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알 수 없는 이름을 불러 가며 저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 때문에 이엘은 계속해서 뒷걸음질 쳐야만 했다. 종족의 전쟁이 걸린 문제이니 여기서 또 총을 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엘의 뒤에 서 있던 늑대들은 그녀의 불안함을 느끼고 잽싸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손쓸 틈도 없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던 늑대들은 남자의 눈짓 한 번에 사방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로날드! 리퍼! 슈프!”
아직 새끼에 속하는 테르들이 우논인 남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둔 몇 마리가 달려들었지만 속절없이 남자의 눈짓에 날아갔다. 제각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늑대들을 바라보며 이엘은 다시 한 번 총구를 겨눴다.
타앙―! 이번에도 남자의 볼을 스쳐 지나간 총알이 건너편 나무에 박힌 채로 폭발했다. 손바닥처럼 볼에도 똑같은 생채기가 났음에도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씩조금씩 그녀를 향해 간격을 좁혀 올 뿐이었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에 총알이라도 한 방 먹여 주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엘은 다가오는 속도가 높아진 남자를 피해 거의 빠른 걸음 수준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연달아 터진 총소리 때문인지, 갑자기 들린 이명에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 기울어졌다.
그대로 발을 접질리며 쓰러진 이엘의 손에서 총이 튕겨 나갔다. 축축한 눈덩이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진짜 왜 저래? 넘어지면서 눈덩이 위로 떨어진 총을 줍기 위해 손을 뻗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안에 눈을 한 움큼 잡아서 남자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아……!”
뭉쳐지지 않은 눈이니, 겨우 흩뿌려진 것에 불과한데도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제 눈을 손으로 가렸으니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엘은 재빨리 총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남자가 빨랐다. 총을 간단하게 날려 버리고 쓰러져 있는 이엘을 허공 위로 띄운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조이나.”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역시 뭐에 취한 것 같아 보이는 놈이었다. 이엘은 단단하게 옭맨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비틀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염력을 쓸 수 있는 종족은 단 하나.
“하이에나! 당신들이 어떻게 여기 있는 겁니까!”
이엘의 고함에 남자가 행동을 멈췄다. 이윽고 그가 멍한 눈을 깜빡이자마자 그녀는 폭신한 눈 바닥으로 푹 떨어지고 말았다. 착지할 때 앞으로 넘어진 이엘은 무릎의 고통을 참아 내며 바닥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남자는 아까완 다르게 주저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가 접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불안정하다. 생각도, 행동도, 마음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저 고위 귀족이나 입을 수 있는 복식에 불안한 눈빛과 엄청난 능력. 그녀는 그를 알고 있다. 오드가 가져다준 책 너머로 그들의 존재를 배우던 시절, 이엘이 한참이나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머뭇거려야 했던 주인공. 이엘의 머릿속에서 잔상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던 이름들.
“……당신의 이름이 피시인가요?”
이엘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엘이 크게 호통친 이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움츠러든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피시는 고개를 반쯤 숙이고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동그란 안경이 달달 떨리며 흔들렸다.
피시. 하이에나의 왕자들 중 하나. 첫째 동기의 죽음이 가져다준 엄청난 트라우마가 그의 일상을 망쳤다. 그리고 그 첫째 동기의 이름은 조이나. 조금 전 피시가 그녀를 향해 불렀던 이름이었다.
“저는 조이나가 아닙니다.”
“하지만……,”
“잘 보세요. 저는 인간입니다. 당신들이 혐오하는 인간이에요. 그리고 남자고요.”
조이나……. 피시가 계속해서 부르던 이름은 그의 잃어버린 손위 누이의 이름이었다.
이엘은 툭툭 옷을 털며 피시의 앞으로 다가갔다. 두려움에 휩싸인 피시는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중얼거리며 울었다. 조이나……! 조이나……! 어찌나 구슬프게 소리치는지, 듣고 있던 나무들마저 혀를 찰 정도였다.
조심스레 바로 앞까지 다가간 이엘은 남자를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란 뜻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남자는 그 손을 꼭 잡은 채 제 얼굴가로 끌어당겼다. 그 행동에 쓰러졌던 늑대들이 으르렁거리며 일어났지만 이엘은 오히려 그들을 진정시켰다. 지금 상황에 다시 흥분하면 모두 허사가 된다.
“조이나가 아니야……?”
“네. 저는 인간이에요.”
“…….”
“죄송합니다. 찾는 분이 아니네요, 전.”
그가 애타게 찾는 존재는 이미 20년 전에 그녀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했지. 변경백이 사는 영지는 황성에서 상당히 먼 곳에 위치했고, 황제는 그들을 쉽게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가장 잔혹하고 더러운 족속을 사들여 하이에나의 암컷들을 죽여 버렸다.
