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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1화 (41/488)
  • 41화

    살아 있는 건 안 돼. 눈알을 뽑을 수 없어……. 눈알이 뽑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새끼 독수리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피를 뚝뚝 흘리며 철창에 머리를 박고 있는 그 모습이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내 손으로 뽑지 않았다고 내가 죽이지 않는 게 아닌걸. 돌고 돌아 내 손으로 들어온다면, 결국 내가 독수리를 죽인 셈이다. 이엘은 암시장을 전전하며 독수리의 눈알을 구할 자신이 없었다.

    안 된다.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두 손 안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아 버렸다.

    땅 아래에 있을 땐 그들과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힘을 길렀다. 마주쳤을 때 바로 숨통을 끊고 기름과 눈알과 갈기를 얻어 가기 위해.

    하지만 이엘은 이게 왜 그토록 어려운 과제였는지 알게 됐다. 그녀는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숨통을 끊고 그들의 것을 뺏을 수 없다.

    “오드. 나 좀 도와줘. 네가 나 좀 대신해서 도와줘. 응?”

    “엘. 나는 그들에게 해를 가할 수 없어.”

    왜 오드가 할 수 없다고 누누이 말했는지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이온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전부 그들에게 ‘해’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뺏어 얻어야만 하는 것들. 그래서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오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땅 위에서 구한 재료로 네 오라비는 살릴 수 있으니, 그렇게 하렴. 그편이 내겐 더 재밌거든.’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게 ‘그’에겐 즐거움을, 나에겐 고통을 주는 과제였구나. 그걸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우선 진정하는 게 좋겠어, 나의 엘. 조금만 쉬자.”

    그녀를 침대에 완전히 눕혔다. 이엘은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시선을 홱 돌려 창가에 둔 화분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노아에게서 받은 작은 꽃봉오리가 아직 열리지 않은 채 화분 안에 심겨져 있었다.

    ‘네가 한 것에 대한 보답이고 답례다.’

    내가 한 것에 대한 보답과 답례…….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것이다. 이엘은 불안한 눈동자로 한참이나 꽃을 바라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오드는 그녀의 곁에 한참 머물렀다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오드는 계단을 오르던 노아와 마주쳤다. 오헬은? 노아의 물음에 괜찮다고 답했지만 노아는 여전히 이엘이 머물고 있는 방 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오드는 허리를 살짝 숙여 공손히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너희 종족은 분명 멸족하지 않았던가?”

    “맞습니다, 폐하. 그렇습니다.”

    “그럼 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종족의 마지막이냐.”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오헬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바꿔치기로 숨겨 주었습니다.”

    “…….”

    “그때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거든요. 병에 걸려 죽은 어린아이의 시체와 바꿔치기로 살아남았습니다.”

    인간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났던 종족이었다. 그들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인간들은 종내에는 신의 노염을 불러일으킬 짓을 저질렀다. 그들을 죄 묶어 이종족의 밥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종족들은 나자르인들을 죽일 수 없어 황제의 명령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테르들을 시켜 그들을 먹어 치우게 하고, 그 새끼 테르들마저 다 죽여 버렸다. 그는 극악무도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너는 너의 종족을 멸절시킨 인간들을 용서했나.”

    “용서는 제 몫이 아닙니다. 폐하, 그 모든 것은 신께서 하실 일입니다.”

    “…….”

    “순교한 자들은 모두 신의 곁으로 갔습니다. 그러니 제가 용서하고 말 게 없습니다.”

    오드가 영지로 들어온 뒤로 성전이 더 맑아졌다. 성전의 주인이 온 것처럼 공기가 정화되었고 밝아졌다. 주드와 같은 어린 우논들은 앞다투어 오르간을 치겠다며 아우성이었다. 어둡고 축축했던 늑대들의 땅에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으로 신의 시선이 닿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폐하께서는 좋은 백성을 두셨습니다.”

    오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는 좋은 무리이다. 공작이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단단하게 서로 뭉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신중하셔야 합니다.”

