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퍽이나 믿음직스럽네. 노아의 말에도 이엘은 피곤함에 뻑뻑해진 눈가를 비빌 뿐,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노아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꾹 눌러 억지로 눕히고 말았다. 얼결에 뒤로 발라당 넘어간 이엘은 눈을 여러 번 감았다가 뜨더니 마지못해 감아 버렸다.
보초를 서겠다는 허세가 우습게도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래도 저를 믿기는 한 모양인지 이 상황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하긴, 거기서 제대로 잠이나 잤을까. 늑대들이랑 다른 종족이니 살 떨리는 밤을 보냈을 것이다. 혀를 차며 장작 몇 개를 불이 핀 곳으로 던졌다.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솟아오른 불을 바라보던 노아가 제 품 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는 붉은 장미 씨앗이 쥐여 있었다.
노아가 레온에게 보낸 편지는 인간 소년을 죽이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는 정원에 어머니가 피웠던 그 꽃들이 보고 싶으면서도 보기 싫었다. 장미를 보면 허무하게 떠나 버린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레온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레온에게도 부모는 노아의 부모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전쟁의 원흉인 인간을 네게 보낸다……. 인간은 우리에게 부모를 앗아 갔다. 하지만 우리도 인간의 부모를 앗아 갔지. 결국 의미 없는 희생만 치렀을 뿐이다. 오히려 더 큰 우를 범한 건 우리들이다. 신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까지 우리는 저질렀기 때문에 이 모든 땅이 망가진 거야.
나도, 너도, 그리고 이 인간도. 모두 꽃을 피울 자격이 없다. 편지는 그런 의미였다.
“훔쳐 왔다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부드럽게 호를 그린 노아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렇다고 훔칠 줄은 몰랐는데. 정말 겁도 없는 인간이다.
물론 늑대들과 달리 그쪽 종족은 종족 특성상 보안이 까다롭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왕이 머무는 성에 잠입하는 게 쉽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하긴 처음 봤을 때도 그 삼엄하다는 뱀의 성을 빠져나가고 있었지.
침입하고 탈출하는 게 적성에 맞는 놈일지도. 노아는 그 생각을 하며, 잠에 빠진 이엘을 가만히 쳐다봤다.
눈을 감고 잠든 모습은 영락없이 선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노아처럼, 정말 아무런 독기도 없고 욕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던 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게 노아는 이엘을 응원하고 있었다.
아니. 응원이라기보다는, 저가 내준 과업을 성공하기를 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배신을 당해 놓고 또 인간을 응원하고 있으니…….
제 영지에 오랜만에 인간의 냄새가 퍼졌을 때. 노아는 달고도 끔찍했던 추억이 떠올라 그리움과 분노로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좋든 싫든, 옛 기억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고통이었다.
그런데 막상 소년을 떠나보내고 인간의 냄새가 사라지자, 남은 것은 지독한 그리움뿐이었다. 고작 10년 지났다고 분노가 이렇게 쉽게 퇴색되어 가다니. 처음부터 작았던 감정인지, 그게 아니면 그리움이 커져 가는 건지.
“……한심하긴.”
그 한심함 때문에 인간이 돌아오길 응원했던 모양이다.
인간은 정말 치졸한 종족이다. 본능보다 앞선 이성으로 태세 전환이 빠르다. 저 자신 외에는 영원한 제 편이 없는 종족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인간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충성을 했을까. 사실은 예전부터 그들의 못된 성정을 알고 있었는데도.
노아는 바닥에 있던 조약돌 하나를 개울을 향해 집어 던졌다. 불어 버린 강물에선 조약돌도 힘없이 가라앉아 버렸다.
“……가지 마…….”
악몽을 꾸는 건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엘은 작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무언가를 잡기 위해 절실하게 몸부림쳤다. 노아는 아무런 감흥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인간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오들오들 떨던 이엘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폐하…….”
갑작스런 부름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살려 주세요…… 폐하…….”
꿈에서마저 내가 저를 괴롭히나 보군. 그동안 노동으로 꽤 지쳐 있긴 했을 터다. 정원 가꾸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돌아가면 휴식을 줘야 하나, 별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폐하…… 무서워요……. 열어 주세요…… 폐하……. 잘못했어요, 폐하…… 옷장을 열어 주세요…….”
옷장에 가둔 적은 없는데……? 노아의 잘생긴 얼굴에 점차 그늘이 짙어졌다. 혹시 레온 녀석이 가둔 거 아냐? 하지만 레온은 인간을 보고 죽이면 죽였지, 가둬 놓는 짓 따윈 하지 않을 놈이었다. 다른 놈도 아니고 레온이? 연구실에 갇혀서 죽도록 실험만 당했던 그 레온이 가뒀다고?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로빈인가. 성 안, 옷장에 가뒀나 보군. 그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노아는 악몽에 시달리는 인간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제 손을 뻗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그녀의 이마 위에 차가운 손을 올렸다. 아주 미미한 한기가 노아의 손을 타고 이엘의 이마로 번졌다.
열이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악몽에서도 벗어나는 것 같았다.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조금씩 펴지는 걸 보면.
“…….”
이상하게도 노아의 시선이 이엘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그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마치 암컷을 발견해 버린 수컷이 된 것처럼. 노아는 이상한 기분으로 한참이나 잠이 든 이엘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
‘……황녀님!’
‘유모! 유모, 문 좀 열어 줘! 유모!’
‘폐, 폐하께서…… 황녀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유모! 나 무서워! 문 열어 줘!’
