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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2화 (32/488)
  • 32화

    정말 저 똥고집. 혀를 찬 레온이 앞머리를 손으로 탈탈 털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내가 주의를 끌게.”

    “네?”

    “아까 들어왔던 그 창틀로 다시 내려가도록 해.”

    “…….”

    “뭐 해? 나갈 준비 해.”

    “저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물어도 될까요?”

    “그 전에 네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게 순서 아냐?”

    “아. 죄송합니다. 저는 오헬이라고 합니다.”

    “레니.”

    “…….”

    “그게 내 이름이야.”

    레온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레니 님. 이상하게도 인간의 목소리에 루나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왜 갑자기 그 애칭이 튀어나온 건지는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불러 줄 사람이 죽은 뒤로는 아무도 그렇게 불러 주지 않았으니까. 레온은 고개를 흔들더니 이엘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네가 만든 새끼줄이다.”

    레온의 손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재가 붉은 불꽃과 함께 다시 처음의 그 새끼줄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새끼줄을 건네주고 레온은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성 안은 어수선했다. 인간이 사라졌다고 난리를 칠 존재라면 오직 란트뿐일 것이다. 그자는 너무 충심이 강해서 문제야. 레온은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손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편 레온 덕에 이엘은 들키지 않고 창고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처음 들어왔던 그 창틀에 줄을 달아 빠르게 타고 내려온 이엘은 또다시 무릎을 감싸고 비틀거렸다.

    역시 늘 착지가 문제다. 뱀의 성에서 뛰어내린 이후로 무릎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정말 후유증이 남을지 모르겠단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성은 영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대로 곧장 달리면 성벽에 다다를 것이다.

    그때 달리던 얼굴 위로 물기가 툭툭 떨어졌다. 눈을 깜빡거리는 새에 물줄기가 심해졌다.

    정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뱀의 성에서 도망칠 때도 비가 내렸는데 여기서도 비가 내리는구나……. 덕분에 제 냄새가 씻겨 내려갈 테니 저 예민한 후각의 이종족을 따돌릴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이대로 제 다리가 얼마나 버텨 줄는지.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몇 번 넘어질 뻔한 것을 겨우 면하고 붉은 성벽에 다다랐다. 다행히 성벽 군데군데에 계단으로 사용하던 벽돌이 있었다. 이엘은 그것들을 밟고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아…….”

    벽을 타고 문루까지 올라온 것은 좋았는데 또다시 내려가는 게 문제였다. 그녀가 만들어 놓은 새끼줄은 이 거대한 담의 높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뱀의 성에서 뛰어내렸던 것처럼 몇 미터를 남겨 놓고 또다시 뛰어내려야 할 판이었다.

    급한 대로 달아 놓은 줄을 붙잡고 발을 떼며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엘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직 내려가야 할 길이 까마득했다. 이번엔 어떻게 해서든 착지를 잘해야 한다. 다리가 부러지면 늑대들의 영지로 돌아갈 수가 없어. 머리를 감싸고 뛰어내릴까? 아니면 이번엔 팔 한쪽을 포기할까?

    줄의 끝자락에서 한참 자세를 고민할 때였다.

    “오헬?”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지금 여기서 왜……? 환청인 걸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기 위해 이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쪽이다.”

    그의 목소리는 제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귀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정말 노아가 서 있었다.

    “뛰어내릴 수 있겠어?”

    비에 섞인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 며칠 무서운 종족들과 지냈다고 늑대가 이렇게나 그리울 수가. 이엘은 축축해지는 눈을 억지로 깜빡이며 줄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확인한 노아는 순식간에 커다란 늑대로 변했다. 검은 늑대가 이엘의 발 바로 아래에 제 등을 댔다. 이엘은 가볍게 그의 등 위로 올라탔다.

    “어떻게 폐하께서……,”

    “씨앗은.”

    “받았습니다.”

    “…….”

    “가져왔어요.”

    훔친 거지만요. 덧붙여진 그녀의 목소리에 노아가 어이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엘을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앤디보다 더 커다란 노아의 등 위에서 이엘은 안정을 찾아갔다.

    그때와 같았다. 뱀의 성에서 나올 때와.

    그때와 똑같이 비가 내렸고, 그때와 똑같이 늑대를 타고 도망을 친다.

    “폐하.”

    “왜.”

    “그럼 저…… 그곳에서 지내도 되는 겁니까?”

    노아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의 의미였다. 이엘은 뛸 듯이 기뻤다. 황궁에서 떠난 이래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힘으로 스스로 머물 곳을 만들었다. 오드의 도움 없이, 이온의 도움 없이 살아남았다. 노아는 제 몸을 타고 느껴지는 인간의 기쁜 기색에도 별말이 없었다.

