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늑대는 성을 나가 정원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노아는 여전히 창가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푸른 머리의 남자가 늑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가기 싫다며 징징거리는 밀로의 등을 이엘이 떠밀었다. 늑대와 함께 정원을 벗어나는 것까지 확인한 노아가 다시 의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고개를 들어 올린 이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엘이 환하게 웃으며 노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부쩍 웃음이 많아진 인간을 보며 노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엘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늑대들과 함께 돔형 천장을 만드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인간 소년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피곤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언제부터였나……. 식사를 같이 하던 날부터였나. 아니면 처음 미소를 봤던 그 폭포에서였나.
언젠가부터 노아는 이 창가에서 정원지기의 정수리를 내려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 그녀가 혹 다치면 저도 모르게 성을 나와 정원으로 향하곤 했다. 물론 그녀의 곁에는 늘 오드와 밀로가 함께였으니 대부분은 근처에서 지켜보다 돌아오고 말았지만.
그 작은 정수리를 평소처럼 가만히 응시하던 노아가 계단에서부터 들리는 소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저를 왜 부르셨습니까? 저 할 일 많은데요?!”
“자리에 앉아. 그리고 나머지는 나가 있어라.”
노아의 명령대로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늑대 여러 마리가 일제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싱글싱글 웃고 있던 밀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노아는 밀로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뜸 물었다.
“우논?”
“네?”
“아니면 둔?”
“뭐가요?”
“어느 종족이지?”
“저요? 저는 인간인데요.”
그것도 기억을 잃은 인간. 헤실헤실 웃으며 자랑하듯이 엄지로 제 자신을 가리킨 밀로는 아무런 악의도 담겨 있지 않은 표정으로 노아를 보았다. 손에 쥔 펜 끝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를 톡톡 치던 노아는 깊은 한숨을 쉬며 흐트러진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래도 좋다. 네가 어떤 종족이든 오헬의 식솔이라면 받아 주겠다고 약속한 거니까.”
“…….”
“며칠 있으면 이곳에서 종족회의가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오헬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뱀들도 있지.”
밀로가 눈썹을 위로 틀어 올렸다. 뱀의 이야기는 대충 이엘에게서 들었다. 쫓기는 신세라는 것도 넌지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엘이 씨앗을 얻기 위해 영지를 떠나자마자 뱀들이 들이닥쳤던 것을 기억한다.
어쨌든 그녀의 말대로 노아는 지금 오헬을 제대로 지켜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의탁할 곳은 늑대들의 영지뿐이라는 것을 자신도 동의한다. 밀로의 표정이 차차 풀어졌다.
“밀로. 네 종족들은 어디 있지?”
“흠.”
“말할 수 없는 건가?”
“그렇지. 일단은 기밀이라고 해 둘게.”
밀로는 이엘에게 받은 손수건을 품 안에서 꺼내 흙이 묻은 제 손을 닦아 냈다. 역시 개들은 냄새를 잘 맡네? 다소 비꼬는 어투에도 노아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밀로가 킥킥 웃으며 두 손을 흔들었다.
“우린 좀 자유로운 종족이라서. 어디 있는지 말해 줄 수는 없고. 확실한 건 늑대와 척을 지진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
“…….”
“나는 오헬을 선택했거든. 그러니까 내 동생이 머무는 곳이 내가 머물 곳이야.”
아, 근데 이렇게 들키면 재미없는데. 능청맞게 입을 삐죽거리는 밀로를 쳐다보며 노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종족이지? 전혀 맡아 본 적이 없는 냄새다. 끔찍할 정도로 깔끔하고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냄새. 노아의 노골적인 시선에 밀로가 다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 그래서 늑대들의 왕께서 나를 부른 이유는?”
“네 종족들에게 오헬을 잠깐 맡길 수 있나 해서.”
“아니. 그건 안 돼. 거긴 인간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도 아닌 데다가 지금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거든, 나랑 걔네랑.”
“그럼 네 종족 몇을 데리고 오는 건? 너희들의 냄새로 오헬의 냄새를 숨길 수도 있다.”
“말했잖아.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니까.”
“…….”
“대신 내가 숨길 수는 있어.”
“…….”
“물론 본체화를 해야 하지만.”
밀로가 어깨를 위로 올렸다가 내리며 씨익 웃었다. 잘생긴 얼굴 위에 장난기가 어렸다.
“근데 내 본체화를 오헬이 보면 도망갈지도 모르거든. 알다시피 걘 내가 인간인 줄 알아.”
“그래. 그렇겠지. 네 냄새는 웬만한 우논들도 눈치 못 챌 정도니까.”
“그날 내가 심부름 간 것으로 말을 대충 맞춰 줘. 그럼 나는 네 영지 내에서 본체화를 할 테니까.”
“그 전에. 네가 뭔지 알아야 우리 쪽 애들도 놀라지 않는다. 갑자기 영지 내에서 본체화를 하면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노아.”