커다란 옷장 안에 갇힌 이엘은 두려움에 옷장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 드레스를 다 적셔도 멈추지 않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얼마나 거세게 두드렸으면 손바닥이 다 까졌다. 그래도 이엘은 멈추지 않았다. 이 깜깜한 암흑 속에서 제발 나 좀 구해 달라고 울며 빌었다.
그날 어린 이엘이 잘못한 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식사를 하다가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린 게 전부였다. 황후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황궁은 서늘하고 적막만 가득했다. 이엘이 떨어뜨린 나이프가 대리석 위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었다. 황제는 거무스름한 눈으로 이엘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멱살을 잡아챘다.
‘폐, 폐하……!’
‘폐하! 엘을 놔주십시오!’
‘시끄럽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식사 예절을 모르더냐. 쓸모없는 것.’
상스러운 욕설과 함께 황제는 어린 소녀의 멱살을 잡아챈 채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놀란 이엘은 겁에 질려 엉엉 울었고, 같이 식사를 하던 이온은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황제를 말리기 시작했다.
제발 엘을 용서해 주십시오! 소년의 외침에도 황제는 막무가내였다. 제 다리춤에 매달리는 황자를 발로 걷어차고 기어코 만찬실을 벗어나 황녀궁을 향해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모두가 익숙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엉엉 우는 이엘의 멱살을 더 세게 잡아채며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 커다란 옷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동댕이치듯 집어 던졌다.
‘폐하……! 폐하,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어요! 폐하!’
‘폐하! 엘을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황녀는 엉엉 울었고 황자는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시끄럽다며 성질을 부리곤 홀로 식사 자리로 돌아갔다. 남겨진 이온이 옷장 문을 열려고 했지만 시종장이 말렸다.
‘황자님께서 나서시면 황녀님은 더 오래 계셔야 합니다.’
분하게도 그의 간언이 맞다. 이온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옷장 문을 쥐었다가 놓았다.
‘엘. 미안해……. 미안해, 엘.’
‘오빠! 문 좀 열어 줘! 오빠! 나 두고 가지 마! 가지 마!’
‘…….’
‘오빠? 오빠! 이온! 오빠!’
이온이 개입할수록 황제는 더 억지를 부릴 것이다. 이온은 힘없는 제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동생 하나 지켜 주지 못하는 게 무슨 황자란 말인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토록 내게 이엘을 부탁하셨는데…….
이온은 마음을 굳게 먹고 그녀의 침실을 나갔다. 남겨진 이엘은 겁에 질려 흐느끼며 유모를 찾았다. 유모도 별수는 없었다. 그저 옷장 밖에서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달래 주는 게 전부였다.
손이 서툴고 잔뜩 긴장한 탓에 나이프를 떨어뜨렸다고 옷장에 가두는 건 대체 무슨 처사란 말인가. 주워 온 짐승에게도 이렇게 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모의 얼굴이 안쓰러움과 분노로 참담해졌다.
그녀의 어린 날은 늘 이렇게 불우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갈수록 흉포해지는 황제와 더는 저를 돕지 않는 쌍둥이 오빠.
어린 이엘도 이온이 자신을 외면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황제의 눈을 피해 제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오라비의 마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서운하고 씁쓸했다. 자신은 늘 외로웠으니까. 불발되어도 좋으니 한 번쯤은 이온이 아비의 명령에 불복하고 제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 줄 완벽한 미래보다는, 함께할 수 있는 불완전한 현재를 더 원했던 걸지도.
“허억……!”
가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번쩍 떴다. 오랜만에 꾸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이엘은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쉬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온몸이 땀과 빗물로 축축했다.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자 버린 탓에 오한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몸을 일으킨 이엘이 다 타버린 모닥불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다행히 매섭게 내리던 비는 다 멎은 모양이었다. 우거진 가지들 사이로 햇볕이 드문드문 내리쬈다. 달달 떨리는 몸을 잔뜩 웅크린 이엘은 비어 있는 노아의 자리를 확인했다. 배가 고플 테니 아침 일찍 사냥이라도 간 걸까? 아무렴 어때.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이엘은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왜 잊고 싶은 기억은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걸까? 아버지가 죽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제 나는 옷장에 갇힐 일도 없는데……. 아버지는 왜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걸까. 당신의 죄 때문에 나와 이온은 이유도 없이 죽어야만 했는데. 당신의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해 버렸는데.
벌을 받아야 하는 당신은 대체 왜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린 거야.
“깼나?”
제 앞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커다란 잎사귀 안에는 열매가 몇 담겨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이엘은 힘없이 잎사귀를 펼쳐 열매를 집었다. 아직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탓에 시야가 죄 몽롱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입 안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다 먹는 대로 출발한다.”
“네. 알겠습니다.”
주변을 정찰하던 노아가 기운 없는 이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갖다준 것도 먹는 둥 마는 둥, 공허한 눈동자로 개울을 쳐다보는 꼴이 눈에 거슬렸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노아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몰려오는 냄새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노아가 순식간에 늑대로 변했다.
“나와.”
이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리는 모양은 이엘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잔뜩 경계하며 이엘의 앞을 가로막은 노아가 아무것도 없는 숲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나와라. 이엘은 아픈 몸을 추스르고 뒤로 물러났다. 숲 쪽에서 무언가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이런, 이런. 사냥감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긴 회백발을 정갈하게 묶은 남자가 빙긋 웃으며 저벅저벅 다가왔다. 하늘색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리며 등장한 남자는 공손하게 노아를 향하여 허리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늑대들의 왕이시여.”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