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5화 (35/488)

35화

“옷이 마를 동안 걸치고 있도록 해.”

망토였다. 멀찌감치 제 망토를 내려놓은 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가 알고 있던 그 늑대의 왕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그가 너무 친절해 보인다. 여전히 무표정하고 딱딱했지만 말투가 분명히 풀어졌다. 그 안에 실려 있던 위압감도 사라졌다.

이엘은 대충 제 몸을 닦아 내고 노아의 마른 망토를 몸 위에 걸쳤다. 망토의 주인이 워낙 장신인 덕분에 몸을 죄 가릴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기분이 좋아진 이엘은 제 옷을 쭉 짜서 손에 들고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먹어. 익힌 과일이니까.”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엘은 제 옷을 너른 바위 위에 말려 두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커다란 열매 여러 개가 긴 막대기에 꽂혀 불에 익어 가고 있었다. 노아는 그것들 중 하나를 잡아 이엘에게 건넸다.

“폐하는 안 드십니까?”

“낮에 사냥해서 생각 없어.”

그의 호의를 받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 노아는 말없이 장작불을 더 지폈다. 오랜만에 즐기는 평화 아닌 평화였다. 이엘은 저가 누웠던 자리에 잎사귀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노아가 만들어 준 걸까? 혹시 나는 노아에게 늑대들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건 아닐까?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기름만 얻으면 그녀는 또 이곳을 떠나야 한다. 독수리를 만나야 하고, 타이곤을 만나야 한다. 계속해서 험난한 시간들이 이어질 테고, 정착할 곳은 영영 없을 것이다. 늑대의 기름은 살아 있는 개체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건데……. 닥쳐올 미래의 일 때문에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졌다.

“왜 더 안 먹지?”

“배가 부릅니다. 식사가 너무 오랜만이라…….”

노아는 물끄러미 이엘을 쳐다보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 낮에 만난 그 하이에나 녀석이 마음에 걸렸다.

하이에나는 완전한 모계 사회를 이루는 종족으로 암컷을 잃고 나서는 갖고 있던 모든 신분 계층이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흩어져 버렸고 2차 종족 전쟁 때가 되어서야 함께 모여 싸운 걸로 기억을 하는데…….

문제는 여전히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른 종족들은 각각 왕권과 통치권을 얻어 혈통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하이에나들은 왕의 자리를 계속해서 비워 두고 있었다. 왕이 될 암컷이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패티스는 쌍둥이들 중 넷째로 선대 변경백의 직계였다. 살아 있는 다른 두 형제와 달리 얍삽하고 기회주의적인 면이 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노아도 기억하고 있다.

차기 변경백이 되기 위하여 준비를 하던 첫째 암컷을 잃고 나서 나머지 세쌍둥이는 뿔뿔이 흩어졌다. 10년 전의 2차 전쟁을 기점으로 다시 모여 있기는 해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을 왕자로 부를 뿐, 실질적인 왕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무슨 회의를 해도 그들을 부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오합지졸로 엉성하게 묶여 있는 무리였지만 본래 끈질기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이었다. 특히 직계 자손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엘을 병든 먹이로 인식했다는 것뿐. 하나 점한 먹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하이에나를 상대로 홀로 먹이를 지키는 건 아무리 노아라 해도 힘들었다. 그나마 저쪽도 혼자여서 다행이었지만.

“저, 폐하. 혹시 오드와 밀로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두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특히 밀로라는 이름을 가진 쪽은 먹성도 좋고 힘도 좋아서 부려 먹기엔 최고라며 앤디가 흐뭇해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노아의 예상대로 멸종한 종족이었다. 때때로 오드는 영지 내에서 성력을 사용해 늑대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어. 노아의 말에 인간은 안도했다.

“네가 떠나고 뱀이 다녀갔다.”

“네?”

“로빈이 직접 왔고.”