    “간언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너희들의 지혜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면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곧 사라질 겁니다. 그때 폐하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네. 제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으시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

    “지금처럼 새끼 하나라도 아끼는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십시오. 보복은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부디 용서와 감내를 배우십시오. 그러면 폐하는 잃는 것 하나 없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래. 고맙구나.”

    “네, 폐하. 큰 것을 보신다면 폐하의 나라는 분명 태평성대 할 것입니다.”

    이 상황에 어떻게 태평성대가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특하고 예지력이 좋다는 종족에게서 듣는 축복이 나쁘진 않았다. 노아에게 인사를 마친 오드는 성을 완전히 나갔다.

    노아는 이엘이 머물고 있는 방문을 두드리려다 혹 자고 있을까, 문고리를 조심히 잡고 돌렸다. 열어 둔 창문으로 맞부딪친 바람이 샹들리에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선 노아의 시야 끝에 화분이 걸렸다. 아직 봉오리가 피지는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톡 터질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나가 죽고 난 뒤 이 축축한 땅에 꽃 따위는 영영 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관리를 못했던 모양이군. 그는 탁자에 놓인 의자를 끌어 침대 가까이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노아가 이엘을 발견하고 데려와 눕힌 곳도 이곳이었다. 그때는 르네와의 충격적인 이야기로 제대로 이엘을 살피지 못했던 것 같다.

    문득 당시에 다리를 절고 있던 이엘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덮고 있는 이불을 들춰내고 소년의 옷을 걷어 올렸다. 앙상하게 말라 있는 다리에는 온갖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린 테르들이 사냥을 다녀와서 달고 오는 상처와 다를 게 없었다.

    “폐, 폐하?!”

    소스라치게 놀라는 목소리와 함께 이불이 황급히 다리를 감쌌다. 놀란 이엘은 당황한 몸을 일으켜 이불 안에 제 다리를 감추었다. 어떻게 노아가 여기에……. 설마 내 몸을 보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당황함에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는 것을 본 노아가 손을 흔들어 그녀를 안정시켰다.

    “미안. 내가 무례했군.”

    “아, 아닙니다……. 어, 어떻게 여기에……,”

    “괜찮은지 확인하러 잠시 들렀어.”

    감사합니다……. 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별다른 말이 없는 걸로 보아 정체가 탄로 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겨우 안도의 숨을 돌렸다. 여자라는 게 밝혀지는 날엔 모든 게 끝이었다.

    한편 안심하는 이엘의 표정을 보니 노아는 괜히 민망하고 미안해졌다. 저도 모르게 늑대들 대하듯 이엘을 대했다. 인간은 늘 세심함이 필요한 동물이었는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엘은 여전히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에 괜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아도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이전에 이곳에 이엘을 데려왔던 날, 분명 소년의 발바닥이 폭신하고 말랑말랑했었는데. 조금 전에 그가 보았던 이엘의 발바닥은 여느 인간들처럼 적당히 딱딱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때는 왜 그렇게 발바닥에 힘이 없었던 걸까? 마치 걸어 본 적 없는 것처럼.

    노아가 그녀의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엘이 잔뜩 움츠린 채 흠칫 놀랐지만 노아의 손은 그저 이불을 들고 제대로 덮어 줄 뿐이었다. 감사하다는 말만 하는 이엘을 쳐다보던 노아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두 사람이 머물고 있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누구냐.”

    “폐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서신?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들어온 안드로는 노아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레온에게서 도착한 편지였다. 그 근방에 있던 마을을 전부 소탕해 버렸다는 소식과 여러 정치적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그중 로빈이 레온의 영지 쪽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엘은 물끄러미 노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한참이나 편지를 읽고 있던 노아가 문득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이엘에게로 눈을 돌렸다. 노아는 갖고 있던 편지 중 하나를 말없이 이엘에게 건넸다. 그녀의 앞으로 온 편지였다.

    이엘은 노아로부터 받은 편지를 열어 읽어 내려가다가 끝에 가서는 눈가가 축축해졌다.

    엘타로부터 온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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