피시가 미친 이유는 그에게 하나뿐인 누나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동기 조이나는 피시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고 끔찍하게 유린당하다 갈가리 찢겨 죽었다.
그러니까 이 왕자가 미쳐 버린 이유는 전부 제 아비의 탓이다. 아비는 목숨을 앗아 간 걸로도 모자라 한 종족을 망쳐 버렸다.
아니. 모든 종족을 다 망쳐 버렸다. 노아는 내게 죄가 대물림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건 명백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결과다. 그리고 이엘은, 자신이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역시 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어…….
그녀는 피시의 뺨에 닿아 있는 제 손을 빼고 대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
“정말 죄송합니다.”
피시의 흐느낌이 점차 작아졌다. 패악을 부리며 난동을 피우던 모습은 어디 가고 순진한 눈망울로 이엘을 쳐다보는 소년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고쳐 올리던 피시는 이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은 채 웅얼거렸다.
“조이가 죽었어.”
“…….”
“내 앞에서 죽었어.”
내가 구하지 못했어. 그의 작은 목소리에 이엘은 죄책감이 들었다.
이 끔찍한 전쟁의 시작은 선황들이었고, 주인은 내 아비였다. 내 아비란 자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우리들의 존재 모두가 불행해졌다. 작게는 가정이 무너졌고 크게는 제국이 무너졌다. 그리고 신이 완벽하게 균형을 만들어 주셨던 종족들이 모조리 파괴됐다.
“저는 조이나가 아닙니다.”
“알아.”
“…….”
“그래도 넌 조이나를 닮았어.”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라 조이나라는 여자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문헌으로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워낙 끔찍했던 일이고, 현재까지도 최악의 죽음으로 불리는 일이니 책으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피시를 직접 마주하고 나서야 그때의 참혹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엘은 그에게 함부로 위로의 말도, 격려의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이름이 뭐야?”
“오헬이라고 합니다.”
“그래…… 오헬. 오헬이구나.”
“왕자님. 여기는 성전 뜰 안입니다. 성지 안으로는 타 종족이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저희 폐하께서 아시면 종족 간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저희 쪽에서 묻어 둘 테니 서둘러 왕성으로 돌아가십시오.”
“오헬. 내일도 여기 오면 널 만날 수 있어?”
“아니요. 만나실 수 없습니다. 저는 성전을 벗어나지 않을 거니까요. 찾아오지 마십시오.”
“내가 오고 싶으면 올 수 있어. 아무도 날 막지 못해.”
“그렇게 되면 종족 간에……,”
“떨어져!”
벼락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거대한 잿빛 늑대가 달려와 그녀를 입에 물고 뒤로 한참 물러났다. 바닥에 이엘을 내려 준 앤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시와 마주 보고 대치했다. 노아의 명령을 받아 달린다고 달렸는데 도착하고 나니 일은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이후였다.
몇 번의 파동과 폭발음을 듣고 나서야 이엘이 총을 쏜 것을 알아차렸다. 총을 갖고 있어? 폐하께 총기 허가도 구하지 않았을 텐데……. 일단 그런 걱정은 뒤로하고 서둘러 달렸다.
냄새부터 역한 게 하이에나가 확실하군.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늑대들이 몇 보였다. 저 새끼가 진짜……! 더는 참지 못한 잿빛 늑대가 피시에게 달려들기 위해 발을 굴리려 했다.
“멈춰요!”
이엘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에 굴리던 발을 멈춘 앤디는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이에요.”
“뭐?”
“앤디 님이 상대할 분이 아니라고요.”
그래, 맞아. 사리 분별 없이 뛰어들면 안 된다. 노아가 앤디를 이엘에게 보낸 것은 그 사라졌다던 셋째 왕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혹시나 그 셋째 왕자가 룰을 어기고 성지로 들어설까 봐. 하, 근데 정말 그 문제의 왕자님이신가 보군. 혀를 차며 앤디가 뒤로 물러났다.
“왕자님. 그만 돌아가십시오.”
“내일도 올게.”
“오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자. 내 궁엔 진귀한 보석이 많아. 우리의 왕좌는 비어 있어. 네게 줄게. 나와 같이 가자.”
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진짜? 기가 찬 앤디가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피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엘을 바라보며 그 순진한 눈동자로 그녀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제 딴에는 진심을 다한 표현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관심을 바라는 듯한 말투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가세요, 왕자님. 다시는 저와 왕자님이 마주칠 일 없을 거예요.”
“네가 나오지 않는다면 너의 왕에게 널 요구하겠어.”
“무슨……,”
“조심히 들어가. 내일 다시 올게.”
“…….”
“그리고…… 무릎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 오헬.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