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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51화 (51/488)

51화

그녀를 향해 고개까지 꾸벅 숙인 피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뚜벅뚜벅 걸어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앤디는 이엘에게 한 소리 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서둘러 쓰러진 늑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그 말은 뒤로 양보해야 했다.

“앤디 님! 일단 아이들을 옮겨야겠어요. 도와주세요.”

“너 아까 그 녀석이랑 무슨……,”

“비밀로 해 주세요.”

“…….”

“폐하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 안에 주드가 있어요. 주드도 다쳤거든요. 무리가 다친 걸 아시면 폐하께서 노하실 거예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앤디의 외침에도 이엘은 고집을 부렸다. 하이에나 왕자는 저가 어떻게든 할 테니 제발 넘어가 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종족회의가 열리는 영지 내에서 능력을 써 가며 대치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곧바로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굳이 전쟁을 해서 얻을 이익은 없다. 오히려 지금은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는 편이 각자에게 좋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 미치광이 하이에나 왕자였다. 하이에나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에 속을 모르는 놈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직계의 왕자 세 명이 제일 큰 골칫거리였다. 특히 반쯤 미쳐 버린 셋째 왕자 피시는 마주치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피시에게 이엘이 찍혀 버렸으니 쉽게 놔줄 리는 없을 것이다.

“네가 몰라서 그러나 본데 저 녀석은 상대조차 하면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 말씀드려서 네 거처를 옮겨. 이제 성전도 안전하지 못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야, 인마!”

“성전에 머물렀던 것은 순전히 뱀의 왕 때문이에요. 그자는 성전 안이 아니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사람이니까요. 안전한 곳은 성지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분은 저를 해치진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뱀의 왕은 정신이라도 제정신이지, 미치광이가 왜 미치광이인지 몰라서 그래?”

“그냥 마음이 아픈 거예요.”

“무슨…….”

“소문과 달랐어요. 그냥 단지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라고요. 마음이 아파서…… 과거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그는 행복했던 과거에서 나오지 못하고, 끔찍했던 전쟁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뿐. 이엘은 그 생각에 짧은 한숨을 쉬며 앤디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일단 알겠어. 근데 너 총은 어디서 난 거야? 폐하도 아셔?”

“이제 아시겠죠. 총 소리를 들으셨을 테니.”

“너 설마…… 로날드를 구출한 뒤로도 밖을 나간 적이 있어?!”

벼락같은 그의 호통에 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와주지 않으실 거예요? 되레 화를 내며 물어 오니 앤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총기 소유에 관한 것도 이번 종족회의의 안건인데……. 큰일 났다, 이제. 앤디는 이 철없는 인간 동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

“아무리 뒤져 봐도 없습니다.”

“밖으로 나간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심복 리플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없는 것이다. 로빈은 크리스털 잔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흐음― 앓는 소리를 냈다. 이 필요도 없는 종족회의 따위에 온 것은 전적으로 그 인간 소년 하나 때문이었다. 분명 늑대들과 깊게 연관이 있고 심지어 이 영지 내로 들어가는 게 마지막으로 목격됐는데, 왜…….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테이블의 유리를 톡톡 건드렸다. 대체 넌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왕이시여. 불손함을 무릅쓰고 한마디 올려도 괜찮을지요.”

“말하라.”

“그 소년을 그만 포기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으며, 그런 것을 따질 가치도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네게 인간의 가치를 운운하라고 했지?”

“폐하. 솔직히 저는 폐하께서 왜 그런 인간에게 집착하시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자칫하면 늑대들과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리플은 제 자리를 포기하고 다른 직계와 방계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로빈을 왕좌에 올렸다. 그에게 로빈은 존재 자체가 뱀의 위신이었다. 그런 자신의 왕이 별 볼 일 없는 인간 따위에 연연하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자도 아니고 로빈이었다.

뱀은 방계에게도 승계할 자격이 주어졌고, 리플은 방계 중에서도 유능한 자였다. 그런 자신이 승계권을 포기했던 것은 종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주가 로빈이었기 때문이다. 그 로빈이 하찮은 인간 따위에…….

“리플.”

“예, 왕이시여. 말씀하십시오.”

“나도 잘 모르겠구나.”

“…….”

“내가 왜 그렇게까지 그 인간에게 목을 매는지.”

“…….”

“어쩌면 내 뒤통수를 치고 도망친 것에 대한 분풀이일 수도 있다.”

“폐하.”

“또 어쩌면 내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지. 늑대 새끼들에게 인간을 빼앗긴 것에 대한.”

“…….”

“또는 종족에 대한 마지막 희망일 수도.”

빌어먹게도 지금의 우리들로는 이 실험을 완성시킬 수 없다. 신께선 우리가 아닌 인간을 택하셨으니까. 로빈은 당장 무릎을 꿇어서라도 연구의 핵심을 얻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들을 도와줄 인간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멍청하게도 연구실의 재원을 죄다 학살했으니 남아 있는 자들이라곤 아무것도 모르고 낄낄 웃으며 파티나 즐기던 인간들뿐이었다.

