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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5화 (45/488)
  • 45화

    불타는 황궁에서 도망쳐 기사단장이었던 루스의 손을 잡고 숲을 내달리던 이엘의 앞에 들이닥친 독수리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로 저를 매섭게 내려보던 남자.

    ‘죽여.’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메아리쳤다. 루스와 몇 번의 설전 끝에 검으로 가볍게 루스의 목을 잘라 낸 르네는 벌벌 떨며 엉엉 울던 어린 이엘의 앞에 섰다.

    ‘모든 건 네 아비 탓이다.’

    제국에 남은 유일한 황족을 르네는 제 손으로 친히 죽였다. 만일 숲에 숨어 있었던 오드가 없었더라면 이엘은 정말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이엘이 기억하는 땅 위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변복을 해도 내겐 네 검은 머리와 녹안은 가려지지 않는구나.”

    “…….”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넌 황족의 숨겨 둔 씨앗인가?”

    10년 만에 조우하게 된 끔찍한 악연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원수라고 말하기엔 그녀의 마음에 그를 향한 원망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미천한 자가 눈이 어두워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렇다고 이해한다고 말하기엔, 그는 그녀의 사람들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였다.

    “저는 황족도, 뱀의 혼혈도 아닙니다. 드물게 피가 섞이다 보면 이런 색이 나오기도 한다고 어릴 때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

    “어쩌면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보신 그 황녀님 또한 저의 멀고 먼 친척일지 모르죠.”

    또 한편으로는 이엘이 이 지긋지긋한 삶을 겪기도 전에 마감할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은인이기도 했다.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갔지만.

    “하지만 제 부모님은 평범한 제국민이었고 저 또한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달달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더욱더 조아렸다.

    르네. 그러고 보면 그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죽기 전까지 이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어떻게든 그녀를 지켜 주려 했던 기사단장 루스가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르네라 불리던 남자는 큰 목소리로 루스와 설전을 벌이다 끝내는 검을 들어 그를 죽여 버렸다.

    ……독수리가 나를 알아봤을까?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까 두려움에 손이 자꾸만 떨렸다. 독수리들은 머리가 좋으며 기억력도 좋았다. 그들은 그 좋은 머리 하나로 공작 위를 받았고,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황실을 향해 충성을 다하며 재상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해내던 집단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그들에게도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독수리 눈알의 가치는 예전부터 이어져 오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암컷의 눈알이 더 값비싸며 성질이 우수하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대학살을 가져온 것은 전부 황제가 한 일이었다.

    그저 암컷을 죽이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공작의 하나뿐인 영애까지 황궁으로 납치해 죽여 버렸다고 했다. 그때 영애의 아비였던 공작은 황제에게 나섰다가 죽고 말았으니, 아마도 르네는 그 영애의 오라비쯤 될까. 이엘은 이 끔찍한 현실에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내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독수리의 눈알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눈앞의 독수리는 내 아비가 죽여 버린 영애의 오라비다. 내 아비는 숨어 있던 유일한 암컷 독수리를 납치해 죽였고, 독수리는 도망치던 유일한 여자아이를 죽였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조우했다.

    이 끔찍한 악순환에 이엘은 말없이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름이 뭐지?”

    “오헬입니다.”

    “왜 늑대가 너를 무리에 들인 것이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속한 곳은 늑대들이며, 그 말씀은 노아 님의 허락이 없으면 드릴 수 없습니다.”

    르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 발 아래 엎드린 소년을 내려봤다. 이로써 르네는 소년을 세 번이나 본 셈이었다. 처음 봤을 땐 노아와 함께 비에 잔뜩 젖어 쓰러진 채였고, 두 번째 봤을 땐 쓰러진 채로 르네에게 구출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제 분수도 모르고 테르들을 구하기 위해 밀매장에 나타났다. 그의 기준으론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인간은 그때 저를 구출해 준 독수리가 나란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 이미 노아에게 대충 사정을 들었지만 사실관계를 공고히 하고 싶었던 르네는 한참 침묵하다가 일단 그쪽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늑대들에게 교육을 받았다면 제 왕의 허락 없이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테니.

    “노아의 명령으로 온 건가? 하지만 여긴 늑대들이 없었는데.”

    “제 독단입니다. 폐하께선 모르십니다.”

    “그럼 내가 노아에게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분의 아량에 따라 제 처분이 결정되겠지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드가 밀매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 하나뿐이었다. 주드까지 이 일에 엮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정말로 늑대들의 영지에서 축출당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늑대들은 제 무리를 아끼지만 그렇다고 타 종족에까지 자비를 베푸는 건 아니었다. 이엘은 표면적으로는 늑대에 속하지만 엄연히 인간이었다. 늑대가 없는 위험한 곳에 일부러 잠입해, 다른 종족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는 것이 그녀에게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라.”

