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하트는 패티스의 윽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자리가 매우 귀찮고 따분했다. 이따위 종족회의에 참석해야 할 이유조차 잘 모르겠다.
그는 패티스와는 달리 그저 조용히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애초에 맞지도 않는 형제들과 다시 뭉쳐 살아가는 게 그에겐 곤욕이었다. 차라리 마음대로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피시의 사정이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래서 하트는 피시가 대열을 이탈해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셋이 다시 영지에서 함께 살게 된 이후부터 피시는 패티스의 억압 아래서 불우한 나날을 이어 갔다. 피시에겐 그를 보호하고 지켜 줄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보호자를 20년 전에 잃었다.
그들에겐 목숨과도 같은 첫째 누나가 죽었다. 그 뒤로 피시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고 그 모습은 패티스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하트는 차라리 피시가 자유롭길 바랐다. 맞지도 않는 이 관계를 유지하는 건 저와 패티스만으로 족했다. 미쳐 버린 동생에겐 조금이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생각을 갈무리하며 옆으로 넘긴 머리를 정리하던 하트는 문득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노아를 쳐다보았다.
귀공자처럼 태생이 반듯하고 우아한 남자는 이제 완전히 성장이 멈춘 모양이었다. 다부진 몸과 커다란 골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여전히 자라는 중인 저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 남자의 시선은 종종 허공을 떠돌다 창문 밖을 향할 때가 많았는데, 그 시선을 따라간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뾰족한 성전의 첨탑 외에는.
왜 성전을 보고 있는 거지. 그는 신앙심이 좋은 걸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래, 주드?”
여태 화로 앞에 잠들어 있던 늑대가 코를 찡긋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이엘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르렁거리며 몸을 잔뜩 낮춘 채 이를 드러낸 주드는 짖지만 않을 뿐이지, 거의 달려들 기세로 성이 나 있었다. 놀란 그녀가 서둘러 주드를 달랬지만 주드는 창밖을 노려보며 흥분한 상태였다.
난리가 난 건 주드뿐만이 아니었다. 아래층에서 대기 중이던 테르들 역시 저희끼리 울부짖으며 컹컹거리고 있었다. 흡사 침입자나 적을 상대할 때와 비슷한 울음소리였다. 이엘은 창문 가까이 다가가 커튼을 슬쩍 걷어 냈다.
“누군가 와 있어.”
“확인하러 다녀올게.”
“주드, 잠깐만!”
주드는 왜 막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이엘은 그에게 손을 내민 채 고개를 저었다. 커튼의 작은 틈으로 보이는 창밖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성전을 둘러싸고 유독 많이 쌓인 눈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렇게 온통 하얀 세상 속에서 가만히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의 주변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짧고 복슬거리는 회백발을 한 남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주변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 사이로 보이는 옅은 갈색 눈동자가 눈보다 더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의 손을 따라 쌓여 있던 눈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눈들과 더불어 엉킨 것들이 공중에서 하나의 커다란 알갱이로 뭉쳤다. 점점 더 커져 가던 눈덩이는 우산과 비슷한 모양새가 되었다. 남자는 그 아래서 눈을 피하는 것처럼 고요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오헬. 왜 붙잡는 거야!”
“너희가 나가면 싸움이 벌어질 거야.”
“하지만……!”
“그냥 둬. 잠깐 일행을 잃은 것 같아. 악의도 없어 보이고.”
그녀의 말처럼 남자는 주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곳까지 오게 된 것도 그저 발길이 가는 대로 온 것처럼 느껴졌다. 악의를 가지고 접근한 게 아니고서는 이엘과 주드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은 종족회의가 열리는 기간이었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조약이 체결된 공식적인 기간이기도 했다. 괜한 싸움에 엮여서는 안 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커튼을 살짝 들춘 채 창밖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한참 동안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고요한 걸 보면 그녀의 예상처럼 남자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건 아닌 듯했다.
다만, 마련된 숙소가 아닌 성전이 있는 곳까지 함부로 왔다는 게 문제였다. 타 종족의 영지 중 가장 접근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성전이 있는 성지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게다가 남자가 입고 있는 복식은 고위 귀족의 옷이었다. 자칫하면 괜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드.”
“왜?”
“내가 내려갔다가 올게.”
“안 돼. 위험해.”
“그렇다고 너를 보낼 순 없잖아.”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나아.”
말을 마친 주드는 이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는 청년에 가까워진 모습을 한 주드를 올려보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안 된다는 이엘에게 주드도 고개를 젓고 반대의 뜻을 표했다.
“걱정 마, 오헬. 사고 안 칠게. 약속해.”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은 널 지키란 거였어. 네 안전이 우리에겐 최우선이야.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안 해.”
“…….”
“그냥 돌려보내기만 하면 되는 거지?”
