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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7화 (37/488)
  • 37화

    르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울분에 눈을 감고 말았다.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밀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을 소탕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계획대로 떠날 것인가.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는 자들은 오직 독수리들뿐이었지만 이 일은 동맹에 가까운 늑대들이나 사자, 호랑이들에게 정보를 넘기고 손을 떼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르네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테르들 때문이었다. 개체 수가 줄기 시작한 이종족들은 제 무리 안에 있는 작은 새끼들이라도 행동반경 안에서 사라지면 예민하게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왕권을 핑계로 넓지 않은 영지에 무리가 엉켜 살게 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그게 개체 수를 파악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종족은 인간과 달라서 아무리 집단적 습성을 가진 종족이라 할지라도 그 개체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굴며 보호하려 들지 않는다. 애초에 사냥 같은 이유 때문에라도 완전한 보호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어느 날부터 독수리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직도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나?”

    “예, 그렇습니다.”

    “그럼 눈이 파인 개체는 어떻게 되었지?”

    “아마도 식용으로…….”

    독수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 소리가 나며 르네가 짚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박살이 났다. 왕의 커다란 분노에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모여든 독수리들은 하나같이 울음을 삼켜 냈다. 전쟁이 있기 전에는 더 비일비재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10년 전, 인간들이 거의 죽고 남아 있는 놈들을 노예로 전락시킨 이래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어린 새끼들을 노렸다는 건가? 죽어 가는 마당에 또 한 번 비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르네는 손을 들어 제 뒤로 모든 독수리들을 집결시켰다. 언제라도 그의 손짓에 땅을 파고들어 모조리 소탕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사체를 먹는 쪽을 더 즐겼지만 오늘만큼은 살아 있는 채로 갈기갈기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

    르네는 붉은 눈동자로 땅을 더 깊게 바라보았다. 중심지가 되는 곳을 찾기 위해 살펴보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잠깐 대기하도록.”

    “네?”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르네는 가볍게 절벽을 뛰어내려 눈으로 봐 두었던 암시장의 입구로 향했다. 분명 그 인간이다. 노아의 성에서 보았던 그때 그…….

    암시장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끄럽게 소란이 일어난 상태였다. 덕분에 입구에서 별 제재 없이 통과해 들어간 르네는 인파를 뚫고 그 인간을 찾기 위해 달렸다. 소란이 일어난 곳도 그 인간이 있는 곳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코로 익숙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확실해. 새끼 테르들이다.

    “네놈 뭐냐? 이제는 독수리야?!”

    “아직 새끼잖습니까. 풀어 주시죠.”

    “하? 이 새끼가 한 번 봐줬다고 아예 기어오르네?”

    빼빼 마른 남자가 검지로 이엘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남자의 등 뒤에 서 있던 턱수염은 파이프를 입에 물며 담배만 뻑뻑 피워 댈 뿐이었다.

    이엘이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새끼 늑대가 잡혔기 때문에.

    이엘은 보채는 새끼들과 함께 사냥을 나선 참이었다. 주드처럼 우논도 있었지만 대부분 테르들이었다. 아무리 늑대라 해도 새끼 테르들은 다른 맹수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므로 성체들도 걱정을 하다가 마지못해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새끼들을 살폈다.

    그러던 중 하나가 시야에서 사라져, 그를 찾으러 갔던 이엘이 그곳에서 턱수염 일당과 다시 한 번 마주친 것이다. 사라졌던 새끼는 남자들 앞에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저자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밀매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보란 듯이 새끼 테르를 줄로 결박하기 시작했다.

    턱수염은 이엘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이엘은 반갑게 인사해 줄 마음 따위 없었다. 늑대를 풀어 주라는 이엘의 요구에도 턱수염과 일당은 제멋대로였다. 막무가내로 거대한 수레에 테르를 태운 것이다. 결국 주드의 등을 타고 이엘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끔찍하고 더러운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여긴 더 이상 단순한 시장이 아니었다.

    “죽어, 이 새끼야!”

    “눈깔을 다 파버려!”

    “더러운 새끼들! 냄새나는 것들! 감히 더러운 이종족 주제에 우리를 이렇게 노예로 만들어?”

    “다 죽여 버려!”

