를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꽃 뭉치를 받아 들던 이엘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분명 아까 피시가 주었던 그 꽃들 같은데 왜 죄다 얼어 버린 거지……? 마치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단단하게 얼어 버린 얼음꽃이 그녀의 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근데 그 녀석이 여긴 왜 온 거야.”
“글쎄요. 먹이를 찾다 헤맸을지도 모르죠.”
능청스러운 그녀의 거짓말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늑대들이 하나둘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제 주군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순 없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이엘에게 미움을 받을 테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주드 역시 바닥에 엎드린 채 눈을 감는 걸로 왕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한 치의 거짓말도 없어야 할 텐데.”
“정말 어떻게 온 건지 알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그 하이에나에게 물어보십시오.”
“너……,”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날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뻔뻔해지는군. 며칠 전 앤디에게 피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늑대들을 몇 마리 더 보내 놨더니, 이것들이 며칠 새에 이엘의 편이 된 모양이다. 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지만 이엘은 익숙하게 상황을 피했다. 그러더니 서류 뭉치를 가져와 노아의 앞에 들이미는 것이다.
“명령하신 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서류는 모두 다 결재했고요.”
“…….”
“폐하께서 종족회의를 하시는 동안 저도 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황당하단 낯의 노아를 보며 이엘이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 했다. 맡긴 일을 막힘없이 처리했으니 노아도 하려던 잔소리를 멈추고 입을 다문 것이다. 분명 제게 피시의 일을 따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머리를 잔뜩 헤집으며 노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서류를 받은 노아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깨까지 으쓱이며 되레 칭찬을 바라는 인간 소년을 보니 저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풀고 말았다. 하여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니까.
결국엔 노아도 그녀를 따라 작게 웃었다가, 금세 정색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웃음으로 무마하려 하지 마. 그의 핀잔에 이엘은 글쎄요, 라며 돌아섰다.
“로빈이 영지를 뒤적였어.”
식사가 차려진 작은 테이블에 얼굴을 맞대고 앉아 샐러드를 먹던 이엘이 오물거리던 입을 닫았다. 역시 포기하지 않았구나. 끈질긴 뱀의 왕이 떠올라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녀가 불안해한다고 생각한 건지 노아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걱정 마. 네 흔적은 전혀 찾지 못했으니까.”
“남은 곳이 성전뿐이란 걸 알게 된다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지 안으로 들어올 순 없을 거야.”
“…….”
“들어오는 즉시 전쟁이니까. 놈도 알고 있겠지.”
성지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전쟁 선전포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노아는 이미 여기 머물고 있는 늑대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였다. 작은 실뱀 하나라도 침입하는 순간, 그의 목을 따 버리고 하울링으로 영지 전역에 경고음을 울리라는 지시를.
“하지만 그 미친 하이에나 왕자는 예외겠네.”
그 말을 하면서도 노아는 머리가 아픈 건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다. 이엘이 보기엔 피시는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었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 미친 왕자로 포장되어 있으니, 성전을 들어왔다는 빌미로 전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론은 미친 왕자 쪽에 더 유리할 테니까. 더더욱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어느새 그녀는 앤디에게도 친동생 주드만 한 존재가 되었다. 앤디는 노아에게 셋째 왕자의 출입에 대해 보고하기는 했지만 성지에서 들린 총소리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분명 이엘이 총을 갖고 있다는 걸 봤을 텐데도 그는 군주인 제게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총소리에 예민해진 타 종족들에게 둘러대느라 고생깨나 했지만.
“총은.”
“…….”
“어디서 났지? 그것만은 내게 말해.”
“몇 번 밖에 나간 적이 있어요.”
“…….”
“거기서 구했습니다.”
의외로 솔직하게 답했다. 이엘은 스푼으로 스튜를 휘저으며 담담하게 노아를 보았다. 노아의 짙고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며 말없이 그녀를 추궁했다.
이번 종족회의의 안건에 총기 소유도 있다는 걸 앤디에게 들었다. 인간들이 이종족에게 빼앗겼던 총을 다시 소유하게 된 것에 대한 안건들. 그러니 제 총소리가 여기에 모여 있는 이종족들에게 얼마나 민감했을지도, 뒤늦게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허가 없이 총기를 갖게 된 것은 저의 잘못이에요.”
