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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40화 (40/488)
  • 40화

    “궁금하죠.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요. 그렇지만 가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니까요.”

    이엘은 물끄러미 정원 한가운데를 응시하며 웃었다. 그렇게 정성을 주고 가꾸니 꽃봉오리가 필락 말락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정성으로 일구어 낸 결과였다. 모든 생명체는 은혜를 베풀면 그에 합당한 결과로 돌아온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네가 주드를 구한 곳이 밀매장이었다고.”

    “…….”

    “그때 말했더라면 며칠 전과 같은 일은……,”

    “없었겠죠.”

    “…….”

    “그리고 인간들은 다 죽었을 거고.”

    이엘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썩은 종족이라고 해도 저에겐 동족입니다.”

    “…….”

    “동족의 수치와 더러움을 감추고 싶은 건 마찬가지예요, 폐하.”

    “…….”

    “하지만 역시 인간들은 안 되나 봐요.”

    베풀어 준 은혜를 알지 못하고 더 큰 우를 범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받은 은혜에 좋은 결과로 답을 하는 게 아니었다. 신의 축복에 감사할 줄 모르고 감히 신의 권능에까지 도전하려고 했던 인간들은 받은 은혜를 악으로 갚아 버렸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렇게 서로를 죽고 죽이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남겨 둔 신의 뜻을, 정말 모르겠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이 세계를 박살 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이엘은 제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젠가 나도 이 손에 누군가의 피를 묻히는 날이 올까? 이유만 다르고 방식은 같다면, 내게 저들을 탓할 권리가 있을까?

    애초에 선황의 자식인 내가, 인간을 혐오하고 이종족을 배척하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일까.

    “……폐하. 이제 저를 온전히 신뢰하십니까?”

    “물론.”

    그의 답은 단호하고 빨랐다.

    “겨우 주드와 로날드를 살렸을 뿐인데도요?”

    “…….”

    “제 아비가 황실 연구원이라고 했었지요.”

    “…….”

    “제 아비가 저지른 죄로 인해 폐하를 비롯하여 모든 종족이 암컷을 잃었습니다. 그 멍청한 실험 때문에요. 그런데도 폐하는 저를 신뢰하십니까? 수많은 늑대들을 잃고, 겨우 두 마리만 살린 인간을요?”

    노아의 대답이 궁금했다. 노아는 물끄러미 이엘의 작은 얼굴을 내려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장갑을 벗겼다. 아직도 그날의 화상이 손등에 남아 있었다. 완성도가 떨어진 총의 탄피가 그녀의 손등과 몸 곳곳에 튀었다. 화상 자국을 바라보던 노아가 갑자기 커다란 늑대로 변해 버렸다.

    그러고는 이엘의 곁으로 더 다가와 혀로 그녀의 상처를 핥아 냈다. 노아가 핥을수록 열감이 느껴지던 상처가 느리지만 낫기 시작했다. 오드의 성력으로도 줄곧 남아 있던 상처였다. 신기하게도 늑대의 얼음이, 총이 만든 화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네가 살린 건 단 두 마리가 아냐, 오헬.”

    “…….”

    “네 행동으로 인해 독수리들도, 늑대들도 다음의 실수를 면했지. 우리가 다시 인간을 죽이지 않도록, 네가 막았어. 그리고 수많은 새끼들을 네가 지켜 낸 거야.”

    사실 전 한 것도 없는데요. 이엘이 말했다.

    그녀가 정신이 들고 나서 들은 얘기로는, 갑자기 천장이 무너졌던 이유가 밖에서 대기하던 독수리들이 습격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때 독수리가 습격하지 않았더라면 이엘이 로날드와 엘타를 비롯한 다른 새끼들을 구출할 방법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숫자로도 한참이나 밀렸고 빼앗은 리볼버로는 수십의 남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까.

    정원지기의 손이 엉망이군. 혀를 찬 노아의 목소리에 이엘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당당하게 제 일원으로 넣어 준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설령 네가 우리를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

    “그 전까지는 너는 우리의 가족이다, 오헬.”

    “…….”

    “늑대는 가족애가 다른 종족에 비해 우수하다. 그것만큼은 너희 인간하고 비슷해.”

    “…….”

    “네 아비가 우리에게 한 짓이 걱정이냐?”

    “네.”

    “그렇다면 우리가 네 아비에게 한 짓은?”

    “…….”

    “결국 먹고 먹히는 관계일 뿐이야. 우리는 그런 것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아. 눈앞에 있는 진실이 중요하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노아가 저벅저벅 정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허리를 접어 주저앉더니, 땅을 파고 아직 피지 않은 장미들 중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다시 이엘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의문에 차 있는 이엘에게 노아는 기꺼이 장미를 내밀었다.

    “네가 한 것에 대한 보답이고 답례다.”

    “…….”

    “그러니 걱정 말고 누려도 좋아.”

    이 씨앗을 얻은 것 또한 너야. 정원을 가꾸고 꽃을 피운 것도 너다. 노아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장미를 받아 들고 금방이라도 울먹거릴 것 같은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흙과 장미 냄새로 뒤엉킨 정원지기의 머리카락에서 아주 좋은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노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내일부터는 성 안으로 들어와 식사하도록 해라.”

    “네?”

    “네 식솔을 전부 데리고 와도 좋아.”

    “…….”

    “지금 있는 곳은 좁지 않나?”