    온갖 이종족들의 새끼를 납치해 와, 끔찍할 정도의 고문과 핍박으로 괴롭혔다. 새끼 독수리들은 날개가 부러졌고 눈알이 죄다 파헤쳐 있었다. 어떤 독수리는 부리가 통째로 뽑혀 있었다.

    그냥 복수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단순한 오락에 불과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엘은 잡혀 온 새끼 테르들을 살펴보다가 익숙한 동물을 발견했다.

    “엘타……?”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호랑이 하나가 힘겹게 눈을 떴다. 흘러내리는 핏물 사이로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던 새끼 호랑이가 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곤 그 탁해진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엘은 온몸이 떨려 왔다. 레온의 영지에서 봤던 그 어린 호랑이들 중 하나였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며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그 새끼 호랑이.

    “엘타!”

    쇠창살을 거세게 두드리며 이엘이 달려들자 주변에 있던 인간들이 몰려들어 이엘을 막았다. 그러곤 꼼짝 못 하게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발길질로 구타를 이어 갔다. 하지만 이엘은 아랑곳 않고 그들을 밀쳐 내며 쇠창살을 부술 것처럼 흔들어 댔다. 엘타! 엘타!! 그녀의 외침에 호랑이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엘타의 이빨이 죄다 뽑혀 있었다. 뭉개진 발음으로 구슬픈 울음소리만 터져 나왔다. 이엘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누가 가슴을 후벼 파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쯤 해라, 꼬마야. 봐주는 데도 정도가 있어.”

    턱수염이 그제야 파이프를 내던지고 앞으로 다가왔다. 증오로 가득 찬 이엘의 눈동자가 턱수염에게 닿았다. 그녀는 제 주변에 있던 남자 중 하나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그가 들고 있던 리볼버를 빼앗아 턱수염에게 겨냥했다.

    “허허, 쏘겠다고?”

    줄곧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르네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 날카롭게 빛났다. 이제 주변에 몰린 모두가 소년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전쟁 이후 총은 모두 빼앗아 버렸는데……. 멀리서 지켜보던 르네는 대체 저 어마어마한 수의 총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풀어 주세요.”

    “꼬마야. 지금 네가 이종족을 걱정하고 있는 게냐?”

    “…….”

    “네가 그때 우논 늑대를 구했다고 아주 정의감에 사로잡혔나 보구나?”

    “…….”

    “보아하니 그 덕에 늑대랑 같이 사나 본데. 아주 한심하구나. 개새끼들에게 아양 떨면서 목숨을 연명하면 좋더냐?”

    턱수염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아니. 그전보다 더 기세가 좋았다.

    반면 이엘은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사위 분간도 어려운 상태였다. 이쪽도 처음부터 이렇게 막무가내로 몰아칠 계획은 아니었다. 어차피 저들을 막을 수 없으니 사로잡힌 새끼 늑대만 구출해서 도망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허사가 됐다.

    엘타 때문에.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잊었나? 우린 원래 이런 자들이다. 원래부터 우린 이렇게 돈을 벌었다고.”

    “새끼잖아요. 힘없는 새끼라고요.”

    “아이고. 우리 꼬마가 제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구나. 이봐, 너도 힘없는 인간인 건 마찬가지야.”

    “…….”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 때문에 모든 걸 뺏겨 버린 인간이고.”

    엘타가 낑낑거렸다. 그 소리에 이엘은 숨도 못 쉴 만큼 가슴이 따끔거렸다.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새끼를 외면할 만큼 이엘은 단호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엘타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암시장이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턱수염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밀매장을 벗어나면 유린당하는 쪽은 인간이었다.

    이곳은 먹고 먹히는 세계. 약하면 먹혀 죽는 게 당연한 곳이었다. 먹이사슬에 따라 약한 개체가 죽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러니까 이 암시장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며 이곳에 모인 사람들 역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이런 건 아니야……. 이런 건 인간이고 이종족이고…… 누구도 당해선 안 되는 일이다.

    르네는 인간 소년의 분노가 제게까지 미치는 것을 느꼈다. 인간 소년은 피를 흘리고 있는 이종족들의 새끼들을 등지고 총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소년은 자꾸만 제 등 뒤에 있는 호랑이와 늑대를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그 순간 르네는 제게도 잠깐 있었던, 그 옛날의 인간 친구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끌려가던 제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던 그 인간 친구들이.

    “……어떻게 하면 풀어 주실 건가요?”

    “왜. 이제 황자의 반지라도 줄 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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