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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2화 (52/488)

52화

그나마 다행인 건 피시는 이엘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다른 늑대들의 욕설에도 흥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처음 주드와 대치했을 때처럼 막무가내로 능력을 썼더라면 아마도 여기 있는 어린 개체들은 몰살당했으리라. 주드는 불편한 진실에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성전은 안팎으로 방음이 잘 되는 편이었다. 신과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전 안까지 피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다지 큰 목소리도 아닌데 이엘에겐 피시의 목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느껴졌다.

결국 잡고 있던 펜을 내려놓은 이엘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1층으로 향했다.

“어디 가?”

잠자코 누워 있던 주드가 벌떡 일어났다.

이엘은 옷장에서 숄을 꺼내 어깨에 걸친 채로 문을 열었다. 며칠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매섭게 휘몰아치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서 있던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번처럼 능력을 써서 눈을 피해도 될 텐데, 남자는 허공에 띄운 꽃을 보호하느라 제 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왕자님.”

“나는 오겠다고 했어.”

“대체 왜 이러시는 건가요? 저는 왕자님께서 찾으시는 조이나 님이 아니에요.”

“알아. 넌 조이나랑 달라. 조이는 이미 죽었어.”

“…….”

“그거랑은 달라. 나도 알고 있지만…….”

횡설수설하며 시선을 좀처럼 마주치지 못한다. 이엘은 제 앞에 선 회백발의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직 한창 성장 중인 건지 저와 비슷한 또래의 모습을 한 채로 남자아이는 붉어진 뺨을 제 손등으로 슥슥 쓸고 있었다. 소년이 쓰고 있는 동그란 안경은 그를 더 어수룩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깊은 한숨 끝에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전하께서 이렇게 오시면 종족 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

“게다가 저는 하이에나의 원수 아닌가요? 하이에나는 인간을 가장 싫어하는 종족들 중 하나잖아요.”

제법 단단하게 얽혀 있던 하이에나의 종족을 파괴시킨 건 조이나의 죽음이었다. 완벽한 모계 사회를 자랑하는 그들에게 리더가 사라졌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니 2차 종족 전쟁 당시, 인간을 가장 많이 학살한 종족들 중에 하이에나가 포함되지 않았던가. 그들은 황가와 일반 백성들을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다. 심지어 뱀들과 연합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물음에 피시는 둥그런 눈동자를 들어 이엘을 응시했다. 이엘이 몇 번이나 피시를 마주하며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그의 눈동자가 매우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피 한 방울 묻혀 본 적 없는 순수한 눈동자엔 늘 물기가 어려 있었다. 아마도 그가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일 터다. 그는 그때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더럽고 추악한 세상 속에서 만난 순수한 눈동자는, 이엘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비단 종족 간의 싸움 때문에 피시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피시의 눈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인생을 망쳐 버린 제 아비가 떠올랐다. 끔찍하고 더럽게 그들의 군주를 빼앗아 버린 역겨운 제 아비의 악행이.

“제발 오지 마세요, 왕자님.”

“…….”

“전하께서 이렇게 찾아오시면 저는 여기에 더 머물 수 없게 됩니다.”

“그럼 내 영지로……,”

“저는 여기 있고 싶어요. 제가 있을 곳은 여기예요.”

단호한 이엘의 대답에 한동안 피시는 말이 없었다. 아마도 피시는 자신에게 그저 작은 흥미를 보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하이에나 무리에서도 학대받는다고 들었다. 왕족의 위치지만 그는 성에 갇히다시피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밖을 나와 처음 만난 존재인 자신에게 보이는 작은 흥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갈 곳이 없어지면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네?”

“네가 있는 곳을 내가 만들어 줄게.”

그 어느 날의 밀로가 한 말과 비슷했다. 갑자기 떠나 버린 밀로가 떠올라 이엘은 한참이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피시는 허공에 띄워 두었던 꽃을 내려뜨려 이엘의 손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얼굴 보여 줘서 고마워, 오헬.”

“전하.”

“그리고 너는 원수 아니야.”

“…….”

“너도 피해자잖아.”

“무슨……,”

“전쟁으로 모든 걸 잃어버린 건, 너나 나나 둘 다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러나 피시의 위로에 이엘은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피해자라고 말해 주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그것도 이종족에게서.

피시는 가만히 이엘을 쳐다보다가 제 목에서 크라바트를 풀어 이엘의 손목 위에 그것을 묶었다.

“나는 첫눈에 네가 마음에 들었어, 오헬.”

“전하.”

