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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8화 (48/488)
  • 48화

    타 종족의 성전 안에는 출입이 금지되는 게 일반이었지만 워낙 룰을 어기는 종족이 많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곳에서조차 이엘은 안도할 수 없었다. 일단 몸을 숨기기 위해 수많은 계단을 뛰어올라 가장 높은 다락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늑대로 변한 주드가 따라 올라왔다.

    “뱀이 먼저 오고 있니?”

    “신경 쓰지 마, 오헬. 폐하를 믿어. 그분이 널 지켜 주신다고 하셨잖아.”

    주드의 말이 맞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성전 탑의 가장 높은 방으로 들어가 열려 있던 창문을 전부 닫았다.

    아침부터 영지 내에는 기묘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늑대의 것은 아니지만 낯설지 않은 냄새였다. 이엘은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눈이 내리는 하늘 위로 무언가 커다란 것이 영지를 에워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마. 여긴 제일 안전한 곳이니까.”

    “걱정 안 해. 안 무서워.”

    “오드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응.”

    습관적으로 잿빛 늑대를 쓰다듬어 주며 이엘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 위를 나는 소리도, 대지를 울리는 소리도. 하루라도 빨리 종족회의가 끝났으면 좋겠다. 왠지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처럼 마음이 괜히 불안했다.

    *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오.”

    오랜만에 개방한 거대한 홀을 다양한 종족이 가득 채웠다. 안드로의 안내를 따라 종족의 수장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노아 역시 피곤한 얼굴로 그의 자리인 가장 상석에 앉았다. 워낙 코가 예민하니 온갖 냄새에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종족회의는 과거 열렸던 귀족회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이야기가 오갔고 앞으로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강구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구에 흥미가 몰린 몇 종족 때문에 그런 유의 회의는 좀체 열리지 않았으니, 이렇게 많은 수의 왕들이 모인 것도 실로 오랜만인 셈이었다.

    “늑대의 영지가 참 생기가 넘치는 듯싶소.”

    먼저 운을 뗀 건 로빈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워낙 음습하고 어두운 늑대들의 소굴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떨어지는 눈 속에서도 따뜻한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며 하나같이 아우성이었다.

    로빈은 눈꼬리를 접으며 노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눈 아래 점이 같이 움직였다. 마치 내 것을 가져가고도 뻔뻔한 낯짝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였다. 노아는 가만히 로빈을 쳐다보다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는 생기가 없던 것처럼 말하네?”

    “폐하. 공식 석상이니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안드로가 작게 타일렀지만 노아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로빈에 한해서는.

    “그러는 뱀들이야말로 요새 아주 날뛰던데?”

    건너편에 앉아 있던 금발 머리의 소년이 비웃으며 잔을 들었다. 로빈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레온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렴 그대들만 하겠나? 다니는 곳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남아 있는 인간들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지, 아마?”

    “뭐. 우리 애들이 그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워낙 앞뒤 없이 뛰어다니는 애들이니, 혹 밟히지 않게 그대의 종족들에게 잘 피하라 전하게.”

    “충고 고맙네. 왕의 명령도 안 듣는 멍청한 고양이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안드로가 제 이마를 짚었다. 도무지 평화협정이란 걸 모르는 자들이다. 하긴 그 평화협정이란 것도 인간들이 있을 때나 가능한 얘기였지. 공공의 적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야 무슨 평화협정이겠냐마는.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는 건 비단 로빈과 레온만이 아니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알게 모르게 이빨을 드러내는 자들이 많았다. 이번 회의의 주최자인 노아 역시 그들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딴 얘기는 나중에 하고. 회의나 하는 게 어떤가.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은데.”

    결국 르네가 한마디 하고 나서야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노아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뾰족하게 솟은 성전의 탑이 눈에 들어왔다. 곁에 늑대들을 많이 붙여 두었으니 알아서 잘 숨었겠지. 걱정했던 인간의 냄새는 밀로 덕분에 완전히 가려졌다. 뿐만 아니라 아예 눈까지 내려 버려서 이엘의 냄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여간 용 놈들의 심술은.

    “노아. 회의를 진행해.”

    “알겠어. 일단 모인 걸 환영한다. 이제 와 격식 차리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 좀 편하게 하자고.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소개하고 싶은 자들이 있다. 전에는 회의에 없었던 자들이라서.”

    노아가 손짓하자 앤디와 안드로가 닫혀 있던 홀의 문을 열었다. 밀려오는 종족 냄새에 모여 있던 자들이 하나같이 제 코를 틀어막기 시작했다. 이 특유의 냄새. 먹이 습관이 썩 좋지 않은 종족이다. 특히나 레온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 기분 나쁜 냄새를 너무 오랜만에 맡았기 때문이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긴 머리를 정갈하게 묶고 깔끔한 귀족의 복장으로 등장한 패티스는 특유의 시원한 미소와 함께 모여 있던 자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옆에 있던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가볍게 묵례를 할 뿐이었다.

