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예, 폐하. 인사드립니다. 패티스입니다. 10년 전에 뵌 뒤로, 꽤 오랜만에 뵙는 것 같군요. 저를 기억하고 계셨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네놈들의 주거지가 여기였던가? 변경에 살던 자들이 언제 여기로 옮겼지?”
“아아, 그건 아닙니다. 저희는 여전히 쫓겨나듯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 네 영지도 아닌데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이유가 뭐지? 감히 나와 싸우고 싶다는 건 아닐 테고.”
“설마요. 단지 저는 사냥을 나왔다가 보기 좋은 사냥감이 있길래 덥석! 하려고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폐하의 소유물이니 감히 제가 나설 수는 없겠지요? 게다가 사냥감도 아닌 것 같아 보이니.”
“…….”
“그렇다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종족에 관한 중요 사안에 저희들도 좀 불러 주십시오. 저희가 아무리 왕좌를 비워 놓고 있다고 해도 엄연히 왕족 아니겠습니까? 한때는 작위까지 수여받은 귀족이었는데.”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말에 가시가 담긴 어투였다. 패티스는 다시 한 번 노아를 향해 허리를 숙여 깔끔한 귀족식 인사를 올렸다.
인사를 마친 패티스의 시선이 노아의 뒤편에 닿았다. 뜨거운 열기가 이곳까지 느껴지는 걸 보니 병에 걸린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다른 놈들의 사냥감을 뺏어 먹고 죽은 것도 곧잘 먹는 저들이지만, 패티스는 굳이 병든 것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폐하. 뒤에 있는 인간은 병에 걸린 듯싶습니다. 식사거리라면 버리시는 게 낫겠습니다.”
킥킥 웃음을 터뜨린 패티스는 말을 마치곤 숲 사이로 돌아가 버렸다. 패티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노아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노아는 재빨리 뒤를 돌아 이엘의 상태를 살폈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완전히 열에 들뜬 모습이다.
“오헬. 정신이 드나?”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인 이엘의 이마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열이 내려간 줄 알았는데 간밤에 다시 오른 모양이었다. 손에서 뻗어 나온 한기로 열을 사라지게 하려 했으나 쉽사리 내려가지 않는다. 괜찮다고 중얼거리는 입술 새로 열기가 끊임없이 퍼져 나왔다. 이대로 등에 태워 개울을 건넜다가는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다.
노아는 손을 뻗어 나무들로부터 잎사귀를 잔뜩 받아 냈다. 바닥 위에 그것들을 잔뜩 쌓아 올려 이엘을 그 위에 눕혔다. 다시 정신을 잃은 이엘은 꿈과 현실을 오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 새로 살려 달라는 말이 다시 터져 나왔다.
이 미친 뱀새끼는 대체 인간들에게 무슨 짓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환멸이 나기 시작했다.
― 저기…… 늑대들의 왕이시여.
나무들 중 하나가 노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노아가 나무를 쳐다봤다.
“왜.”
― 감기에 걸린 것 같습니다.
“…….”
― 저희가 안내해 드릴 테니 약초를 먹이시는 게 어떠세요?
감히 인간 따위를 살리겠다고 나더러 약초를 구하라고? 그렇게 성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노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들은 저희끼리 아우성이었다. 아직 인간과 늑대의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왕께서 흔쾌히 나설 줄은 몰랐다.
그렇게 노아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감기와 해열에 좋은 약초를 몇 구했다. 성미에 안 맞게 친절히 약초를 빻아 이엘의 입 안에 집어넣고 물까지 먹여 주었다.
오들오들 떠는 이엘을 가만히 쳐다보던 노아는 금세 늑대로 변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바로 옆에 자세를 낮추고 엎드렸다. 따뜻한 체온으로 이엘의 덜덜 떨리는 몸을 감쌌다. 거대한 꼬리를 움직여 제 옆으로 바싹 끌어당긴 노아는 잠에 빠진 이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인정하게 됐다. 인간에게 유독 약한 자신의 종족들은 이엘을 제 무리로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훔치면서까지 씨앗을 가져온 순간부터, 자신의 무리로 인정하게 돼 버렸다.