“알긴 알아?”
“네. 반성하고 있어요.”
“보호가 필요하면 기꺼이 너의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고 했을 텐데.”
“보호만 받을 수 없어요.”
“…….”
“제 몸은 제가 스스로 보호하고 싶습니다.”
“…….”
“그리고 때론, 제가 당신의 울타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폐하의 백성이라면서요.”
말로는 이길 수가 없군. 혀를 차며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일부는 맞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엘이 총을 갖고 있었기에 주드를 비롯한 새끼 늑대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종족 간 전쟁으로 번질 뻔한 사건도 무마시켰고.
“너를 믿기에 이번 일은 넘어간다.”
“감사합니다, 폐하.”
“어서 먹어. 식겠어.”
노아는 습관적으로 작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이엘의 접시 위에 올려 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하이에나와는 엮이면 안 되는데. 대체 그 셋째 왕자는 왜 이 녀석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그의 한숨 소리를 들은 이엘은 제법 크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노아의 접시 위에 올려 주며 웃었다.
“폐하께서 저를 축출하시면 저도 갈 곳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뭐?”
“그러니 그 왕자님은 살려 주십시오.”
“농담이 지나쳐.”
“농담이 아니에요.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
“꼭 폐하께서 저를 쫓으시는 게 아니어도 제가 피치 못할 이유로 떠나야 할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내가 당신들의 등에 칼을 꽂고 기름을 가져가는 날이 온다면…….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배신자를 받아 줄 곳은 기사의 맹세를 한 셋째 왕자님 옆밖에는 없으니까요. 이엘이 씁쓸하게 웃으며 노아를 바라보았다. 일렁거리는 촛불 사이로 잘생긴 남자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맹세를 해야 하는 건가?”
“네?”
“아까 그 녀석이 한 기사의 맹세.”
농담하지 마세요, 폐하. 이엘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손은 노아에게 잡혀 버렸다. 아까 피시에게 끌려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노아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그녀의 손등에 노아의 입술이 닿았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데리러 가겠어.”
“…….”
“너는 나의 소중한 백성이다. 너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참 우스운 광경이었다. 과거 황실기사단을 이끌던 공작의 직계가, 과거 황녀에게 기사의 맹세를 하는 모습은. 낮에 있었던 피시의 일보다도 더, 우습고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이 보이지 않네?”
“인간?”
“전에 우리 영지에 왔던, 엘타를 구해 낸 그 인간 말이야. 겁도 없이 내 창고에서 씨앗을 도둑질한 그 인간 소년.”
레온의 말에 노아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레온은 잔을 입에 대며 노아의 그런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늑대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인간이라니. 물론 자신도 거의 반쯤 홀리다시피 씨앗을 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늑대들과 그 인간의 관계가 의문이었다. 무슨 이유로 노아는 그 인간을 무리로 들인 걸까.
“잠깐 피신시켰어.”
“피신? 왜?”
“종족회의에 온 놈들 중에 그 녀석을 노리는 놈이 있거든.”
“뱀이군.”
“맞아.”
그러고 보니 이엘이 제 영지로 찾아왔던 기간과 로빈이 늑대의 영지를 방문했던 기간이 겹친다. 그때도 피신 목적으로 보낸 모양이었군. 그렇다면 그 편지는 소년의 시험이었던 건가. 만약 자신이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 자리에서 죽였더라면 늑대와의 관계가 틀어졌을지, 그런 쓸데없는 의문이 들었다.
레온은 한쪽 눈썹을 틀어 올렸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는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한차례 쏟아졌던 폭설이 멎고, 고요한 밤을 맞이했다. 원래도 눈이 많이 내리는 영지이긴 했지만, 저렇게 미친 듯이 쌓인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괜히 제 팔을 쓸며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여전히 추워. 눈은 또 왜 저렇게 많이 내렸고. 어젠 하늘이라도 뚫린 줄 알았어.”
“심술궂은 놈이 심술을 부려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