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내 빌어먹을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이야, 주드.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입 안으로 삼키며 늑대의 털을 쓰다듬었다. 주드는 내내 못마땅한 눈치였다. 하지만 정말로 주드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혹 주드가 잡히는 날엔 정말 끝장이었다. 그런 끔찍한 일에 주드가 말려드는 꼴을 다시 봤다간 그녀는 정말 모든 걸 포기할지도 모른다.
이엘은 이틀 전부터 밤을 타고 성을 빠져나와 암시장을 수소문하며 정보를 캐내는 중이었다. 최근에 독수리 떼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했던 늑대 영지 내의 밀매장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대륙 내의 암시장이 모조리 사라진 건 아니었다. 뛰쳐나오는 인간을 전부 죽이려고 했지만 개중에 살아남은 놈들이 몇 있었다. 그 끄나풀들은 제국 곳곳의 암시장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갈등은 계속해서 심화됐다. 그 사실에 분노한 이종족들은 암시장을 찾아내는 족족, 그 주변의 인간들까지 죄 죽이고 있었다. 10년 전의 그 전쟁이 되풀이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동족의 멸망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이엘은 여전히 인간이 밉고 끔찍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역만 하는 다른 인간들까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죽기를 바라진 않았다.
땅 아래선 그렇게나 인간을 혐오했는데……. 인간이란 게 참 간사해서 그 짧은 새에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그럼 데려다주는 것만 하게 해 줘.”
“안 돼, 주드. 제발 그만 떼써.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넌 내 목숨을 살려 줬어. 나는 널 지킬 이유가 충분해. 폐하께선 널 우리 무리로 들이셨고 네게 걸맞은 위치도 허락하셨잖아.”
우습게도 노아는 이엘에게 권한을 하나씩 허락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원지기에 불과했던 그녀에게 하나둘 일을 주더니, 이제는 안드로의 보좌관 일까지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과분한 대우에 거절했으나 노아의 강요 아닌 강요에 그녀는 결국 일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안드로마저 그녀를 인정하면서, 이엘은 이제 늑대의 무리에 완전히 스며들고 말았다. 그게 절대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피곤한 표정으로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던 이엘이 결국 단념했다. 그녀는 저를 걱정하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늑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대신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래로 내려와서는 안 돼.”
“알았어.”
“그리고 날 내려 주고 나서는 본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숨어 있어야 돼. 근처를 서성거리는 걸 누가 보게 되면 바로 잡힐 테니까. 알았지?”
“응.”
“무엇보다 폐하께서 아시면 안 돼. 알았어?”
“알겠다니까.”
이 어린 늑대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쉬던 이엘은 능숙하게 주드의 커다란 등 위로 올라탔다. 조금 더 자란 주드는 이젠 제법 어엿한 성체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고 어제도 노아가 몇 차례나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따라가겠다니.
어쨌든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은 담을 넘다가 들킨 제 탓이다. 머리를 짚은 이엘이 주드의 등 위에서 납작 엎드렸다.
오늘 급습할 곳은 늑대들의 영지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워낙 인구수도 적고 누군가의 산하에 들어가지도 않는 마을이기 때문에 눈을 피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게다가 허를 찌르기 위해 부러 첫 번째 암시장과 제도 사이에 위치를 정한 모양이었다. 가까울수록 간과하기 쉬우니. 그러나 임시로 마련한 곳이기 때문에 곧 이동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한다.
“꼼짝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위험하면 소리쳐, 오헬.”
“걱정 마. 풀어만 주고 나올 거니까.”
한번 겁을 상실하니 그다음부터는 쉬운 건가. 이제는 보이는 족족 새끼 테르들을 납치하기 시작한 밀렵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종족이라고 해서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개중에는 벌써 암시장을 습격해 불태워 버리는 강경집단이 있었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온건집단이 있었다. 사자와 호랑이의 종족이 그 강경집단에 속했다. 어제도 두 군데나 불태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물론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 그 자체에 불만을 갖지는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 연이어 터지기 시작한 인간 학살이 문제였다.
그들의 왕은 암시장을 쓸어버린 뒤 사자와 호랑이들이 인간을 학살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성문을 완전히 개방해 버렸으니 부추긴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암시장 근방에 살던 무관한 사람들마저 전부 죽여 버렸다
이엘은 신음을 참아 내며 눈가를 구겼다. 이런 식의 불필요한 학살과 보복은 어느 순간 그대로 돌아올 것이다. 인간이 그러했듯이.
어느덧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주드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이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그의 걱정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 꼭 숨어 있어. 그녀의 강조에 주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저를 애 취급하는 그녀에게 못마땅한 낯이었다.
이엘은 주드가 몸을 감춘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밀매장의 입구를 찾아 나섰다.
“저기, 실례합니다.”
그녀는 제 앞에 서 있던 키가 큰 남자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남자는 이엘처럼 기다란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후드로 얼굴이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다. 돌아선 남자는 이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여기는 처음이라서요. 혹시 들어가는 입구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암호는?”
“9월의 검은 루비.”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토의 후드를 벗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붉고 오묘한 눈동자로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쩐지 여기저기 훑어보는 듯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남자는 그제야 이엘에게서 시선을 뗐다.
“여기로 들어가면 된다.”
“감사합니다.”
“뭘 사러 온 거지?”