씨익 웃는 주드를 보며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 답했다. 허튼짓은 안 하겠지만 이엘은 주드가 성장한 이후부터 줄곧 걱정뿐이었다. 갑작스레 성장한 것도 걱정이지만 보통 저렇게 단시간에 성장한 개체들은 제 실력만 믿고 방심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주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선 테르들도 함께 나가겠다며 아우성이었지만 주드는 저 혼자서도 괜찮다며 오히려 몇 마리를 이엘이 있는 곳으로 올려 보내는 여유까지 보였다. 올라온 늑대들에게 둘러싸여도 이엘은 불안함을 잠재우지 못하고 애먼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오헬. 불안해?”
로날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불안이 옮겨 간 건지 새끼 늑대 몇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들의 털을 만져 주며 이엘은 부러 밖의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 꺼내 놓았던 서류 뭉치를 다시 손에 잡았다. 일이라도 해야 쓸데없는 걱정이 사라질 것 같은데…….
“으아악!!”
그러나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에 서류들은 바닥에 죄 떨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뒤에서 로날드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겁지겁 계단을 달려 내려온 이엘은 성전 문을 가로막은 늑대들을 뿌리치고 문을 열었다.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눈이 덮여 있어야 할 곳엔 뾰족하게 솟아오른 얼음 조각이 깔려 있었고, 성전을 둘러싸고 있었던 나무들은 일부가 사라져 휑하니 비어 버린 공터가 되어 있었다.
“오, 오헬! 들어…… 크흑!”
주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은 그녀의 머리 위였다. 하늘 높은 곳에 떠오른 잿빛 늑대는 누군가에게 목이라도 졸리는 것처럼 앞발을 버둥거리며 숨조차 제대로 쉬질 못하고 있었다. 주드의 주변엔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금방이라도 박을 태세로 그를 향해 위험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제 입을 막으며 놀란 표정을 짓던 이엘은 본능적으로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주드를 내려놔!”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만 남자는 그녀가 있는 쪽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굳어 버린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멈춘 채로 주드가 있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을 뿐이었다. 이엘은 침착하게 해머를 먼저 당겼다. 섣부르게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차분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는 여전히 시선을 주드에게만 고정시키고 있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내려놓으세요.”
이대로 발포해도 정당방위에 속할까? 종족의 싸움에 인간이 끼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으윽!”
“주드!”
숨이 막힌 채로 버틸 만큼 버틴 주드는 낯이 새파랗게 질리며 혀를 입 밖으로 내밀었다. 짧은 탄식 소리와 함께 주드의 커다란 눈이 감겼다.
타앙―!
소음기를 달지 않은 쇳덩이의 소리가 숲을 타고 넓게 진동했다. 빠르게 날아간 총알은 건너편 나무에 박히더니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조준이 실패한 건 아니었다. 총알은 정확히 남자의 손바닥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엘은 일부러 그를 맞추지 않고 능력을 집중할 수 없을 만큼의 상처만 입혔다.
그와 동시에 쿵 소리와 함께 공중에 떠올라 있던 늑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엘은 먹먹해진 귀를 부여잡으며 주저하지 않고 주드에게 달려가 맥박을 쟀다.
“주드!”
혀를 내밀고 정신을 잃은 주드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덮었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어……. 이엘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성전 안에서 대기 중이던 늑대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의 지시대로 주드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늑대들과 함께 주드의 모습이 완전히 성전 안으로 사라진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리볼버를 고쳐 쥘 수 있었다.
“정체를 밝히십시오. 어느 종족이십니까?”
남자는 여전히 멍청하게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간 총알은 그의 손바닥에 생채기를 깊게 남겼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붉은 피를 무감하게 바라볼 뿐.
여러 번 제 손바닥을 쥐었다가 펴는 행동을 바라보며 이엘은 총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이엘의 등 뒤로 성이 난 늑대 몇 마리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대충 어떤 종족인지 감이 왔다. 보기 드문 회백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 아까 눈을 하늘로 띄울 때부터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 종족이 회의에 참석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워낙 타 종족들에게 박대받는 종족이기도 했고, 원래도 경계를 지키는 쪽에 살고 있었으니 이렇게 먼 곳까지 올 줄은 몰랐다.
동그란 안경과 하얀 피부, 그리고 회백색의 머리카락. 남자보다는 소년에 더 가까울 정도로 한참 어려 보였다. 그렇다면 어린 우논일까? 긴장하며 생각을 곱씹던 이엘에게 남자의 시선이 닿았다.
“……조이?”
한참 끝에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한 대답이었다. 줄곧 피가 흐르는 제 손바닥을 멍청하게 쳐다보던 남자는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인간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인간 소년을 쳐다보는 순간. 남자는 전에 없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조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