가슴이 철렁거렸다. 정말 끈질기구나. 잘못 걸려도 제대로 잘못 걸린 모양이다. 늑대들과 달리 뱀과는 깊게 얽히기 싫었다. 게다가 이엘은 뱀을 도와 그 미친 실험을 재개할 마음 따윈 죽어도 없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뱉은 말에 이렇게나 끈질기게 달라붙을 줄이야. 아마도 실험을 완성할 때까지 수배 신세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영지에 네가 없는 걸 확인하고 돌아갔으니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다.”

“그럼 혹시 폐하께선 저를 일부러……,”

“네가 주드를 구해 준 순간부터 우리는 네게 빚을 졌다. 그리고 넌 그 빚에 대한 값으로 너를 보호해 줄 무리가 되어 달라 말했지.”

“…….”

“약속대로 뱀으로부터 늑대들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

“설령 네가 씨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영지에서 쫓아낼 생각은 없었어.”

“아.”

“물론 내게 영원히 신뢰받을 수 없었겠지만.”

문득 땅 아래에서 오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늑대의 기름을 어떻게 구해?’

‘글쎄, 상당히 어려울 거야.’

‘…….’

‘하지만 또 그만큼 쉬울 거란다.’

‘무슨 말이야, 그게.’

‘늑대는 무리를 아끼는 습성이 있어.’

‘…….’

‘무리에 들어가면 돼. 어떻게 해서든 알파―우두머리―의 신뢰만 받으면 돼.’

그러면 알파는 어떻게 해서든 널 보호해 줄 거라고. 신뢰는 방심을 불러오고, 방심은 다른 쪽에겐 기회가 된다. 기름을 얻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훔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주드는 우리 무리 중 가장 어린 개체이고 우논이다.”

“…….”

“번식을 할 수 없게 된 우리는 남아 있는 개체 하나하나가 소중하지. 특히 어린 개체는 더더욱. 어릴수록 사냥당하기 쉬우니까.”

“…….”

“주드를 구했기 때문에 다른 늑대들은 너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 늑대를 구하기 위해 왕인 노아가 직접 여러 우논을 끌고 찾아 나섰던 것이다. 남아 있는 숫자가 중요하고, 어린 개체를 보호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러니 주드가 나서서 이엘을 두둔한 순간부터 모두가 그녀를 인정해야 했다. 알파인 노아마저도 그녀의 요구를 따라야 했다.

“그러니 안심해도 돼.”

정말…… 당신들이 인간보다 나아.

씁쓸한 생각을 했다. 대체 인간이 이들보다 나은 게 뭐였을까? 대체 뭐가 더 나았길래 이들을 마음대로 부려 먹고 괴롭혔던 걸까? 아니, 애당초 이종족과 인간이 뭐가 그렇게 달랐기에.

20년 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도, 이종족들은 반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인간과 함께 살아갈 것을 원했고 인간들의 요구에도 묵묵히 응했다.

인간들은 이들에 비하면 정말 하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이종족과 달리 능력도 없었고, 수적으로도 심히 밀렸으면서 그들을 제 발 아래 깔고 짓밟았다. 그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그들에게서 소중한 것을 영영 앗아 갔다. 가진 거라곤 신의 축복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리석은 판단으로 신의 노염을 불러 빼앗겼고, 결국 멸망했다.

제 가족의 등에도 칼을 꽂는 인간들이 수두룩했다. 이엘 자신도 아비에게 학대당했다. 황녀로 태어났단 이유로 차별당했다. 쌍둥이인 이온은 누릴 수 있는 것을 이엘은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종족은 다르다. 성별이 어떠하든 장애가 있든 없든. 제 무리에 속한 것이라면 가장 낮은 서열의 개체들도 소중히 여겼다. 대체 인간의 어디가 이들보다 낫단 말인가.

“늑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제겐 너무 과분하네요…….”

황궁에서의 시간, 그리고 그만큼 길었던 땅 아래서의 시간. 그 모든 시간 동안 온전히 무리라는 것에 속해 본 적이 없었다. 황족이었으나 황족이 아니었고, 인간이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녀를 무리에 넣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속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엘은 줄곧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혼자가 될 예정이었다.

“저 또한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폐하.”