    거대한 숲을 지나가고부터 쉴 틈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앞으로 일주일은 더 달려야 할 것이다. 이엘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털을 조금 더 세게 잡으며 몸을 바싹 엎드렸다. 저가 끌어안은 곳에서 노아의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렇게 있으니 이 무서운 노아가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폐하. 어째서 폐하께서 오신 겁니까? 앤디 님이 다른 분을 불러 주신다고 하셨는데.”

    “네가 설령 그들에게 먹혀 죽었다고 하더라도 평화협정이 깨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위해 직접 온 거다.”

    역시 내가 먹힐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긴 했군. 살 떨리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겁 없이 행동했던 것치곤 담이 많이 작아진 모양이다. 몇 차례의 위기를 생각하며 이엘은 가쁜 숨을 겨우 돌렸다.

    그녀와 앤디가 떠나고 늑대의 영지로 찾아온 뱀들을 상대하느라 노아는 꽤 지쳐 있었다. 머리가 좋은 로빈과 대화를 할 때면 여러 케이스를 생각해 둬야 했기 때문에 몸과 정신이 배로 피곤했다. 그 덕에 로빈은 끝끝내 늑대들의 틈에서 이엘의 존재를 찾지 못한 채 떠났다.

    노아가 보기엔 이상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정말로 그 연구를 완성시킬 생각인가…….

    노아는 앤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앤디는 제 등에 올라탄 이엘을 한껏 배려했다지만 노아는 한낱 인간보다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자였다. 이엘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그렇게 미친 듯이 내달린 노아도 커다란 개울 앞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했다.

    “물이 범람했네요.”

    노아의 등에서 내려온 이엘은 이젠 강과 맞먹는 수준이 되어 버린 개울을 보며 혀를 찼다. 이대로는 지나갈 수 없을 텐데. 노아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어 냈다.

    “비가 멎을 때까지 잠깐 쉬도록 하지.”

    말을 마친 그는 이엘을 남겨 두고 숲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홀로 남겨진 이엘은 멍하니 불어 버린 개울과 숲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국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들고 비를 피하기 위해 커다란 나무 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 우와, 인간이다!

    ― 인간이다!

    나무들이 시끄럽게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이엘이 비를 피하던 나무는 가지를 흔들며 빗물을 털어 냈다. 졸지에 떨어진 빗물에 다시 젖어 버렸지만 이엘은 짜증 내지 않았다. 나무가 가지를 옮겨 제 머리 위에 가림막을 쳐 주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 별말씀을. 나는 인간이 좋아.

    “그래? 인간이 왜 좋아? 해 준 것도 없는데.”

    ― 아니야. 인간들이 예전엔 내게 퇴비도 주고 관리도 해 주었는걸.

    “까마득한 옛날 아니야? 지금은 그런 인간도 없을 텐데.”

    ― 그래도 좋아. 좋은 인간들이 많았어.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얘기를 해 주기도 했으니까.

    “그게 좋았어?”

    ― 응. 내 수다에도 대답을 잘해 주거든. 지금 너처럼.

    그러나 동족인 이엘은 나무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좋은 인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그 몇 명만으로 인간을 좋다고 포장하기엔 양심이 찔렸다. 이엘은 대꾸 대신, 나무에 제 등을 기대고 무릎을 끌어 모았다.

    나무는 정말 말이 많았다. 인간을 본 게 오랜만이라는 둥, 궁금한 게 많았다는 둥. 쓸데없는 이야기들뿐이었지만 이엘은 어쩐지 나무로부터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황녀궁 앞에 있었던 수다쟁이 나무들이 생각이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그런데 같이 온 늑대는 누구야?

    “폐하야. 늑대들의 왕.”

    ― 세상에. 그렇구나! 전쟁이 있었어도 늑대와 사이좋은 인간도 있구나?

    사이가 좋다니. 이엘은 굳이 나무의 수다를 정정하지 않았다. 있는 대로 떠들기 시작한 나무는 점차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말이 많아지고 빨라졌다. 개중 반은 걸러 듣던 이엘은 저 멀리서 걸어 나오는 노아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아의 등장에 나무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제게 주십시오. 제가 불을 피우겠습니다.”

    이엘은 노아가 한 아름 안고 온 마른 나무들을 품에 건네받았다. 비실비실하게 생겨선 제법 힘이 있는 이엘을 쳐다보던 노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마른자리를 찾았다. 나무들이 눈치껏 가지를 모아 말라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이엘은 그들이 만들어 준 자리 위에 장작더미를 쌓아 올렸다.

    처음 봤을 때는 눈매가 사납고 날카로웠다. 건방지게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꼴이 마치 귀족 나부랭이들과 같았다. 하지만 그새 고생을 한 건지, 아니면 사회에 적응한 건지 인간 소년은 많이 변해 있었다.

    고지식한 방법으로 불을 피운 이엘은 장작 위에 불씨를 옮겼다. 따닥따닥,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장작이 타올랐다.

    “눈을 붙여라. 날이 밝는 대로 쉬지 않고 달릴 거니까.”

    “아닙니다. 폐하께서 눈 좀 붙이십시오. 제가 보초를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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