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동안 노아는 밀로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밀로에게 심부름을 시킨 걸까? 왜 하필 종족회의에 맞춰서……. 괜한 불안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의 엘. 그렇게 인상 찌푸리지 마. 금방 돌아올게.”
“그치만……,”
“그보다 뱀도 온다고 하더라.”
“…….”
“나도 없으니까 알아서 조심해, 오헬.”
하긴.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할 때야. 종족회의는 공식적으로 작위를 수여받았던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것에서 비롯된 행사였다. 그러니 뱀이 참석하는 건 당연했다. 뜻하지 않게 로빈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끈질긴 뱀의 행각으로 볼 때 이번에 잡히면 정말 꼼짝없이 그 성에 갇힐지도 모른다.
때마침 성전에서 나오던 오드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오드의 양옆으로 우논 소년들이 함께 있었는데, 최근에 만들어졌다던 성가대 아이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을 발견하고 이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환하게 웃는 이엘을 향해 아이들이 뛰어들었다.
“오헬! 예배드리러 온 거야?”
“응. 잠깐 들렀지.”
“같이 예배드리자! 나도 드릴래.”
“그럴까?”
부쩍 밝아진 이엘의 얼굴을 보며 오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밀로는 어느새 아이 하나를 들어 목말을 태우고 온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엘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늑대 한 마리가 그녀의 옷 끝을 물어 당겼다.
“로날드? 왜 그래?”
“폐하께서 부르셔.”
“날?”
“응. 예배만 드리고 얼른 와.”
“알겠어.”
이엘은 로날드의 털을 쓰다듬어 주고 서둘러 성전 안으로 들어가 우논 아이들과 예배를 드렸다. 오드가 성전에 머물게 되면서 그 어떤 영지의 성전보다 따뜻하고 정결해졌다. 아직 신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 우논들도 오드의 가르침대로 잘 자라고 있었다. 늑대들에겐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은 이엘은 노아가 있는 집무실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대답 없이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바쁘게 지시를 내리는 노아와 안드로가 보였다. 평소완 다르게 화롯가 근처에 머무르던 늑대들이 보이지 않았다. 종족회의로 인해 상당수가 바쁜 모양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앉아 있어.”
노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펜을 내려놓았다. 다른 우논이 내온 찻잔을 받은 이엘이 집무실 한곳에 마련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종족회의가 열리게 될 날짜가 잡히고 난 뒤로는 이엘이 노아를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꽤나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엘은 오랜만에 들른 집무실 곳곳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고풍스럽게 잘 자리한 우아한 공간이었다.
나가 봐. 노아는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안드로를 포함한 여러 우논들을 전부 내보냈다. 터벅터벅 걸어와 반대편에 앉은 노아는 이엘이 밀어 준 찻잔을 집어 들었다. 딱히 차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피곤할 땐 마시는 게 좋다며 안드로가 잔소리를 하는 통에 억지로 들인 습관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폐하?”
“아. 그래. 내가 불렀지.”
“혹시 종족회의 일로……,”
“아니. 아침 먹자고.”
“네?”
“같이 식사 안 한 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
“그동안 뭘 하며 지냈는지도 꽤 궁금하니까.”
말을 마친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함께 일어난 이엘은 바로 옆방에 마련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나이프를 떨어뜨린 이후로 몇 번 식사를 같이 하기는 했지만 앤디나 안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그때와 같은 트라우마가 떠오르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노아와 단둘이 남겨지니 없어졌던 긴장이 도로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하필 왕과 단둘이 식사라니. 잊어 보려고 해도 저를 노려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겹쳐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학대의 흔적이었다.
“앉아.”
“미르나 오드도 불러올까요?”
“아니. 오늘은 너랑 중요한 얘기를 할 생각이야. 그냥 둘이 먹지.”
기다란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자리 잡은 긴 촛대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천장 위엔 아름다운 그림이 사진처럼 새겨져 있었고 커다란 창문들은 커튼으로 적절하게 가려져 있었다. 이엘이 생각하기에도 이곳은 이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여기서 식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곳은 노아의 아주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니까.
여전히 머뭇거리는 이엘을 향해 손짓했다. 평소였다면 가장 상석에 노아가 앉고 멀리 떨어진 곳에 이엘이 앉아 식사를 했을 텐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노아가 상석이 아닌 그 옆자리를 택했다. 덕분에 기다란 테이블의 끝이 아닌 노아의 맞은편 의자를 빼내고 앉은 이엘은 이 어리둥절한 상황에 좀체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편하게 앉아도 좋아.”