    그의 말에 이엘이 머뭇거리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부러 힘차게 답하는 이엘의 맑은 얼굴을 보며 노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

    “폐하. 정말 같이 드실 겁니까……?”

    앤디의 떨떠름한 물음에 노아가 눈을 감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 어젯밤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감정적으로 변하는 만월의 밤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런 소릴 한 거지. 노아는 저가 벌인 쓸데없는 일 때문에 아침부터 곤욕을 겪어야 했다.

    “공작 각하. 왜 고기는 없어?”

    “네 눈앞에 있는 건 그럼 풀떼기냐?”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밀로의 추태에 이엘은 제 머리를 짚었다. 옆에 서 있는 앤디에게 대체 이 작은 토끼 고기는 누구 코에 붙이냐며 성화를 부리는 밀로를 외면해 버렸다.

    기다란 테이블의 상석과 끝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 노아와 이엘은 식사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드는 아침에 예배드리러 온 어린 늑대들과 식사를 하겠다며 성전에 남았다. 차라리 거기에 밀로도 두고 올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노아는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인간 두 명을 응시했다. 밀로라는 자는 제 옆에 서 있는 우논 늑대들과도 벌써 친분을 쌓은 건지 식사 내내 쉴 틈 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반면 이엘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온전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식사에 집중하고 있다기보다 지나칠 정도로 식사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오헬.”

    보다 못한 노아가 그녀를 불렀다.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린 것에 놀랐던 건지, 이엘이 들고 있던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끄럽게 웃으며 떠들던 밀로도 순간 들려온 날카로운 소리에 입을 다물고 놀란 표정으로 이엘을 쳐다보았다.

    앤디가 허리를 접어 나이프를 대신 주워 주려고 했지만 이엘이 훨씬 더 빨랐다.

    황급히 바닥으로 내려간 이엘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떨어진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오헬? 왜 그러냐?”

    앤디가 그녀를 불렀지만 이엘은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식사만큼은 잘 마치고 싶었다. 로빈의 성에서도 여유로운 척하느라 고생했지만 잘 견디지 않았던가. 노아의 성에서도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랐는데. 트라우마처럼 짙게 남은 황궁 시절이 떠올라 갑자기 헛구역질이 몰려왔다.

    “괜찮아?”

    바닥으로 내려온 밀로가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를 빼앗았다. 창백하게 변한 이엘을 부축하며 일어선 밀로는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린 채로 다이닝 룸을 나가 버렸다.

    아직 덜 나았나 봐……. 웅성거리는 늑대들의 입을, 손을 들어 닫아 버렸다. 노아는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식탁에 홀로 앉아 주인 잃은 두 접시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사색이 된 채 식은땀을 흘리다가 밀로의 품에 기대며 안정을 찾던 이엘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안드로.”

    “네, 폐하.”

    “성 안에 빈방을 정리해서 오헬에게 내주도록.”

    “네? 성 안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나가서 방 안으로 안내해. 그리고 앤디는 당장 성전으로 가서 오드를 데려와라.”

    “예, 폐하.”

    안드로는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위해 스테이크를 썰던 노아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치워라.”

    “네? 더 안 드십니까?”

    “생각 없어.”

    이상하게 입맛이 싹 사라졌다.

    *

    “괜찮아, 정말.”

    “좀 쉬는 게 좋겠어. 폐하께서도 완전히 나을 때까지 안에서 쉬라고 하셨고.”

    “오드. 나 정말 괜찮대도. 그냥 체해서 그런 거야.”

    “…….”

    “오드. 너까지 유난 부리지 마. 지금 내가 여기서 이렇게 호의호식할 때가 아니잖아.”

    오드가 안타까운 눈으로 이엘을 쳐다봤다. 분명 그에게 한 말이지만 그녀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호의호식할 때야? 이엘은 그렇게 스스로를 질책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한시라도 빨리 늑대의 기름을 얻어야 할 텐데.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오드.”

    “응, 나의 엘. 말하렴.”

    “우선은 독수리를 찾는 게 낫겠어. 독수리의 눈알을 먼저 구하고, 타이곤의 갈기를 구하는 거야.”

    “…….”

    “늑대는…… 늑대는 조금만 미룰래. 그래도 되지?”

    “물론이야, 엘. 모든 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두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의 얼굴엔 더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독수리의 눈알? 그런데 그건 또 어디서 구하지? 구하는 방법이 어려워서 답답한 게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 로날드를 구하기 위해 암시장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목격한 게 무엇이었던가. 바로 새끼 독수리들이 산 채로 붙잡혀 눈알이 뽑히는 현장이었다. 암시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사고파는 것 중에 하나가 독수리의 눈알이다.

    독수리의 눈알은 온도에 따라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적당한 온도만 맞추면 사람의 눈알과 비슷한 크기도 가능했다. 아주 예전엔 그것을 이용하여 죽은 독수리의 눈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행위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살아 있는 독수리들을 납치해 눈알을 뽑아서,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이 이식을 해 버린 것이다.

    단지 더 좋은 시력을 갖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2차 종족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독수리의 눈알만큼 값비싼 보석도 없었다. 그 귀하다는 황금도 독수리의 눈알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밀매꾼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끼 독수리를 납치해 눈알을 뽑았던 거지.

    늑대의 기름과는 달리 암시장에만 가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게 독수리의 눈알이었다.

    “죽어 있는 독수리를 어떻게 구하지…….”

    “엘.”

    “어디서 죽어 있는 사체를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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