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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6화 (36/488)

36화

“아, 아니……. 저는 수영을 못하는데…….”

“괜찮으니까 와.”

들어가고 싶었던 거 아냐? 그의 물음에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만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뛰어들고 싶었던 건 맞다. 하지만 노아의 말처럼 수영도 못하는데 무슨.

주저하는 이엘을 힐끔 쳐다보던 늑대가 그녀를 향해 몸을 털었다. 갑자기 후드득 떨어지는 물줄기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이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은 늑대는 덩치에 맞지 않게 고개를 기우뚱하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그 늑대 왕이 맞는지 의심이 간다.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하다가도 웃겨서, 결국 이엘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물을 세차게 털어 내는 늑대 때문에 이엘은 웅덩이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폭포만큼이나 물이 차가웠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깊고 투명한지, 안에 있는 물고기들이 저를 쳐다보는 게 다 보일 정도였다. 여전히 주저하는 이엘의 다리를 늑대의 꼬리가 감쌌다. 질질 끌려오듯 들어와 버렸지만 수영을 못하는 탓에 꼬로록 거품을 내며 풍덩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노아가 재빨리 그녀를 제 등에 태운 것이다.

막혔던 숨을 토해 내며 떨리는 손으로 노아의 등을 꼭 잡았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헉헉거리기 바쁜 이엘은 자신이 타고 있는 늑대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넓은 웅덩이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노아를 따라 이엘도 조심스레 손을 물에 넣어 휘저었다.

“개헤엄이네요?”

갑자기 웃음이 터진 이엘의 말에 노아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절벽을 구경하던 때처럼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여전히 물에 빠질까 노아의 털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지만 그녀의 웃음소리가 온 산에 메아리쳤다.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음울해 보이던 얼굴에 저런 웃음소리가 나올 수도 있었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밀로라는 놈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그거였지. 우리 오헬 웃을 때 예뻐 죽어요! 물론 늑대들은 죄다 미친 소리라고 치부했다.

늑대들은 종 특성상 수영을 잘하는 반면 인간들은 그렇지 못한 놈들도 수두룩했다. 날 때부터 목만 동동 뜨는 놈들도 있었고 물 자체를 두려워하는 놈들도 있었다. 황실기사단으로 일하던 때에도 다른 기사단 놈들 중에 수영을 못해서 늑대들에게 배우러 오던 자들도 꽤 많았다.

갑자기 떠오른 그때의 기억에 노아는 언짢아졌다. 인간과의 추억은 쓸데없는 사념을 불러오기 때문에 되도록 떠올리기 싫었다.

그랬는데……. 제 등 위에 올라탄 인간으로 인해 기분이 묘하게 이상해진다.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인간과 함께하는 여유였다.

*

다시 며칠을 달려 겨우 늑대들의 영지에 가까워졌다. 처음과는 달리 노아는 빨리 달리지도 않았고 자정을 지날 때쯤엔 어김없이 걸음을 멈추고 야영을 했다. 덕분에 감기로 인해 고생하던 이엘의 몸도 차차 회복할 수 있었다. 그의 배려에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자신의 권역 안으로 들어와 거대한 숲에 다가갈 즈음부터 노아는 계속해서 코를 찡긋거렸다. 미세하게 이상한 냄새가 섞여 제 코로 들어왔다. 분명 제 등 위에 타 있는 이엘로부터 퍼진 냄새였다. 씻지 못해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였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정체 모를 냄새 때문에 노아는 온몸이 간지러웠다. 결국 숲을 바로 코앞에 두고 노아는 그녀를 내려 주곤 인간으로 돌아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요.”

“너, 아까 뭘 먹은 거지?”

“아침에요? 폐하께서 주신 열매 몇 개 먹었습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면서도 본능적으로 이엘의 옆에서 떨어지기 싫었다. 노아는 이 비슷한 냄새를 예전에 맡아 본 적이 있다. 분명 알고 있던 냄샌데……. 괴로워하는 노아를 쳐다보던 이엘이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치떴다. 그러고는 놀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재빨리 노아에게서 물러났다.

……약효가 떨어진 거야.

서둘러 마지막 약을 먹은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는지 세어 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예정보다 일정이 늦어졌다. 앤디를 타고 갔던 기간보다 돌아오는 기간이 더 길었던 것이다. 불어난 개울 탓에 돌아가기도 했고, 아픈 자신 때문에 속도가 더디기도 했다. 이엘은 아둔한 제 머리를 탓하며 노아에게서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니 다른 것도 먹었습니다. 폐하께서 사냥하러 자리를 비우셨을 때 근처 나무들에게서 열매를 받았거든요.”

“…….”

“냄새가 좀 역하죠? 죄송합니다, 폐하.”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에 취한 인간들처럼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정신이 몽롱했다. 아무래도 늑대로 있으면 예민한 후각 때문에 더 괴로울 것 같았다. 결국 노아는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엘은 한참이나 그의 뒤에서 따라가며 어떻게든 냄새를 없애 보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건 몸에서 나오는 냄새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아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늑대들이 성문을 열고 서둘러 달려 나왔다.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노아의 모습을 반기던 늑대들은 그 뒤를 따라오는 이엘을 발견했다. 왜 떨어져서 오는지 궁금해하던 늑대들이 일순 제 코를 찡긋거렸다.

갑자기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늑대들 때문에 이엘은 곤란해졌다. 들키는 건 차치하고 이런 식으로는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폐하.”

“그래.”

저 멀리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달려 나왔다. 공손하게 노아를 향해 인사를 마친 오드는 서둘러 뒤에 따라오는 이엘에게 달려갔다. 이엘이 오드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오드는 늑대들을 등지고 보이지 않게 약병을 건넸다.

