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오헬, 안녕! 폐하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쓰게 되었어. 너에게 꼭 전하고 싶다고 하니까 대신 써 주신다고 하셨거든. 알다시피 나는 테르라서 글을 쓸 수가 없어. 읽을 수도 없고…….
아무튼 오헬,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음,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오헬. 나는 네가 너무 고맙고 좋아서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나를 살려 줘서 고마워. 나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 이름을 불러 줘서 너무 고마워.
아, 참. 이빨은 고칠 수가 없대. 그래서 너를 봐도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안타깝지?
그래서 내가 글을 배워 볼까 해! 물론 너는 비웃을 거지? 어떻게 테르 주제에 글을 써?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배울 거야. 너를 다시 만날 때 나는 바닥에 글씨를 써서라도 너와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발톱으로 땅을 긁으면 쓸 수 있지 않을까?
고마워, 오헬. 그때 무서운 곳에서 나를 모른 척하지 않고 내 편이 되어 줘서 고마워. 오헬……. 다음에 우리 영지로 오면 우리 가족들이 널 초대하고 싶대. 우리 폐하도 네게 고맙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오헬, 다음에도 놀러 와! 알았지?」
정갈한 글씨와 어울리지 않게 천진난만한 내용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동시에 마음이 찌릿찌릿 아팠다. 같은 인간인 나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엘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편지를 손에 쥔 이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노아는 협탁에 놓여 있던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손수건을 쥔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인간은 너희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구나.
“이들의 왕이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는군.”
“네?”
“네가 훔쳐 간 빨간 장미의 종자. 눈감아 주겠다고 답변이 왔다.”
노아가 흔드는 편지를 보며 이엘은 울다가 웃어 버렸다. 다행이네요. 저 이제 정말 죄지은 게 없습니다, 폐하. 농담을 던지는 이엘의 머리를 노아가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커다란 손이 위로하듯 여러 번 그녀를 달랬다.
“폐하. 서신을 가져온 아이가 오헬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안드로를 돌아본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갔던 안드로가 누군가를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서 밖을 쳐다보던 이엘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꼬마 심복, 로였다.
“늑대들의 왕을 뵙습니다. 또한 폐하의 전령이셨던 오헬 님을 뵙습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자리를 비켜 주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노아와 안드로가 문을 닫고 나간 것을 확인한 로는 펄쩍펄쩍 뛰며 노아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흥분한 눈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감사합니다, 오헬 님! 엘타를 구하셨지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말씀 낮추세요! 불편합니다.”
“그럼 로 님도 제게 말씀 낮추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 폐하께서 오헬 님께 극진한 인사를 드리라 명하셨거든요. 그런데 도리어 제가 이렇게 공대를 받고 있으면 큰일 난답니다. 부디 말씀을 놓으세요.”
로의 조잘거림은 오랜만이었다. 빙긋 웃은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타의 건강은 어때? 이빨은 어떻게…….”
“상처는 다 아물었어요. 이빨은 뽑혔지만 여전히 밝게 살고 있습니다.”
“…….”
“엘타의 아버지가 특히 오헬 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니야. 감사 인사를 받을 처지가 아닌걸. 나도 같은 인간이야. 인간 때문에 엘타가 고통당했는데 내가 어떻게 인사를 받아.”
“아니요. 오헬 님은 늑대의 보호를 받고 계신 늑대의 무리시잖아요.”
“…….”
“태생이 중요한 게 아닌걸요. 저희 폐하께서 그러셨어요. 피가 중요한 게 아니라구요.”
“그렇구나.”
“저도 여기저기 피가 섞였거든요!”
피가 섞여? 되묻는 이엘을 향해 로가 의기양양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본체화를 했다. 성체에 비하면 여전히 작았지만 테르에 비하면 커다란 덩치였다.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한 모습이었다. 짧은 갈기가 달린 걸 보면 영락없는 사자의 모습이었지만 몸통엔 줄무늬가……,
“저는 타이곤이거든요.”
“뭐……?”
“저희 폐하처럼요. 우리는 피가 섞였지만 같은 종족입니다. 폐하께서는 사자와 호랑이, 그리고 타이곤과 라이거를 모두 이끄시는 대단하신 분이세요.”
“…….”
“서로 다른 종이지만 분명한 한 백성이에요. 우리 폐하께서 그러셨습니다.”
“…….”
“그러니까 오헬 님은 그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에요. 이제는 늑대의 무리라구요.”
신이 난 로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명랑하게 웃는 로를 보며 이엘은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찾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타이곤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제 갈기 어때요? 갈기가 난 타이곤은 많지 않거든요. 사실 타이곤 자체가 드물긴 하죠.”
“…….”
“놀라셨어요? 오헬 님?”
……나는 결국 이온 너를 살릴 수 없을 거야.
“멋진 갈기네…….”
“네! 하지만 저희 폐하의 것은 훨씬 더 멋져요. 저보다 더 크고 길거든요.”
“…….”
“그리고 치유 능력도 뛰어나죠.”
주절주절 떠드는 로의 목소리가 어느새 귀에서 사라졌다. 이엘은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삼켰다. 나는 결국 내가 필요한 모든 종족을 만났던 거야. 늑대도, 독수리도, 타이곤도……. 원한다면 여기서 숨통을 끊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온.
하지만…….
“그러니까 오헬 님. 쾌차하시면 저희 영지에 또 한 번 오세요.”
“…….”