로빈은 그런 멍청한 자들의 도움까지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고 겨우 찾아낸 난자들의 수명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찾아낸 게 이엘이었다.

로빈이 주웠고 로빈이 계약을 했다. 신의 힘이 아닌 내 힘으로 얻은 것. 그 소년은 그런 의미였다.

“리플. 너는 내가 한심해 보이나?”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보여도 어쩔 수 없구나.”

“…….”

“종족의 멸망을 더는 볼 수 없다. 왕으로서도, 하나의 개체로서도.”

“폐하.”

“나는 그따위 인간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연구를 완성할 거니까.”

제 주인을 바라보며 리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왕이 ‘도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우리가 벼랑에 몰린 걸까. 그렇다면 이 벼랑은, 우리가 스스로의 목을 조르며 밀어붙인 곳인 셈이다.

10년 전, 각 종족의 어린 개체들을 홀리고 충동질해서 인간 여자를 몰살시켰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던 이유는 그저 인간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다는 원한 때문이었다. 끓어오르는 감정과 본능을 억누르지 못했고, 그때의 자신들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현실에만 급급해서.

오랜 시간을 눌러 왔던 살육을 터뜨렸을 때, 붉은 피와 인간의 비명 소리가 온 감각을 지배했을 때. 인정한다. 그 희열은 평생을 살아도 대신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할 만큼, 짜릿하고 황홀했다. 이래서 너희가 우릴 그렇게 괴롭히고 죽였구나. 본능에 흠뻑 취해, 미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뱀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살육이 셀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온 우논들에게까지 깊은 감흥을 주었을 만큼, 만족하고 또 만족했으니까. 그러니 벼랑으로 내몬 우리들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그날이 몇 번이나 오더라도 선택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로빈은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았다.

“계획대로 간다.”

“계획이라면…….”

“그래. 당한 만큼 돌려줄 차례지.”

계획은 종족회의가 마치는 대로.

*

“아무것도 안 한다고는 해도 존재만으로 위협적이야.”

“맞아. 내가 가서 혼쭐을 내 줄래!”

“그만해. 우리로는 어림도 없어.”

로날드가 짐짓 위엄을 담아 경고하자 늑대들이 꼬리를 내리며 투덜거렸다. 벌써 두 시간째 밖에서 농성하듯 서 있는 피시 때문에 성전 안은 난리였다. 이엘은 아예 외면하듯 밖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고 3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는 것에 몰두했다.

새끼 늑대들이 저희끼리 열띤 토론을 하는 동안 주드는 늑대로 변한 채 러그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는 듯, 한 번 귀를 쫑긋하다가 시선을 뗐다. 마취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린 주드는 다행히 외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섣부르게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피시가 밖에 있는데도 시큰둥했다.

이엘은 오히려 그런 점에서 지난 일이 좋은 수확이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제 힘만 믿고 설치다가 큰코다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드는 성전 문 바로 앞에 엎드리고 앉아 잔뜩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주드 님! 우리 나가요!”

“시끄러워. 오헬한테 혼나고 싶냐? 들어가서 놀기나 해.”

“주드 님은 화도 안 나세요? 하이에나 따위에게 당하셨잖아요!”

“그래. 나도 못 이긴 저놈을 네가 어떻게 이기겠다고?”

주드의 핀잔에 늑대가 입을 삐죽 내밀며 뒤로 물러났다. 주드는 콧방귀를 뀌곤 포갠 앞발 위에 머리를 얹은 채로 엎드렸다. 살짝 열린 틈 사이로 회백발의 남자가 보였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단정하고 깔끔한 복장이었다. 왕족은 왕족인 건지 멀리서부터 퍼져 나오는 분위기는 여기까지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쳇. 왕자면 다냐?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이 상했다. 왕도 아니고 왕자 따위에……. 물론 직계로 이어진 핏줄이면 왕이 아니라 왕자라 할지라도 그 힘이 어마어마하게 강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이엘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은 늘, 언제나, 이엘의 도움을 받아 왔다. 몇 번이나 그녀가 저를 살려 줬다.

“언젠가 네놈의 머리통을 부수는 건 내 몫이야.”

내가 더 성장만 하면! 이를 갈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한편 오늘도 성전 뜰에 당당하게 입성한 피시는 들고 온 꽃을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다. 눈까지 내린 추운 땅에서 꽃을 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왕성 근처에 온실이 있었다. 아마도 늑대들의 왕이 관리하는 온실이겠지. 그러나 피시는 개의치 않고 온실로 들어가 꽃을 몇 송이 뽑았다. 그리고 벌써 사흘째 이곳으로 출근 중이었던 것이다.

“오헬. 만나고 싶어. 얼굴만 보여 줘.”

흡사 청혼하는 연인 같았다. 우― 기분이 나빠진 늑대들은 하나같이 야유를 보내며 밖에 있는 고귀한 왕자님을 모욕했지만 정작 이엘은 집무실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일에 치인 채로 밖을 아예 외면할 생각인 듯했다.

“네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왕에게 찾아갈 거야.”

“…….”

“그리고 너를 달라고 할래.”

개소리도 작작해! 성이 난 늑대 하나가 고함을 질렀지만 피시는 요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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