“빨리 마셔, 엘.”

“고마워, 오드.”

흥분한 늑대들의 울음소리에 오드도 놀란 눈치였다. 오드에게서 받은 약병을 열고 몸을 숙인 채 서둘러 약을 마셨다.

여전히 썼지만 지금만큼은 달았다. 약을 먹자마자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이상한 냄새가 싹 사라졌다. 발까지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지르던 늑대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노아는 제 코를 괴롭히던 정체불명의 냄새가 사라진 걸 느꼈다. 고개를 돌려 이엘을 쳐다봤으나 이엘은 오드와 정답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선 그 어떤 이상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나쁜 냄새가 사라지니 다시 정신이 또렷하게 맑아졌다. 가만히 이엘을 쳐다보던 노아는 저를 안내하는 우논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씨를 받았다고?”

“응. 정확히 말하면 훔쳤어.”

“훔치다니. 오, 나의 엘.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어쩔 수 없지. 그쪽 왕이 만나 주지 않았단 말이야.”

그래도 오드는 이엘이 내심 대견했다. 뒤늦게 이엘이 노아의 명령을 받아 다른 영지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드는 그날부터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다. 임시로 가지고 다니는 약병이 하나뿐이라 염려가 됐던 것이다. 부디 시일 내로 무사히 도착하길 기도할 뿐이었다.

이엘은 오드와 함께 성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늑대들의 터전은 평화로웠다. 호랑이나 사자들을 보고 온 이엘은 이곳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새삼 깨달았다. 저 멀리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주드가 이엘을 발견하곤 재빨리 뛰어오는 게 보였다.

“오헬!”

“주드. 잘 지냈어?”

“너 정말 호랑이와 사자의 굴에 다녀온 거야?!”

“응. 놀랍게도 먹히지 않았어.”

농담을 하는 이엘을 보며 주드가 그녀의 품에 쏙 안겼다. 이엘은 제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어린 소년을 토닥거려 주었다. 걱정했어! 어느새 제게 정을 준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도 저쪽 영지에 머물면서 어린 호랑이와 사자들을 볼 때마다 주드가 생각났다. 이엘이 한참이나 주드를 안아 줄 때쯤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게 곁눈에 걸렸다.

“미르.”

“괜찮아?”

주드를 거칠게 떼어 내고 이엘의 손을 잡은 밀로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라면 히죽히죽 웃으며 주드와 말다툼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정말로 밀로마저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밀로는 이엘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제 품 안으로 이엘을 끌어당겼다. 얼결에 너른 품에 파묻힌 이엘이 당황하든 말든 밀로는 한참이나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야! 오헬이 괴로워하잖아!”

결국 내팽개쳐진 주드가 달려들어 밀로의 등을 때리고 나서야 밀로는 이엘을 놔주었다. 당황한 이엘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밀로는 다시 헤실헤실 웃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헬!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금방이라도 헹가래를 치려는 밀로를 피해 이엘은 오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드가 이곳에 도착해서 머무는 곳은 거대한 성전이었다. 신앙심을 잃은 인간들과는 달리 이종족들은 여전히 신을 향해 예배드리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늑대들의 영지에도 뾰족한 첨탑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성전이 있었다. 오드가 사라진 종족임을 알아챈 노아는 그에게 이 성전을 내주었다. 덕분에 오드는 이곳에서 원하던 대로 성직자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엘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가지런히 제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오드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오드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엘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이곳은 신과 자신만 있는 개인적인 공간이다. 그럼에도 이엘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남기셨습니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또 한참을 침묵하다가 턱을 달달 떨며 어렵게 운을 뗐다.

“제가…… 제가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이에요.”

이온을 살리기 위해 신을 버렸고, 늑대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전부를 위해 전부가 될 것들을 버려야 한다.

“저는 또 벌을 받게 되겠죠.”

연이은 전쟁에도 이 땅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은 것은, 신께서 여전히 땅 위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 더럽고 추악하고 악랄한 세상에도, 신의 자비는 남아 있는데.

내 손으로 그걸 해쳐야 한다니.

“그래서 벌을 받는 걸까요.”

무리가 생겼다. 늘 외로웠던 자신에게 종족도 다르고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무리라는 게 생겼다.

그런데 나는 이 땅을 망치는 걸로도 모자라, 이들의 등에 칼을 꽂아야 한다. 겨우 속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았는데.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어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데.

“이온이 살아나면…….”

분명 이온을 살리기 위해 버리지 못한 생이었다. 이깟 목숨은 붙어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엘은 깨달았다.

자신은 살고 싶었던 것임을.

옷장에서도, 불구덩이 속에서도, 땅굴에서도. 그냥 나는 살고 싶었던 거야…….

목소리가 이온의 목숨값으로 제 생명을 요구했을 때, 이엘은 주저하며 답하지 못했다. 순간의 주저함이 방증한 것이다.

내 목숨은 주지 못하면서 이온도 포기하질 못해서. 그래서 나는 다른 이의 죽음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제 벌인 거겠죠.”

이온을 버리든, 이 땅을 버리든, 그게 아니면 나 자신을 버리든. 무엇인가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그렇게 답을 들은 듯했다.

*

“왕이시여. 어떻게 할까요?”

“…….”

“병력은 충분합니다.”

붉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거대한 독수리 하나가 하늘을 뱅뱅 돌다가 남자의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폐하. 독수리의 부름에도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밀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투시가 가능한 독수리들에게는 허술할 정도로 어이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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