“그래서 네게 주는 증표야. 이건 너와 나의 약속.”

“…….”

“무슨 일이 있어도 하이에나는 너의 편이 되어 줄게.”

그런 중요한 약속을 어떻게 이렇게 허투루 한단 말인가. 이엘은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억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피시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손목 위에 제 크라바트를 정갈하게 묶었다.

“신의 축복을 받는 너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어.”

“저는 신의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다, 왕자님.”

“아니. 신께선 너를 사랑하셔.”

“…….”

“나는 알 수 있어. 나만 알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난 기꺼이 네 편이 될 거야. 말을 마친 피시는 그녀의 손을 끌어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 손등 위에 이마를 얹었다. 입술만 얹지 않았을 뿐이지, 마치 기사의 맹세라도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이엘은 그 행위를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피시를 말릴 순 없었다.

이 상황이 참 우습지 않은가. 과거 변경백의 직계 아들이, 과거 황녀의 손을 부여잡고 하는 기사의 맹세라니. 눈물이 날 정도로 끔찍한 현실이었다. 이엘은 입술을 말아 깨물며 탄식을 삼켰다.

“네가 이 땅에서 버려지면 나의 영지로 찾아와.”

“…….”

“너를 기꺼이 맞을 거야.”

“웃기는 소리 하는군.”

귀를 찢는 챙― 소리와 함께 이엘의 손을 잡고 있던 피시의 손이 떨어졌다. 장검이 눈앞을 홱 지나갔다. 노아의 칼에 베여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잡고 피시가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노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피시를 향해 다시 장검을 겨누었다.

“놀러 나갔다던 셋째 왕자께서 성전 뜰까지 함부로 놀러 오셨나?”

“…….”

“게다가 내 백성에게 손까지 대고.”

완벽하게 이엘을 뒤로 감춘 노아는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피시는 곧장 노아에게서 장검을 뺏으려 힘을 썼지만 그보다 노아가 더 빨랐다. 가볍게 거대한 얼음 장벽을 세워 피시의 시선을 가려 두고 능력까지 무력하게 만들었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노아는 이엘의 안전부터 살폈다.

“왜 혼자 나와 있는 거지? 경호를 붙여 두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잠깐 산책을 나왔다가…….”

“변명은 이따 듣겠다.”

“……네, 폐하.”

“들어가 있어. 이 녀석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나쁜 분이 아닙니다, 폐하.”

“…….”

“부디 종족회의 기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날 아둔한 왕으로 생각하나 보구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노아는 웃고 있었다.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여유로운 농담까지 던졌다. 그의 손길을 받고 있으니 완전한 그의 백성이 된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분에 이엘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노아가 다시 한 번 웃어 주었다.

“하이에나의 왕자들은 중요한 자들이야. 그런 건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어.”

“네, 폐하.”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 화가 나는데.”

“네?”

“감히 나의 백성을 넘보다니.”

무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노아이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이엘은 부디 그 화가 조금이라도 가라앉기를 바라며 그의 등 뒤에서 도망쳐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무사히 들어간 것을 확인한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피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지금 네가 나와 대치해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

“너희와는 악연으로 얽히고 싶지 않다. 그만 물러가라.”

“언젠가 당신이 버리는 날이 오면 내가 주워 갈 겁니다.”

“그런 일 따위 오지 않아.”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제정신이 아니라던 소문과는 달리 말하는 걸 들으니 멀쩡하게 느껴졌다. 제 할 말을 똑바로 다 하며 슬쩍 비웃는 모습까지 완벽하게 패티스를 떠올리게 했다. 젠장. 쌍둥이라더니 하는 짓이 완전히 판박이군.

골치 아픈 하이에나 세쌍둥이들 때문에 노아는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회의마다 태클을 걸며 제 몫을 단단히 챙겨 가던 패티스의 모습이, 어쩐지 지금 저 녀석에게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는 넌 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거지?”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요.”

“뭐?”

“조이나와 같은 일은 다신 없을 거예요.”

“무슨……,”

“이번엔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

조이나라면 저들이 그렇게 숭배하며 사랑하던 첫째가 아니던가. 노아는 자꾸만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죽은 자의 이름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 집안은 여러모로 머리가 아픈 집안이다.

노아가 생각에 빠진 사이에 단숨에 얼음 장벽을 잘게 갈라 버린 피시는 성큼성큼 노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 다시 얼음을 세우려는 그의 앞에, 떨어져 있던 꽃들을 주워 내밀었다.

“오헬에게 주세요.”

“…….”

“다음엔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함께 전해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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