    르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이엘의 얼굴 곳곳을 뜯어보았다.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죽였던 황녀의 얼굴이 이엘에게서 옅게 겹쳐 보였다. 숨이 끊어진 것까지 확인을 했으니 그 황녀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자는 영락없는 인간 남자였다. 그러니 그때 그 황녀는 결코 아닐 테지만……. 이상하게 르네는 이엘에게서 황녀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죄책감……?

    또랑또랑한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 맺혀 저를 바라보던 어린 소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잡혀가 죽었던 여동생을 떠올리며 단숨에 검으로 베어 버렸다. 하지만 그날부터 르네는 검을 들 수가 없었다. 검은커녕 펜조차 잡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찰나의 순간에 보았던 그 어린 생명의 얼굴이 10년이 넘도록 르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까.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나이가 몇이냐.”

    “성년을 지났습니다.”

    비슷한 또래인가. 변성기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듯한 풋내 나는 인간 소년이다. 르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지하에 부는 얕은 바람을 타고 작게 흩날렸다. 이엘은 제 코를 스쳐 지나가는 진한 향기에 움찔했다.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투시가 제 몸까지 비추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들키게 되는 게 두려워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일어나라. 르네의 명령에 이엘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지하가 크게 흔들리더니 천장에서 흙과 돌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위에서 크게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동시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위쪽에서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테르들이 도망쳤으니 남아 있는 개체를 확인하기 위해 밀렵꾼들이 하나둘 지하로 내려오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이엘이 땅에 떨어진 총을 잡았다.

    예측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총을 고쳐 쥐고 자세를 잡으려 할 때 거대한 돌풍이 불었다.

    “올라타.”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온 르네가 이엘의 앞에 친히 몸을 낮췄다.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이엘도 더는 물러나지 못하고 르네의 등 위로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올라타자마자 독수리는 바닥을 박차고 위로 뜨더니 날갯짓 한 번으로 거대한 지하공간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동시에 하늘을 막고 있던 높다란 천장 역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엘은 뚫린 공간 사이로 달빛이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뻥 뚫린 하늘을 향해 날개를 접고 치솟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올라갈수록 먹먹해지는 귀를 틀어막으며 이엘은 고통을 삼켰다. 르네가 완전히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곳곳에 잠입해 있던 독수리들이 일제히 땅을 향해 날갯짓과 발길질을 시작했다.

    텅 빈 공간으로 땅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아래서 들리는 비명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흙더미에 파묻혔다.

    르네는 가장 넓은 터 위에 이엘을 안전하게 내려 주고 자신 역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흙이 묻은 옷을 털어 내던 르네는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싼 다른 우논들을 돌려보내고 이엘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너는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할 것이냐.”

    “네.”

    “어째서? 늑대의 도움도 없이 홀로?”

    “늑대들과는 별개의 일입니다.”

    “…….”

    “최근 밀매장을 급습하면서 주변 마을도 모두 쑥대밭이 되고 있습니다. 밀매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보복으로 전부 죽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개입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

    “불필요한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동족을 감싸고 싶은 모양이군.”

    “…….”

    “안심해라. 오늘은 더 이상 피를 볼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을 마친 르네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들고 있던 망토를 몸에 둘렀다. 놀란 표정으로 멍청하게 저를 쳐다보고 있는 인간 소년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녀의 얼굴엔 재가 묻어 있었다.

    르네는 품 안에서 붉은 손수건을 꺼내 이엘에게 건넸다. 제 백성을 구해 준 인간에 대한 작은 답례였다.

    “종족회의 때 보도록 하지.”

    그는 이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다시 독수리로 변한 채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말처럼 남아 있던 독수리들은 상처 입은 새끼들을 챙겨 전부 돌아갔다. 죄 없는 인간들에게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이엘의 곁으로 주드가 달려왔다. 커다란 늑대가 코로 이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나서야 이엘은 시선을 주드에게 돌릴 수 있었다. 또 독수리야? 주드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또 독수리네…….

    저를 죽였던 독수리에게 두 번이나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

    오랜만에 영지에서 열리는 종족회의로 인해 늑대들은 매우 분주하고 흥분한 상태였다. 폐쇄적인 무리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모든 종족에게 성문을 개방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타 종족에 있는 제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기뻐하는 늑대들도 있었고, 혹시 모를 위험에 우려하는 늑대들도 있었다.

    “뭐? 가야 한다고? 왜?”

    “글쎄. 왕이 가라고 했으니까?”

    밀로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이엘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종족회의 때 자리를 비우게 됐다는 말에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이엘의 질책에도 밀로는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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