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왜 그때 주드가 이엘을 그렇게까지 변호하며 나섰던 건지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상처 입고 쓰러진 늑대를 구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늑대들이 노아의 눈치를 보며 불안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오드에게 데려가.”
우선 그녀의 치료가 먼저였다. 재빨리 늑대로 변한 앤디의 등 위에 이엘을 태웠다. 노아는 앤디가 오드에게 달려간 것을 확인하고는 르네를 쳐다봤다. 잠깐 들어와. 그의 말에 르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로 장소를 옮긴 두 사람 앞에 찻잔이 놓였다. 르네는 새삼 성 안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냄새에 눈썹을 위로 틀었다. 며칠 전에 왔을 때완 상이한 분위기였다. 그땐 눅눅하고 음습한 늑대들의 냄새밖에 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온기 비슷한 것들이 느껴진다. 거기다 미미하게 여러 냄새가 섞여 있다. 아까 그 인간 소년 외에도 인간이 몇 있는 것처럼.
“르네. 거기 말고 또 알아낸 곳이 있어?”
“아직. 찾는 중이다.”
“찾는 대로 말해.”
“어떻게 할 거야, 노아?”
“…….”
“인간은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 우리에게 뺏긴 총까지 다시 만들어 냈더군.”
“…….”
“머리가 너무 똑똑하지.”
하나둘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 판이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다. 그들의 뛰어난 두뇌는 신께 받은 선물이니, 감히 따라잡을 수 없겠지. 아무리 신께 도로 빼앗겼다고 해도 그 부분은 저희보다 나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우린 이곳을 떠날 예정이니 인간들의 처사는 아무래도 좋다.”
“…….”
“하지만 역시 복수는 하고 싶거든.”
눈알이 뽑혀 식용으로 사라져 버린 새끼들을 대체 누가 보상한단 말인가. 우리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인간에게 먹혀 죽길 바란 적은 없다.
르네 역시 언제나 노아와 같은 입장이었다. 인간을 말살시키는 것에 반대했으며, 특히 인간 여자를 모조리 죽여 버렸던 그 사건을 막지 못한 것에 항상 후회했다. 무엇보다 제 종족이 그 일에 가담했던 모습을 보고 가장 크게 절망했던 건 르네였다.
그렇게 늘 차분하고 이성을 잃지 않던 독수리가, 답지 않게 화가 난 모습에 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냄새를 잘 맡는 우리를 피하기 위해 땅을 파고 개미들이 있던 개미집의 냄새를 이용했구나. 겁도 없이 우논을 납치하고 그것도 모자라 새끼 테르들까지 납치를 해? 거기다 같은 인간인 오헬마저 그렇게 만들었다고. 노아도 르네 못지않게 끓어오르는 분노는 어쩔 수 없었다.
개선의 여지가 보여서 남겨 둔 게 아니었다. 모두 씨를 말려 버리자는 다른 종족들의 반대를 사면서까지 노아와 르네가 그들을 노예로 둔 이유는…….
“우리 곁에 있던 그 좋은 자들은 이제 없어, 노아.”
“…….”
“남은 인간들은 쓰레기들밖에 없다고.”
그래도 지내온 세월이 길었다. 함께 무언가를 한 세월이, 두 종족은 길었다. 과거에 갖고 있던 작위가 높다는 건 그만큼 인간과 교류가 깊다는 증거였다. 늑대와 독수리는 모두 공작 가문이었다. 그들만큼 인간과 가까운 종족도 없었다.
깊은 추억이 모든 걸 망쳐 버린 걸까. 아니면 모든 것이 깊은 추억을 망쳐 버린 걸까.
“그래도 오헬이 있잖아요.”
옆에 서 있던 주드가 끼어들었다.
“오헬 같은 인간도 있잖아요.”
“…….”
“인간이 다 나쁜 건 아니에요.”
내가 만난 인간은 오헬이 전부예요. 그래서 난 인간이 좋단 말이에요. 어느새 어린 주드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앤디가 인상을 구기며 주드를 끌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응접실엔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르네였다.
“그러고 보니 저 인간은 대체 뭐지? 그때 봤던 그 인간 맞는 것 같은데.”
“우리 무리에 의탁하고 있는 인간.”
“무리에 넣어 주었다고? 왜?”
“주드를 살려 주었으니까.”
정말 은혜 갚는 늑대답다. 르네는 헛웃음을 들이켜며 차를 마셨다.
드물게 인간들 중에서도 이유 없이 선행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주드라는 우논을 구하고 이번엔 다른 종족들까지 구출한 저 인간 소년처럼.
르네의 눈앞에 이엘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소년은 성인 남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호랑이와 늑대를 보호했다. 그 작은 등이 누구를 닮은 것 같아, 르네는 차의 향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애써 상념을 지우며 다시 입을 뗐다.
“근데 거기 잡혀 있던 호랑이랑도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호랑이도 있었어?!”
“어. 이빨이 다 빠진 새끼 호랑이였어.”
젠장. 레온이 나서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였다. 대체 그 미친 인간들은 저희가 벌인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알고나 한 것일까. 노아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이마를 꾹 눌렀다.
레온은 제 종족에게나 다정하고 유순한 왕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엮이면 앞뒤 가리지 않는 왕이 되고 만다. 게다가 새끼를 가두고 이빨까지 뽑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말 인간의 씨가 마를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이걸로 내 동족을 구해 준 인간에 대한 내 답례는 끝이다. 나는 인간과 더 엮이기 싫어.”