처음 속한 이 소속감으로 인해 벅차오름과 동시에, 앞으로 또 배신해야 할 미래 때문에 이엘은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도 가족의 등에 칼을 꽂는 인간이었다.

*

입이 절로 벌어지는 절경이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장관에 이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떴다.

황궁에 갇혀 지내던 때에도 보지 못했고, 땅 위로 나와서도 보지 못했다. 오드가 가져다준 책 너머로 보았던 게 전부였다. 조각칼로 깎은 것처럼 세밀하게 잘린 절벽 위에서 시원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주변 소리는 폭포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오롯이 홀로 남은 기분이 들었다.

등 너머로 전해지는 벅찬 심장 소리에 노아는 경로를 바꾸었다. 인간은 마치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신이 난 듯했다. 늑대는 비교적 완만한 절벽을 타고 내려와 중간 즈음에 있는 동굴에 이엘을 내려 주었다. 동굴은 폭포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폭포에 손을 내밀며 신기한 눈빛으로 구경하는 이엘의 뒤로 검은 늑대가 앉았다. 아비가 황실에서 일하던 연구원이라더니 어릴 때도 이런 곳에는 온 적이 없었나. 물기 묻은 몸을 털어 정리한 커다란 늑대가 완전히 바닥에 엎드렸다.

이엘은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이런 걸 보게 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고 해야 할 일은 끔찍하게 많았다.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니 대륙 밖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다는 그 ‘바다’라는 것이 궁금해졌다. 얼마나 넓을까. 얼마나 깊을까. 얼마나 커다란 걸까.

“처음 봐?”

노아의 목소리에 물기에 젖은 앞머리를 털어 낸 이엘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늑대는 동굴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아예 엎드려 누워 있었다. 네. 제도 안에서만 살아서요. 그녀의 목소리에 노아는 흥미를 잃고 눈을 감았다. 이엘은 커다란 늑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폭포가 있는 쪽으로 조금 더 향하기 시작했다.

동굴의 위치는 폭포가 떨어지는 지면으로부터 약 3미터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계곡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웅덩이에 가까운 곳을 내려보았다. 손을 내밀어 폭포수를 만지던 이엘이 아무 생각 없이 더 앞쪽으로 향했다.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바닥은 이끼가 낀 것처럼 미끈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면서도 제 얼굴로 쏟아지는 차가운 물기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으로 향할 때였다.

폭포로 인해 바닥이 일순 사라졌다. 분명 발을 내디뎠는데 닿는 지면이 없었다. 당황한 이엘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폭포에 휩쓸려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가 제 뒷덜미를 홱 낚아챘다.

“폐, 폐하……!”

검은 늑대가 이엘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그는 자세를 바짝 낮춘 채로 그녀를 가볍게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엘은 온몸이 물에 젖은 데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아직도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완전히 끌어 올려 동굴 안에 내려 주었다.

“멍청하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노아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어제처럼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이엘에게 던졌다. 기껏 말려 놓고 또 젖으면 어쩌잔 거냐. 그의 책망에 이엘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의 말이 맞다. 아무리 긴장이 풀렸다고 해도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쩌잔 거야. 꾸중받을 만한 행동에 입을 다물고는 망토를 몸에 걸쳤다.

“수영은 할 줄 알아?”

“……아니요.”

정말 목숨 잃을 뻔했네. 수심이 생각보다 깊어서 저 정도 키면 잠겨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노아는 한심하다는 듯이 이엘을 쳐다보았다. 더 혼을 내고 싶었지만 제 잘못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걸 보니 할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왜 앤디가 주드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지, 어쩐지 이해가 가는 심정이다.

노아는 대충 몸을 말린 이엘에게서 제 망토를 받고는 다시 검은 늑대로 돌아왔다. 그러곤 그녀의 앞에 타라는 듯 몸을 낮췄다. 영문을 모르는 이엘을 태우고 노아는 동굴을 빠져나와 다시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바닥으로 내려온 노아는 이엘을 내려 주고는 깊은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이엘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노아가 무슨 행동을 하나 쳐다만 보고 있었다.

“들어와.”

“네…… 네?!”

“들어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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