그동안엔 필요 없던 정원지기라 할지라도, 지금부터는 그 정원지기가 꼭 필요하게 되었다.
아니. 정원지기의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노아는 앞발 위에 얼굴을 얹고 귀를 움직였다. 인간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 노아도 그 옆에서 눈을 감았다.
*
온몸이 무거웠다. 물에 젖은 솜처럼 기운 없이 축축 늘어졌다. 이엘은 힘겹게 눈꺼풀을 올렸다. 그 끔찍한 악몽을 다시 꾼 건 아닌 듯했다. 잠에서 깬 기분이 전보다 나은 걸 보니.
맑고 푸르던 하늘이 어느새 새까만 색으로 변해 있었다. 얼마나 잠든 거지? 하늘에 뜬 별을 무의식적으로 세던 이엘은 제 옆에서 느껴지는 폭신폭신한 온기에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 설마…….
털이 달린 거대한 생명체가 일정하게 숨을 쉬며 제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마치 밤하늘을 닮은 새카만 색이었다. 다시 이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설마 지금 옆에 있는 게…….
“깼나.”
옆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는 영락없는 노아의 것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이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노아가 내 옆에 있는 걸까. 잠결에 추위를 못 이겨서 내가 들러붙은 건 아닐까? 제 몸 위에 올라가 있던 늑대의 꼬리가 사라졌다. 옆에서 떨어진 노아는 금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홀로 누워 있던 이엘은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폐하. 추위를 못 이겨서…….”
“열은?”
“네?”
“괜찮나?”
말릴 새도 없이 다가온 노아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이엘의 이마를 덮었다. 졸지에 눈까지 덮여 버린 이엘은 갑작스런 노아의 행동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는 해도 노아는 이엘에게 완전한 남자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손길이 닿으면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열이 아직 있는 것 같은데? 노아의 목소리에 두 손바닥을 내밀어 흔들며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노아가 손을 뗐다. 그제야 시야가 열린 이엘과 노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늑대일 땐 그렇게 눈동자가 무서웠는데, 지금은 한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털색처럼 밤하늘을 빼다 박은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이유 없이 부끄러움이 밀려온 이엘이 서둘러 시선을 피하고 그의 손을 쳐 냈다.
“죄,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일정이 밀려서…….”
“됐어. 어차피 그 상태론 그냥 가지도 못하니까.”
“…….”
“…….”
그 뒤론 침묵이 이어졌다.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상황이 풀리고 나니 이제야 제 몰골이 떠오른 이엘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비와 땀으로 젖었다가 마른 옷에서 왠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신경도 안 쓰겠지만 괜히 민망해진 탓에 슬금슬금 노아를 피하던 이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 저…… 잠시만 씻고 와도 될까요?”
“저기서 씻어. 너무 멀리 가면 안 보여.”
“아, 아뇨! 보이지 않는 곳에서 씻고 싶습니다.”
인간들은 뭘 저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다. 노아는 가만히 이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 그의 목소리에 이엘이 힘차게 답하며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어둑한 밤이라 보이지는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노아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먼 곳까지 달렸다.
개울 위를 거슬러 올라간 이엘은 저 멀리 조그맣게 타오르는 불꽃을 쳐다보곤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서둘러 물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소리를 내지르려다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물이 차가워도 너무 차갑다. 윽, 추워……. 달달 떨며 대충 옷을 빨기 시작했다. 가슴을 내리 압박하고 있던 붕대까지 풀어내니 숨통이 트였다.
바위 위에 옷을 대충 올려 두고 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환경이 이어진 탓에 제대로 씻지를 못했다. 오랜만에 하는 샤워로 기분이 좋아진 이엘이 손으로 물장난을 하며 좋은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깜짝 놀란 이엘이 잠수하다시피 물 아래로 몸을 바싹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