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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8화 (38/488)
  • 38화

    턱수염이 비열하게 웃었다. 황녀의 반지와 달리 황자의 반지는 황권의 옥새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걸 갖고 있는 것만으로 황위를 보장받는 것과 다름없었던 반지였다. 황녀의 반지를 손에 넣은 턱수염의 만족을 위해선 그만한 건 없겠지.

    그렇다고 정말 이온의 반지를 넘겨줄 수는 없다. 이엘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밖에는 주드와 어린 늑대 개체들밖에 없다. 큰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이엘은 노아를 비롯한 성체들에게 말하지 않고 새끼들과 함께 왔다. 방심한 틈을 타 잡혀 간 늑대만을 구출해 낼 계획이었다.

    원래 암시장에서는 단순한 밀매품들만 거래했었으니까. 이렇게 대대적으로 이종족을 팔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상황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리고 제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을 들키면, 노아는 가차 없이 인간들을 공격할 것이다. 그게 어찌 노아뿐일까? 다른 이종족들도 분개하며 관련 없던 인간들마저 학살하겠지.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지금 이대로 달려들면 안 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머리를 굴렸다. 주드와 어린 개체들은 능력이 발현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다수로 붙었다가는 총에 맞고 죽을 것이다. 하나를 구하려다 모두를 잃게 된다.

    그렇게 총구를 서로에게 겨눈 채 한참이나 대치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파드드득―

    거대한 날개가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개의 눈알이 남아 있던 독수리 하나가 르네를 발견한 것이다. 저를 구하러 온 왕을 보고 흥분한 독수리가 쇠창살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를 시작으로 쇠창살에 갇힌 이종족들이 일제히 발버둥을 쳤다.

    르네는 새끼 독수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손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신호에 땅이 일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코 얕지 않았을 텐데도 거대한 독수리들의 날갯짓과 발 구름에 속절없이 땅이 무너졌다.

    “으아악!”

    “아악!”

    “꺄아악!”

    갑작스레 대지가 흔들리며 무너지자, 모여 있던 인간들이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천장이 뚫리며 들이닥친 독수리들이 도망치는 인간들을 낚아채 하늘 높은 곳까지 물고 올라가서 바닥에 패대기친 것이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르네는 이엘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엘은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에도 개의치 않고, 우수수 떨어지는 돌덩이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며 떨어진 총들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잠겨 있는 쇠창살의 자물쇠 부분에 총을 발사하며 부수기 시작했다.

    위에서 떨어지는 돌덩이에 맞아 이엘의 이마가 찢어졌다. 엘타가 안타까움에 울었지만 그녀는 쇠창살을 부수는 것에만 집중했다. 생각보다 이종족들을 가둬 놓은 창살들이 많아서 부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이엘은 수십 발의 총을 쏘며 쇠창살을 모조리 다 박살 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빠져나온 이종족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일대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을 쏘는 것에도 엄청난 힘이 필요했다. 무거운 장총을 들기도 하고 튕겨 나온 탄피에 맞기도 하면서 온몸이 엉망이었다. 게다가 급조해 만든 것인지 총이 죄다 불량품이었다. 쏠 때마다 쏘는 사람에게도 흔적을 남겨 버린 것이다.

    결국 마지막 쇠창살까지 박살 내고 이엘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난리 통에 모두가 도망치고 엘타와 새끼 늑대만이 남았다. 엘타가 울면서 혀로 그녀를 핥았고 새끼 늑대는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에― 오에에―”

    이가 다 뽑혀서 그녀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엘타 때문에 이엘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아― 엘타……. 짧게 엘타의 이름을 부른 이엘은 의식을 잃고 눈을 감아 버렸다.

    순간 바닥이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떨어지는 돌덩이와 흙더미의 양이 많아지자, 바닥에 쓰러진 이엘을 데려가기 위해 새끼 늑대는 서둘러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르네가 더 빨랐다. 엄청난 크기의 독수리로 돌아온 르네가 이엘을 발로 낚아챈 것이다. 놀란 새끼 늑대가 소리를 질렀다.

    “살려 주세요! 오헬은 우리 친구예요! 우리를 살리려고 했어요! 놔주세요!”

    “오에에―!”

    새끼 늑대와 호랑이가 울부짖는 것을 지켜보며 르네가 입을 열었다.

    “노아에게 데려다주겠다. 걱정 말고 너희도 도망쳐.”

    그렇게 하늘로 사라져 버린 독수리를 쳐다보던 엘타가 훌쩍거리며 빠르게 땅 위를 향해 달렸다. 새끼 늑대도 땅 위로 올라갔다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친구들을 발견하고는 그 무리에 합류했다. 늑대의 뒤를 한참이나 살피던 주드가 다급하게 물었다.

    “오헬은?!”

    “독수리가 데려갔어.”

    “뭐?!”

    “폐하께 데려다준다고 했어. 걱정 말라고.”

    “…….”

    “어서 가자! 오헬이 걱정이야!”

    땅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랐던 늑대들은 울고 있는 제 친구를 달래며 서둘러 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독수리입니다!”

    “르네 님이 직접 오고 계십니다!”