“식량을 좀 구하러요.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신데 벌써 사흘째 아무것도 못 드셨거든요.”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저희 동네는 시장이 열리지 않거든요. 어쩔 수 없었어요.”
최대한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기 위해 에둘러 말을 피했다. 남자도 눈치챈 건지 더는 묻지 않았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으레 다 그랬기 때문이다. 이엘은 최대한 걸음을 빨리하며 암시장 입구로 들어섰다. 혹 살아남았을지 모를 턱수염이 저를 알아보기라도 할까, 준비한 안경과 가발을 뒤집어쓰고 입구 앞에 섰다.
“암호는?”
“9월의 검은 루비.”
“소속은?”
“모리아 제 2지대입니다.”
위조 신분증과 명패를 보여 주었다. 최근 일어난 습격들 때문에 감시와 검사가 더 철저해졌다. 모리아 출신 특유의 악센트를 넣자 감시관이 저를 힐끗 보더니 손으로 대충 흔들었다.
모리아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박해와 차별을 받는 지역이었다. 그들은 노예 중에서도 노예에 속했고 온갖 잡일을 도맡는 지역민이었다. 특히 이런 밀매장에서도 더러운 일 처리는 그들이 하기 때문에 감시관은 엮이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질색했다.
잔뜩 움츠린 채 입구로 들어간 이엘은 가장 안쪽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바짝 낮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 테르를 잡았다면 깊은 동굴이나 금고가 있을 안쪽에 모아 두었을 것이다. 잡힌 테르들은 아직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거나 제어하지 못하는 개체들이 대부분일 테니 난동을 부리기 전에 마취시켜 놓았겠지. 이엘은 서둘러 이곳저곳을 헤집기 시작했다.
결국 두 시간이 넘게 헤매고 나서야 이엘은 갇힌 우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오는 길이 미로처럼 잔뜩 엉켜 있었다. 들어가는 건 둘째 치고 제대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계단을 한참 내려와 지하 깊은 곳까지 들어간 이엘은 횃불들 사이로 처참하게 갇혀 있는 이종족들을 발견해 냈다.
“쉿. 울지 마. 소리 내면 들켜.”
캬아아앙―! 울음소리를 내며 울분을 터뜨리는 테르들을 타일렀지만 역부족이었다. 잡혀 있는 것들은 전부 최상위 개체들이었다.
돈이 되는 독수리 새끼들이 가장 많았다. 눈알이 죄 뽑혀서 힘없이 널브려져 있는 새끼 독수리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검붉은 피로 축축했다. 한숨과 함께 이엘은 준비해 온 총에 소음기를 장착했다.
이번에는 힘에서도 밀리지 않게 자세를 취하며 잠금쇠를 향해 총을 쏘았다.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몇 번이나 총을 쐈는데도 무너지기는커녕 철창엔 실금 하나 생기지 않았다. 당황한 이엘이 다시 한 번 총을 쏘려고 자세를 잡을 때였다.
“그것으로는 소용없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철창 가까이 다가가자 바닥에 쓰려져 있던 독수리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괴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철창 사이로 독수리들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아무리 달래도 조용해지지 않던 테르들이 순식간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엘은 그가 조금 전 입구에서 마주친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철창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누르듯 허공에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철창 위로 붉은 빛의 선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마침내 이 거대한 공간 안을 잔뜩 에워싸고 있는 붉은 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붉은 선들이 모여 시작된 곳에 녹색 화면이 나타났다.
“인간들은 똑똑하니까.”
남자의 말대로였다. 불과 며칠 전의 그 허술한 장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보안기술이었다. 그들이 다시 머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이엘을 뒤로하고 남자가 녹색 화면이 나타난 곳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윽고 이상한 소리와 함께 온갖 철창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도망쳐서 너희들의 왕에게 알려라.”
그 말을 신호로 테르들이 지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위쪽에서부터 아득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괴성과 총성이 한데 얽혀서 이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몰래 빼돌리려 했는데 어째서……. 아마도 도망친 테르들은 살아남기 위해 광장에 모여 있는 인간들을 물어뜯고, 인간들은 뒤탈을 없애기 위해 총을 쏘고 있을 것이다.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 벌어지고 있을 위쪽을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아. 이게 아냐. 이렇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난.
태연하게 로브의 후드를 벗은 적발의 남자 곁으로 눈알이 빠진 독수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는 가볍게 새끼 독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엘은 당황한 눈으로 남자와 독수리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남자는 독수리를 위로 날려 보낸 뒤 인간 소년을 쳐다보았다.
“네 아비는 앓아누울 놈이 아닐 텐데.”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배를 굶을 놈은 더더욱 아닐 거고.”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남자의 서늘한 말투에 이엘이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늑대가 배를 굶는 종족이 됐지?”
“…….”
“노아 모르게 온 건가?”
이엘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인간 소년을 쳐다보던 르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태생적으로 배어 있는 기품이었다.
“어차피 곧 종족회의에서 볼 테니 미리 통성명이라도 할까?”
“…….”
“내 이름은 르네.”
“…….”
“독수리를 이끌고 있는 왕이자, 과거 공작 가문이었지.”
“…….”
“그리고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죽인 자도 바로 나다.”
그제야 이엘은 떠올렸다. 저 눈동자, 저 말투. 그리고 저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기품.
“네 이름은 뭐지?”
“…….”
“황녀를 닮은 인간 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