“그때는 폐하께서 직접 성으로 모신다고 하셨습니다.”
“…….”
“폐하께서 오헬 님을 기꺼이 만나시겠다고 하셨다구요!”
하지만 이온. 나는 너를 살려 낼 수 없을 거야. 바보같이 곁을 내준 건 새끼들이 아니라 나였거든. 정을 줘 버린 건 사실 나였던 거야.
*
“그러고 보니 이번엔 우리 쪽에서 열기로 했었나?”
“예, 폐하. 어떻게 할까요?”
“…….”
“로빈 님도 오실 텐데요.”
문제는 로빈이었다. 레온의 편지대로 로빈은 정말 온 대륙을 들쑤시며 이엘을 찾는 것에 열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뱀들이 끈질긴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집착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그들은 연구에 필사적이었다. 노아는 머리가 아픈 건지 펜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황실이 있던 때부터 주기적으로 열렸던 귀족회의는 왕권으로 바뀐 이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물론 그때완 달리 모든 왕이 참석하지 않는다. 황실이 사라지고 귀족이 왕권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는 서로 먹이를 두고 경쟁을 하는 관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로 참여하지 못하는 종족도 있었는데, 그 예 중 하나가 하이에나였다.
“안드로. 이번엔 하이에나들에게도 연락을 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왕이 없어서 여태 보류했던 것이 아닙니까?”
“오헬을 데리고 오던 길에 왕자를 만났어.”
“하이에나 말씀이십니까? 누구를……,”
“패티스. 아마도 넷째였던 걸로 기억해.”
“…….”
“물론 레온은 좀 반대를 하겠지만 말이야.”
워낙 상성이 맞지 않으니 마주쳤을 때 서로 달려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안드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정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는 늑대들의 주관으로 열리기 때문에 열리는 장소 역시 이곳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럼 오헬을 잠시 다른 곳에 보내는 건 어떠십니까?”
“믿고 보낼 곳이라곤 레온의 영지뿐이야. 하지만 거기도 지금 로빈이 주시하고 있어서 힘들어.”
“그러면 냄새만이라도 숨기시는 건.”
“아니. 로빈은 이미 눈치채고 있어. 며칠 전 독수리가 소탕한 암시장에 뒤늦게 뱀들이 끼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
“겉으로는 제 백성들 챙기는 척하면서 거기서 오헬의 냄새를 맡은 거야. 그리고 늑대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도 확신한 거지.”
그래서 우호 관계인 레온의 영지를 넘보았던 것이다. 하여간 이런 쪽으로 머리는 비상하다고. 노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뱀들은 왕권을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의 연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이종족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참석하겠다고?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다. 로빈은 종족회의를 핑계로 영지에서 이엘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소를 옮기는 건 어떨까요? 마침 하이에나가 새로 참석하기로 했으니 그들의 영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안 된다. 갑자기 장소를 바꾼다고 하면 오히려 로빈은 냄새를 맡을 거야. 바꿀 순 없어.”
“…….”
“그리고 하이에나는 안 돼. 아직 믿을 수 없기도 하고.”
“그렇군요. 셋째 왕자님의 소문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쪽 집안은 사정이 그 어디보다도 안 좋으니 괜히 엮이면 골치 아파. 일단 이 안건은 고민해 보자. 안드로, 이번에 참석할 종족들을 파악해서 정리해 와. 나는 잠깐 머리 좀 식혀야겠어.”
안드로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마친 뒤 집무실을 나갔다. 노아는 문득 며칠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로빈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인간의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는 것 같은데, 노아.’
‘인간이 있으니까.’
‘아니. 내가 말하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알 텐데.’
‘…….’
‘노아. 정말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성전에 머무는 자는 신의 축복을 받은 대리자야. 그들의 냄새는 인간과 다르지.’
‘…….’
‘그리고 밖에서 일하는 푸른 머리. 걔가 인간 같아? 넌 인간의 냄새라고 생각해, 그 냄새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보다시피 성격이 온화하지 않아.’
‘…….’
‘빼앗긴 건 조만간 찾으러 올 테니까 간수 잘하고 있어.’
노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창밖에는 온실 천장이 되어 줄 돔을 만들고 있는 이엘과 밀로가 있었다. 그 옆에서 옥신각신하며 밀로에게 시비를 거는 주드와 어린 늑대들도 보였다.
이엘은 깔깔 웃다가 제 옆으로 다가오는 로날드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의 사건이 있고 난 뒤로 새끼 늑대들은 이엘을 부쩍 따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녀의 곁에서 한시도 떠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다.
노아의 시선은 그녀를 떠나 푸른 머리의 밀로에게 닿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선 알 수 없는 냄새가 났다. 이종족이라기엔 맡아 본 적이 없는 냄새였고, 인간이라기엔 그 냄새가 너무 강렬했다. 만나 본 적이 없는 종족인 걸까? 그게 아니면 정말 인간?
창문을 검지로 두드리며 그들을 한참 주시했다. 우논만큼이나 거대한 힘으로 건축을 시작한 밀로의 뒤를 따르며 이엘이 열심히 돔을 구상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돔 천장을 먼저 만들고 온실을 가꾸는 게 맞는 순서였지만, 노아가 정원의 회생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고 말았다. 덕분에 열기와 한기로부터 땅을 일구느라 이엘이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노아가 손짓을 했다. 화롯가에 불을 쬐고 있던 늑대 한 마리가 슬금슬금 일어나 노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밀로를 데려와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