    경비병의 말에 집무를 보고 있던 노아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또 웬 독수리? 그는 빠르게 성을 내려왔다.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오는 게 눈에 보였다. 적어도 다른 종족의 영지로 들어올 땐 인간의 모습으로 성문을 두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게 일반이었다. 게다가 르네는 그런 면에서는 무례함이 전혀 없었고. 그답지 않게 독수리의 모습으로 다른 종족의 영공을 날아들고 있었다.

    제각각 노아의 처사를 기다리고 있던 늑대들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하울링에 귀를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울음소리로 대답을 했고 몇몇 우논은 황급히 성문을 들어 올렸다. 멀리 우거진 숲에서부터 어린 늑대들이 하울링을 하며 일제히 뛰어오고 있었다.

    노아는 순간적으로 르네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폐하! 오헬입니다!”

    앤디가 손가락으로 르네를 가리켰다. 앤디의 말대로 르네의 발에 인간이 들려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르네가 엄청난 속도로 활강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는 잔디 위에 이엘을 내려놓고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르네. 대체 이게 무슨……!”

    “암시장이 열리는 건 알고 있었나?”

    “뭐?”

    “네 영지의 경계, 개미집이 있던 터전에 밀매꾼들이 장을 열었더군.”

    늑대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울음소리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노아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사이 새끼 늑대들도 성문 안으로 뛰어 들어와 노아와 늑대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주드는 황급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엘을 품에 안았다. 주드의 옆에 있던 새끼 테르 하나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무슨 일이냐.”

    “로날드가 인간에게 납치됐었어요!”

    “로날드가 죽을 뻔했어요!”

    “오헬이 날 살려 줬어요!”

    제각각 떠들기 바빴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새끼 늑대 로날드가 엉엉 울며 혀로 이엘을 핥기 시작했다. 오헬! 로날드는 발갛게 변해 버린 이엘의 손바닥을 핥았다. 몸에 맞지도 않는 총들을 쥐며 총알을 쏴 대느라 그녀의 손바닥은 엉망이었다.

    노아는 새끼 늑대들을 물러나게 하고 이엘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포갰다. 노아의 손에서부터 차가운 한기가 뻗어 나와 화상을 입은 그녀의 손바닥을 식혀 주었다. 그제야 노아는 이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에 그을려 엉망이 된 옷은 물론이고 구타를 당한 것처럼 퉁퉁 부은 얼굴에 살갗이 찢어져 줄줄 흐르는 피까지.

    “……그럼 이게 인간들 짓이라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분위기만큼이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우리 쪽 새끼 테르들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

    “결국 정찰을 내보냈지. 그리고 땅 아래 숨어 있던 암시장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겁도 없이 밀매를 하고 있더군.”

    역시 인간들은 미친놈들이었다. 노아는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려 했지만 어느새 주변의 지면이 살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분을 삼키려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정신없이 정무를 보는 새에 늑대들도 새끼들을 잃을 뻔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왕이란 자가 이 얼마나 무능한가. 주먹을 쥔 손에 빠드득 힘이 들어갔다.

    “습격을 하기 직전에 네가 성에 데려왔던 이 인간을 보게 됐다.”

    “…….”

    “너랑도 관련이 있나 싶어서 아래로 숨어 들어갔어. 그리고 이 인간이 우리 독수리와 너희 늑대, 뿐만 아니라 남아 있던 모든 이종족들을 구해 주었다.”

    로날드가 그 대목에서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납치돼서 꼼짝없이 죽나 싶었다. 그런데 이엘이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 주었다. 그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로날드도 이빨이 뽑히기 직전이었다. 이엘 덕분에 로날드는 큰 상처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작은 인간 소년이 저를 구해 준 것이다.

    노아는 정신을 잃은 이엘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엉망인 얼굴엔 핏기가 전혀 없었다. 제 목숨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는 인간 주제에 이종족들을 구하러 나섰다고. 인간이란 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종족인데, 늑대를 구하기 위해 저렇게 다쳤다고…….

    기분이 이상하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낼 수가 없다. 뱀으로부터 지켜 달라며 무리로 들어왔으면 그냥 몸이나 사릴 것이지, 왜 쓸데없이 나서서 이 꼴이 된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지만…… 오헬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에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인간 소년이 정말 제 무리의 새끼라도 된 것처럼.

    “도망친 놈들은 전부 우리가 먹었다.”

    “…….”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어. 놈들은 지금도 지하에서 암시장을 열고 있다.”

    “죄송합니다, 폐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앤디에게 밀려났던 주드가 손을 들며 앞으로 나왔다. 노아의 검은 눈동자가 주드를 향했다. 주드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예전에, 저도 밀매꾼들에게 잡힌 적이 있습니다.”

    주드의 말에 늑대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새끼 테르도 아닌 새끼 우논을 잡아가? 종족에서 최상위 계층인 우논을 겁도 없이……! 죽여야 합니다, 폐하! 소리를 지르는 늑대들에게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제지했다.

    주드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노아를 쳐다보았다가 바닥에 누워 있는 이엘을 보았다. 소년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때 오헬이 구해 주었어요…….”

    “…….”

    “갖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저를 구해 준 거예요, 그날.”

    “…….”

    “처음 본 저를 구해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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