“네……?”
“나와 둘이 있으면 식사를 못 하는 것도 알고 있다.”
“…….”
“그래서 자리를 좀 바꿨는데. 여전히 힘들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제 새끼를 살피는 어미나 아비처럼 노아가 저를 돌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마치…… 이 무리에 완전히 속한 것처럼. 간지럽고 낯선 기분에 이엘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어릴 때 수영을 잘하지 못했어.”
뜬금없는 노아의 이야기에 이엘이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 마주 잡았다. 노아는 마련되어 있는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 하나를 가져가 부드럽고 우아하게 나이프를 움직였다.
“날 때부터 수영을 잘하는 게 당연한 건데 나는 그러질 못했지.”
“…….”
“그래서 나는 물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노아는 잘 잘린 스테이크를 이엘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나이프를 들지 못했다.
“방계였던 친척들이 날 보고 비웃었지. 늑대들의 수치라며.”
“…….”
“나는 그럴수록 더 물을 무서워했고 혐오하기 시작했어.”
“…….”
“그러던 어느 날. 당시 공작이셨던 아버지께서 전쟁터에서 오랜만에 돌아오셨다.”
이번엔 노아가 자신의 스테이크를 칼로 썰기 시작했다. 이엘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뜨리고 있을 뿐, 식사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헛배가 부른 것처럼 입맛이 뚝 떨어졌다.
“여전히 물을 무서워하고 기피하기까지 하는 나를 데리고 아무 말 없이 호수로 향했어.”
“……폐하.”
“그리고 물에 빠뜨리셨지.”
그 대목에서 이엘이 미간을 구겼다. 노아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여전히 자신의 스테이크를 부드럽게 썰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프를 쥐어라.”
“폐하.”
“명령이야. 들어.”
노아가 수영을 못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단순히 나이프질을 못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그 상황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아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프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을 받으며 옷을 입을 때도 마찬가지로 괴로웠다. 몸에 밴 온갖 황궁 예법 하나하나가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차마 그것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이프 쪽으로 손을 뻗어야 했다. 나이프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단단하게 잡았다. 움직이기는커녕 그저 꽉 쥔 채로 떨어뜨리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노아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이엘은 모두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런 고요한 공간이 아닌 곳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했다. 하지만 유독 저와 단둘이 있거나 이렇게 거대한 홀에서 식사를 할 때면 그때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식사하기를 거부했다.
노아의 시선이 따가워 이엘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무작정 찔렀다. 차분히 마음을 다지며 입 쪽으로 손을 옮겼을 때, 역시나 손바닥에 생긴 땀 때문에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차창―! 쇳덩이가 대리석과 부딪쳐 귀를 찢는 소음이 생겼다. 이엘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다. 아버지가 만들어 버린 지옥.
“……그리고 아버지는 친히 물 안으로 들어오셨다.”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벌벌 떨며 억지로 괜찮은 척하려는 소년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이엘이 떨어뜨린 나이프를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물속에서 나를 받쳐 주셨어.”
“…….”
“내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그는 손을 뻗어 반대편에 놓여 있던 제 나이프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엘의 손바닥 안에 그 나이프를 쥐여 주었다. 땀으로 인해 미끈거려 나이프를 잘 잡지 못하는 이엘을 대신해, 노아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어 주며 함께 나이프를 잡았다.
“그게 내가 물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방법이야.”
“…….”
“수영을 배운 게 아니라.”
“…….”
“물이 무섭지 않게 된 거야.”
그의 손짓을 따라 나이프가 부드럽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반대편 손도 함께 잡아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미끈거리는 손이 단단하고 커다란 손으로 인해 더는 미끄럽지 않게 되었다.
노아는 금세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천천히 해 보자.”
“폐하.”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다만 너도 네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준비를 하도록 해.”
“…….”
“우리 모두는 뒤처진 늑대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너 역시 우리와 같은 늑대지 않나? 농담처럼 스쳐 간 노아의 웃음 섞인 말에 이엘의 창백한 얼굴이 차차 안색을 되찾아 갔다. 줄곧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그는 황제와 다른 왕이었다. 똑같이 존귀한 자리에 있었지만 강압적이지 않았고, 똑같이 제 안에 딸린 백성이 있었지만 외면치 않았다. 그는 제대로 다스릴 줄 아는 왕이었다. 내 아비와는 다른 왕이다.
내가 더는 황녀가 아닌 것처럼.
“그럼 이제 진지한 이야기를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