제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도 모자라 기세등등한 밀로를 보며 노아의 이마가 갈라졌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예의가 없군. 노아의 핀잔에도 밀로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펴서 위를 가리켰다.
“나는 저기 하늘에 있을 거야.”
“……새?”
“아니. 난 어디든 있을 수 있거든. 하늘이든 바다든.”
“너 설마……,”
“이 정도면 눈치챘겠지?”
“……어떻게 아직도 여기 있는 거지?”
“기억을 잃은 척하면서 빈대처럼 붙어서 살아가고 있지.”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는 밀로의 태도에 노아는 머리를 짚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하늘이든 바다든, 그 어디가 되었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는 종족. 이상할 정도로 희미하고 특이한 냄새. 그리고 저 특유의 제멋대로에다가 낙천적인 성격.
“용이 아직도 땅에 있었다니.”
“정답입니다, 폐하. 역시 영민하시네요!”
분명 10년 전, 그 전쟁 통에 몇 마리만이 지상으로 내려왔다가 흥미를 잃고 금방 올라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 지금도 용 종족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면 치를 떨며 이를 가는 종족들이 수두룩했다.
“왜 아직도 지상에 남아 있던 거지? 너희는 그때 금세 흥미를 잃지 않았던가?”
“그랬지. 우린 뭐, 인간들에게 피해를 입은 종족이 전혀 아니니까. 그래서 다른 애들은 다 떠났어. 나만 남았고.”
그 전쟁에서 용들은 적군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쓸어버렸다. 닥치는 대로 인간이며, 이종족이며 가리지 않고 죽여 버린 용들 때문에 쓸데없이 개체가 줄어 버린 다른 종족들은 분개하며 용들에게 보복하려 했으나, 용들은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전부 사라져 버렸다. 자신들이 원래 머무는 곳으로 가 버린 것이다.
용이라는 게 사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은 데다가 워낙 신출귀몰하고 제멋대로라, 심지어 인간들은 용이 존재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보복을 하고자 해도 그들이 어디 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 이를 갈며 화를 삼키는 게 최선이었다.
“이제야 네 말이 납득이 가는군.”
“그래서 이건 일단 기밀이야. 폐하께서도 비밀로 해 주십시오?”
“용이 지상에 머문다는 말이 돌면 다음 공공의 적은 네가 될 거다.”
“그것 참 무섭네.”
밀로가 낄낄 웃으며 제 양팔을 쓸고 무서운 척을 했다. 노아는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혹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인 격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오헬의 냄새는 나한테 맡겨 둬.”
“알겠다.”
“그래도 뱀이 냄새를 맡게 되면 네가 오헬을 지켜. 나는 한번 본체화를 하면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려. 다시 말하지만, 무조건 오헬을 지켜.”
“알겠으니까 넌 네 일이나 잘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그럼 저는 말씀이 끝난 줄로 알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밀로.”
“예, 폐하?”
“넌 왜 오헬의 옆에 있는 거지? 용은 인간에게 관심 없잖아.”
“물론이죠. 인간 남자는 더더욱 취미 없는걸요.”
“…….”
“하지만 뭐……. 오헬은 남동생 같으니까요. 예외라고 해 두죠.”
낄낄 웃으며 밀로가 집무실을 나간 뒤에야 노아는 소파에 제 머리를 깊게 기댔다. 골치 아픈 일만 쌓여 가는 기분이었다.
*
“안 돼. 돌아가.”
“싫어.”
“돌아가라고 했잖아. 말 들어.”
“널 두고 어떻게 가!”
바락 소리를 내지르는 주드 때문에 이엘은 제 한쪽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는 이엘을 흘끗 쳐다보며 주드가 슬그머니 커다란 꼬리를 내려뜨렸다. 로브의 후드를 벗은 이엘이 까치발을 들어 늑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늑대의 얼굴을 쓰다듬자, 주드가 눈을 감으며 인간의 손길을 느꼈다.
“미안해. 하지만 위험해서 안 돼, 주드.”
“내가 너보다 강해.”
“…….”
“봐. 이만큼이나 컸단 말이야.”
확실히 며칠 새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긴 했다. 특히 열 살 꼬마의 모습이었던 인간의 모습은 어느새 열다섯 정도로 성장해서 이엘과 비슷한 나이가 됐다. 그만큼 주드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강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엘은 위험한 일에 늑대를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드는 특별한 존재였다.
“이건 힘이 세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어째서……,”
“네가 끼어들면 내가 폐하를 뵐 면목이 없어져. 더는 여기서 머물 수가 없어진다고.”
“그럼 너도 가지 마!”
“애초에 너를 처음 만났던 그 암시장을 없애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어. 그게 씨를 뿌려서 지금 이렇게 사방으로 퍼진 거라고.”
“그게 왜 네 탓이야? 너는 그냥 네 동족을 감싼 거잖아.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내 탓이지. 내가 폐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전부 내 탓이야. 내 잘못이야, 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