    하이에나……. 레온이 이를 갈며 눈썹을 위로 틀었다. 왜 초대한 거야? 짜증이 난 얼굴로 노아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답도 해 주지 않았다.

    “하이에나는 공식적으로 왕의 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던가?”

    로빈이 적막을 깼다. 패티스는 로빈의 비꼼에도 웃는 낯을 고수하며 제 오른손을 펼쳐 옆에 있는 남자와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희 직계는 여전히 살아 있죠. 왕좌를 비워 놨다고 종족이 사라진 건 아니잖습니까. 왕이 없을 뿐이지, 왕자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세 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 한 명은 이런 곳을 좀 싫어해서요. 나가 놀라고 풀어 줬습니다.”

    본능적으로 노아의 시선이 창문에 닿았다. 제정신이라면 함부로 영지를 헤집고 다니진 않겠지만 저 집안은 워낙 문제가 많은 집안이라 안심할 수 없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걱정에 노아가 앤디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앤디는 모두의 눈을 피해 조용히 홀을 빠져나갔다. 패티스는 술렁거리는 좌중을 가볍게 무시하며 곁에 선 남자와 함께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하이에나들은 예의도 없나 보네. 처음 왔으면 이름 정도는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냐?”

    “저래서 더러운 놈들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니까.”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군.”

    “이봐. 그 말은 우리 쪽도 불쾌한데?”

    “이런, 의도치 않게 실례하게 됐소?”

    갑자기 아수라장이 됐다. 썩은 고기를 먹네, 마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지경에 이르자 노아가 짜증스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쾅 소리 나게 떨어진 유리잔의 바닥이 조금 깨졌다. 안드로는 짧은 한숨을 쉬며 주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빠르게 잔과 유리 조각을 치웠다.

    “내 영지에서 시끄러운 소리는 좀 안 났으면 하는데.”

    “…….”

    “패티스. 너희 선대가 죽은 이후로 한참이나 종족회의에 오지 않았으니 너희들을 모르는 자들이 꽤 많다. 이름 정도는 말하지 그래.”

    “그럴까요? 노아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희의 이런저런 사정을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알려진 대로 왕좌를 비워 놓았습니다. 대대로 작위에 오르는 건 암컷이었으니까요. 암컷을 잃어버린 저희들은 왕좌에 오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는 왕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

    “그러니 왕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저희가 이 회의에 참석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싶은데요. 그래서 늑대들의 왕께 허락을 구했고 이 자리에 오게 된 겁니다.”

    레온은 인상을 찡그렸다. 사자와 하이에나의 관계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잘 알면서. 적어도 제게 언질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

    밖에서 혹 예상치 못하게 하이에나와 마주칠 제 수하들이 걱정돼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성질머리 안 좋은 놈들을 여럿 데려오기는 했는데……. 부디 양쪽 다 조용히 지내다 가길 바랄 뿐이다.

    “저희는 세쌍둥이로, 선대의 직계입니다. 원래는 네쌍둥이였으나 첫째는 20년 전에 죽었습니다.”

    “…….”

    “예정대로였다면 그녀가 현 왕좌에 올랐을 테지만요.”

    죽은 자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패티스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담담했다. 인간들에 대한 하이에나의 원한이라면 이종족들 사이에서도 워낙 유명한 이야기였다. 작위를 수여받을 예정이었던 그들의 첫째는 가장 끔찍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했고, 그로 인해 남은 세 형제 중 하나가 미쳐 버리고 말았다는 얘기는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저희 세 명이 모두 온 것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공동으로 영지를 이끌고 있거든요. 아차. 소개가 자꾸 늦어지네요. 제 옆에 있는 자는 둘째 하트, 그리고 저는 막내 패티스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형은 밖에 있습니다. 아마 들어오지 않을 테니 따로 소개해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완 달리 하트라고 소개된 자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엮이면 피곤한 집안이라니까. 노아는 대충 손짓으로 두 사람의 합류를 반겼다.

    노아가 걱정하는 건 여기 있는 하트나 패티스가 아니었다. 목숨과도 같은 첫째 누나를 잃고 반쯤 미쳐 버린 셋째의 존재였다. 그놈까지 데려올 줄은 몰랐는데……. 이곳에서까지 사고 치면 곤란하다.

    “피시는 어디 갔어.”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와인 잔을 쳐다보던 하트의 귀에 패티스가 손바닥으로 제 입을 가린 채 속닥거렸다.

    분명 성문 안까지는 다른 우논들과 함께 들어왔던 것 같은데 중간 즈음부터 사라져 버렸다. 워낙 제멋대로인 데다가 불안한 정신 때문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그렇게나 주의를 줬건만. 멍청한 것들이 그거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여간 수컷들은 쓸모가 하나도 없어. 패티스가 욕을 뇌까렸다.

    피시. 어디 있냐고. 힘주어 말하며 패티스가 하트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손에 든 하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와인 잔만 흔들었다. 알 게 뭐야. 하트의 딱딱한 대답에 패티스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제 입에 털어 넣으며 하트를 향해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 형님들. 제발 정신들 좀 차려, 한심하게 굴지 말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인지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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