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노아는 자신의 아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영민한 왕이었다. 세상에 있는 왕이 모두 아비와 같은 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종족회의에 뱀도 온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겠지.”
“네. 그리고 밀로도 영지를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 건가요?”
“그건 네가 알 것 없어.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그 녀석 힘이 필요해.”
“밀로는 힘만 셀 뿐이지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제가 같이 가는 건 안 될까요? 뱀도 온다고 하니…….”
“아니. 로빈은 이미 네가 여기 머문다는 걸 알고 있어.”
“…….”
“네가 영지를 벗어나면 더 위험해져. 벌써 영지 밖에 은신한 뱀들이 널렸거든.”
그래서 며칠 전부터 주드가 거의 뜯어말리듯 이엘을 막아선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엘도 르네를 만난 뒤로는 밖에 자주 나가지 못한 터라, 한동안은 영지 내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았다.
“오히려 로빈은 네가 여길 벗어나길 기다리고 있어.”
“그렇군요.”
“영지 내에 있는 게 더 나을 거야. 네 냄새가 늑대들에게 섞일 테니까.”
“하지만 미르가 걱정이에요. 그 애는 정말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해요.”
미간까지 일그러뜨리며 밀로를 걱정하는 이엘을 보며 노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이 용을 걱정하고 있다니. 이 멍청한 용이 어지간히 연기를 잘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천성대로 멍청하게 행동했거나. 어쨌거나 이엘은 마치 제 친동생이라도 된 양, 밀로를 걱정하며 연신 혼자는 안 된다는 바보 같은 말만 덧붙이고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녀석은 약하지 않다. 쉽게 당할 놈이 아니야.”
“그게 아니라 그 멍청이가 폐하께서 시키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요.”
“…….”
“무식하게 힘만 세서 제 뜻대로 안 되면 막무가내로 들이받을 겁니다.”
심각한 얼굴로 걱정에 휩싸인 이엘을 쳐다보며 노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대한 홀을 울리는 시원한 웃음소리에 주절주절 속내를 털어놓던 이엘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엘은 줄곧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민망한 표정으로 잔을 입에 갖다 댔다.
웃음은 멈췄지만 여전히 미소가 그려진 잘생긴 얼굴로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엘은 노아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민망해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홱 피했다.
반면 노아는 그저 소년이 먹는 모습을 뿌듯하게 쳐다보며 그의 재잘거림을 즐겁게 들었다. 조금 전 벌벌 떨던 것도 잊어버리고 식사를 할 만큼, 특훈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잘 먹는 게 기특했다.
“회의가 열리면 성전에 들어가서 오드랑 같이 있어. 옆에 둔과 테르를 몇 붙여 줄 테니까.”
“뱀들의 실험은 어느 정도로 진행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전에 우리가 습격해서 연구소 몇 개는 파괴됐으니 크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거야. 왜? 걱정돼?”
“아……. 네. 조금요.”
며칠 전 암시장에서 발견한 장치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보안기술이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전기를 사용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 그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그런 최첨단 시설을 만들었을까.
제국에서 머리를 쓴다고 하던 연구원들은 전부 죽었다. 이름 하나하나 확인하며 지워 갔기 때문에 저처럼 오드의 도움으로 살아난 게 아니고서는 숨이 붙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남은 인간들이 다시 머리를 쓰기 시작한 걸까.
“오헬.”
인상까지 찡그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 이엘의 이름을 불렀다. 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지 기껏 되찾은 안색까지 도로 안 좋아졌다.
솔직한 말로 노아는 그따위 연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물론 제 종족이 연구에 참가하거나, 뱀들에게 동의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 우둔한 행동으로 신의 노여움을 산 인간들이 전부 죽지 않았던가. 자신의 종족이 그런 말로를 맞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뱀들의 행위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 일로 인해 설령 뱀이 멸족한다고 해도 모든 것의 책임은 뱀들에게 있다. 그게 아니어도 그들은 10년 전의 과오로 큰 벌을 받게 될 것이고.
노아가 뱀을 경계하는 이유는 오로지 이엘 하나 때문이다. 제 무리로 들어온 인간을 빼앗기지 않고 보호하겠다는 명목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그딴 연구에 대항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척을 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엘은 지나칠 정도로 뱀들의 연구에 연연했다. 단순히 자신이 아비의 지식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혹시 네 아비의 속죄를 대신하고 싶은 건가?”
“……네?”
“네가 그 일에 그렇게 신경 쓰고 목을 매는 이유.”
속죄. 이 싱숭생숭한 마음이 정말 그것과 관련 있는 걸까?
억울했는데. 왜 내가 아비의 죄를 뒤집어써서 이렇게 벌을 받는 건지, 그게 그토록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는데. ……정말 내가 이 일에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폐하께서는 왜 뱀들의 연구에 반대하시는 거죠?”
이엘의 물음에 노아는 내려놓았던 나이프와 포크를 다시 들었다.
“그럼 내가 찬성해야 할 이유가 뭐지?”
“그 연구가 성공하면…… 암컷이 생기잖아요.”
“…….”
“그럼 종족 번식이 가능할 텐데요. 멸족을 면하지 않겠습니까?”
“보복으로 인간 여자들을 죽인 건 우리의 선택이었다.”
“…….”
“죗값을 받는 건 우리의 책임이고.”
물론 반은 거짓이고 반은 사실이다. 인간 여자를 전부 죽였던 건 일부의 실수였고, 그 실수를 알면서도 묻은 건 왕의 책임이다.