“알겠어. 고맙다.”
“그럼 이만.”
“르네. 인간이 우리 무리에 머무는 건 비밀로 해 줄 수 있나?”
“얼마든지. 근데 왜?”
“로빈이 찾고 있거든.”
“저 인간을?”
“어. 자세한 건 말 못해.”
“알겠어. 또 암시장을 찾아내면 연락하겠다.”
“고맙다.”
르네는 노아와 인사를 마치곤 성을 빠져나왔다. 성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그는 조금 전 저가 데려왔던 그 인간의 냄새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커다란 성전이었다. 르네의 영지에도 있는 성전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성전 앞에서 인간의 냄새가 났다. 다른 종족의 성지에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가는 건 금기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르네는 주변에 늑대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성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성전 문은 열려 있었다. 하얀 시트 위에 누워 있는 인간 소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호리호리한 남자도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손을 모으고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또 다른 푸른 머리의 남자가 소년의 손을 잡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남자가 한참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하얀 기운이 그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와 소년을 감쌌다.
나자르…….
사라졌던 종족이 왜 여기에? 외관이 평범한 이 성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 나자르가 머문다면, 정말 신의 비호를 받는 성지가 될 테니.
성력이 발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소년의 호흡이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노아는 대체 왜 저 종족들을 숨기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런데 그 순간 르네는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소년의 얼굴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
역시나 먼저 난동이 일어난 곳은 레온의 영지였다. 이틀이 지난 새벽에 수많은 우논들이 뛰쳐나가 탄광지에서 일을 하고 있던 인간들을 죽여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원인을 잘 모르던 다른 종족들은 이때를 틈타 레온의 무능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우논들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레온은 일부러 그들을 방관한 것이다. 그저 복수를 위해.
노아는 창문 너머, 제 시선 끝에 걸린 성전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늘 아침도 성전에 잠시 들러 기도를 마친 노아는 이엘의 상태를 지켜보고 돌아왔다. 크게 다친 건 아니기 때문에 금세 눈을 떴지만 무언가 상심한 것처럼 말을 통 하지 않았다.
‘실어증?’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싶습니다만, 충격이 큰 것 같습니다.’
오드의 말에 노아가 미간을 구겼다. 이엘은 하얀 낯으로 꾸벅 인사를 하며 정원으로 갈 뿐이었다.
그녀 곁에 몰려들었던 새끼 늑대들도 더는 장난을 치지 못했다. 원래도 말이 많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젠 입술도 좀체 떼질 않는다. 어린 늑대들, 특히 그날 잡혀 갔던 로날드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기운 없이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루나의 정원은 이엘의 정성으로 이제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만히 정원을 바라보던 노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러고는 빠르게 성을 벗어나 정원을 향해 달려갔다.
전에도 꽃이 한 송이 피어 있기는 했지만…….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원 한가운데, 흐릿한 달빛이 집중된 곳에 붉은색 장미 봉오리가 봉긋 솟아오른 게 보였다. 어림잡아도 스무 송이 이상이었다.
드디어 꽃이 핀 것이다.
“폐하?”
노아가 시선을 올렸다. 손에 장갑을 끼고 삽을 들고 있던 이엘이 한 손을 가슴에 대고 노아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곤 다시 기운 없이 정원을 일구기 시작했다.
“매일 밤, 이렇게 나와 있었던 건가?”
“네. 눈을 떼면 안 되니까요.”
“…….”
“조만간 꽃이 필 겁니다. 그러면 예쁜 정원이 될 거예요.”
“몸은 좀 괜찮아?”
노아의 물음에 이엘이 작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엘은 들고 있던 삽을 내려놓고 바로 옆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노아는 내심 안도했다. 기운은 없어 보여도 처음 눈을 떴을 때처럼 공허해 보이진 않아서.
“주드와 새끼들이 널 걱정하고 있어.”
“…….”
“그들에게 화가 난 건가?”
“그럴 리가요. 제가 애들한테 화를 왜 내겠어요.”
다만.
“정을 주지 않으려고요.”
“…….”
“성체들이랑은 다르게 새끼들은 곁을 잘 주네요.”
“…….”
“바보같이.”
그녀는 또 이빨이 죄 빠져 버린 엘타가 생각이 났다. 바보 같은 호랑이……. 이빨 빠진 채로 제 이름을 부르짖는 그 새끼 호랑이 생각에 밤마다 마음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엘타가 힘겹게 부른 이름은 그녀의 진짜 이름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죄악감이 들었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순간,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이엘은 땅 아래에서 줄곧, 자신이 인간임을 저주했다. 힘없고 나약하고 가진 것 없는 주제에 모든 걸 망쳐 버린 인간을 혐오했다. 하지만 땅 위로 올라오고 나서 그들 또한 같은 피해자임을 깨달았다. 모든 죄는 황실과 기득권자들이 지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백성들은 그저 전쟁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저가 한순간 가엽다고 여겼던 그 인간들은 이엘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그런 세계라는 것을.
인간이 인간을, 인간이 이종족을, 이종족이 인간을, 이종족이 이종족을.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종족을 죽이는 그런 끔찍한 약육강식의 세계. 멍청하게도 그걸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호랑이의 영지에 다녀와도 좋아.”
“…….”
“그때 네가 구한 호랑이의 안부가 궁금한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