노아는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뱀들의 농락에 몇몇 어린 개체들이 왕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 여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만큼은 말해 줄 수 없었다. 그 전쟁은 죄 없는 자들까지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줄 수 없었다.
그건 왕으로서 지켜야 할 침묵이었다. 제 백성이 흘린 허물을 감당해야 하는 건 왕인 제 몫이었다.
또한 사실을 밝힌다고 해도 노아 자신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작당 모의를 눈치채지 못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만든 것은, 왕으로서 자질 이하의 결과였다. 결국 이 모든 죗값을 받는 건 온전히 자신들의 책임이었다.
어쩐지 씁쓸하게 웃는 노아를 바라보며 이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전. 그녀의 아비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르뷔 제국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땅이었다고 했다. 이종족과 서로 친구였고 동반자였던 그 시절은 땅과 바다에 넘쳐나는 자원으로 풍족한 삶이 이어졌다. 신은 인간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아낌없이 다 내어주었다. 인간도 신을 사랑했고 경외했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멍청한 짓은 인간들이면 충분해.”
“…….”
“우린 그저 따를 뿐이야.”
하지만 교만한 인간은 신을 저버렸고 결국엔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우매한 짓을 벌였다. 그 죗값으로 개체의 반 이상이 죽었고 노예로 전락했다. 신에게 받았던 지식마저 어느 순간부터 차차 사라져 버렸다. 인간들 사이엔 불화가 생겼고 예전처럼 서로 머리를 맞대며 모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건 그의 말대로 죗값이었다.
“하지만 네 아비의 죄는 네 아비의 것이다.”
“…….”
“네가 대신 속죄할 필요는 없어.”
“…….”
“죄는 대물림되는 게 아니니까. 그냥 넌 지금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되는 거야.”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제 수하의 백성들이 저지른 죄를 뒤집어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눈앞에 앉아 걱정에 사로잡힌 인간 소년은 아비의 죄를 대신 속죄할 이유가 없었다. 그 끔찍한 사건들은 이미 20년 전에, 그리고 10년 전에 모두 끝났으니까. 남겨진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말을 마친 노아는 잔을 입에 대고 목을 축이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다. 이엘은 아직도 스테이크의 반이나 남은 제 접시를 쳐다보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된다고……. 과연 내가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 걸까. 내 안에 저들처럼 순수한 마음이 과연 있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
하얀 눈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지 이틀 정도 지났다. 오늘은 그토록 기다리던 종족회의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어젯밤 은밀하게 영지를 떠난 밀로를 배웅하며 이엘은 걱정 속에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완전히 날밤을 새 버린 그녀의 앞으로 녹차가 담긴 찻잔이 다가왔다.
“엘. 이거라도 좀 마셔.”
“고마워, 오드.”
“걱정이 되나 보구나. 별일 없을 거야.”
“하필 종족회의 때 심부름을 보낸 게 이상해. 아무리 미르가 쓸모없기는 해도 이렇게 중요한 날에 꼭 떠나야 했을까?”
“쓸모없다는 말을 들으면 밀로가 화를 내겠어.”
오드가 작게 웃었다. 창가에서 내려온 이엘은 기다란 의자에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노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밀로는 왜 제 앞에서 입을 다문단 말인가. 비밀이라도 생긴 것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피하는 밀로가 떠올라 괜히 화가 났다. 돌아오기만 해. 가만 안 둘 거야. 이를 바득바득 가는 이엘을 쳐다보며 또다시 오드가 웃었다.
“봐, 엘.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눈이야.”
“그러네. 10년 만에 보는 것 같아.”
“이곳은 북쪽인데도 이제야 눈이 내리네. 예년보다 시기가 좀 늦었다고 하더라.”
“응. 예쁘다, 정말.”
감탄하는 말투와는 달리 눈동자엔 흥분 따위 보이지 않았다. 이틀 전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어마어마하게 쌓여 갔다. 이엘은 눈이 내린 뒤부터 성전에 틀어박혀 창밖만 응시할 뿐, 밖으로 나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헬! 같이 나가자. 응?”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성전으로 몰려든 늑대들이 이엘의 곁을 맴돌며 밖에 나가자고 보채고 있었다. 그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던 오드는 청소를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이엘은 제 옆에 토라진 채로 엎드린 늑대들을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미안. 종족회의가 열리는 동안엔 여기서 나갈 수 없는 거 알잖아.”
“같이 놀고 싶은데…….”
“나가서 놀고 와. 여기서 지켜볼게.”
그녀의 타이름에 어린 늑대들이 투덜거리며 성전을 나갔다. 다른 곳보다 먼저 내리기 시작한 늑대들의 영지엔 하얀 눈들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철없는 어린 늑대들은 종족회의고 뭐고 안중에도 없고, 눈 위에서 뛰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엘은 반대쪽 창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밀로와 고생 끝에 만든 온실 덕에 노아의 정원엔 눈이 쌓이지 않고 꽃들이 온전히 피어 있었다. 다른 영지보다 기온이 낮은 곳임에도 이상하게 저곳만은 비교적 온도가 높아서 꽃이 자리를 잘 잡았다.
아무 생각 없이 밖을 쳐다보던 이엘이 갑자기 몸을 흠칫 떨었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들이 예민한 귀를 찢었다. 온갖 울음소리가 한데 섞여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었다. 밖에서 뛰놀던 늑대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바짝 세웠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빠르게 성전 안으로 들어와 이엘의 앞을 막아섰다.
“오헬! 얼른 안으로 들어가! 다가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