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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31화 (31/488)
  • 31화

    어찌나 놀랐으면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엘이 입을 벌린 채 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때도 그랬지만 이 우논은 정말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나 조용히 움직이는 개체라면 호랑이밖에 없다. 레온을 대충 호랑이라고 생각한 이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았다.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 못한 내 불찰이지, 뭐.

    레온은 가벼운 실크 소재의 잠옷 차림으로 벽에 기댄 채, 멍청하게 주저앉아 있는 인간을 내려봤다. 레온을 가만히 쳐다보던 이엘은 금세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곤 아무렇지 않게 줄을 붙잡았다.

    어차피 이 우논도 오늘 이후론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대놓고 도둑질하는 거야?”

    “필요하니까요.”

    “그러다 걸리면 죽는다니까.”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저는 씨앗을 가져가야 합니다.”

    “…….”

    “기한이 얼마 안 남았단 말이에요.”

    돌아갈 곳을 또 잃긴 싫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줄을 잡아 위로 쑥쑥 올라가기 시작했다.

    벽을 다리로 디딜 때마다 무릎이 아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부터 일정한 간격마다 아픈 것으로 보아 평소 달고 다니던 그 통증인 듯싶었다. 그래도 지상으로 올라온 뒤로는 비를 마주한 적이 없어 무릎이 덜 시렸는데. 내일은 비가 오려나.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위로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이 손을 뻗어 이엘이 지나간 줄 끝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레온의 손을 타고 뻗어 나간 불이 줄에 붙었다. 불줄기는 줄을 타고 위로 순식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제 아래에서 느껴지는 불기운에 이엘은 고개를 내렸다가 소리를 내질렀다. 저 미친 우논이 정말 날 죽일 셈인가? 이를 꽉 물고 이엘은 더 빠른 속도로 줄을 탔다.

    어느새 신발 끝에 달라붙은 불이 살갗을 태우기 시작했지만, 이엘은 개의치 않았다. 발이 타오를 것처럼 아프더니 어느새 다리를 타고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딴 것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거의 막바지인 줄을 놓고 창틀에 매달렸다. 동시에 불이 활활 타오른 줄은 재가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창틀을 양손으로 잡고 매달린 이엘은 제 입술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입술을 꽉 깨물며 고통을 참아 냈다.

    “그만 내려와.”

    “…….”

    “도둑질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보면 내가 죄를 뒤집어쓰거든.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오지 그래?”

    레온은 악바리처럼 버티는 인간 소년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대체 뭐가 널 그렇게까지 살게 만드는 걸까?

    레온이 만났던 인간들은 전부 생기가 없는 놈들이었다. 눈은 한껏 풀려서 해롱해롱거렸고 음주가무에 미쳐서 제정신인 놈들이 없었다. 황족은 주지육림에 정신이 나갔고 연구실에 있던 놈들은 잠도 자지 않고 연구와 실험에 매진했다. 하나같이 미치광이들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삶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련이 없었다. 칼로 베어 버릴 때도, 잡아먹을 때도, 불로 태워 버릴 때도. 멍청하게 웃으며 죽음을 맞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 인간은 구질구질할 정도로 매달리고 있었다. 그깟 씨앗 하나 때문에. 돌아갈 곳을 마련하겠다고……. 구차하게 삶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레온은 벽을 짚고 단숨에 성벽을 뛰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이엘이 매달려 있는 창틀 위에 올라섰다. 이엘은 저가 선 창틀에 간신히 매달린 채 입술까지 깨물고 있었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네 다리를 태워 먹어 버린 내가 이렇게 손을 내밀어도.”

    “…….”

    “이 손을 잡고 도움을 받아서라도 살아남을 거야?”

    “당연히.”

    그녀는 주저함 없이 레온의 손을 잡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을 거예요.”

    삶에 의욕적인 얼굴을 바라보며 레온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레온이 만난 그 어떤 종족들보다 가장 아름다운 개체였다.

    루나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다.

    레온의 손을 잡아 올라온 이엘은 성 안에 발을 딛자마자 바닥에 고꾸라지듯 엎어졌다. 무릎도 무릎이었지만 화상을 입은 다리가 제일 말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던 열감이 뒤늦게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엘은 바닥에 엎어진 채 숨죽여 고통을 참아 냈다. 보통의 불이 아니었다. 이쪽 종족이 사용하는 화염은 닿기만 해도 뼈가 바스러질 정도로 지독했다. 하지만 참아 냈다. 이깟 아픔은 아픈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로.

    레온은 바닥에 엎어져 가쁜 숨을 쉬는 인간을 내려보았다. 양쪽 다리가 화상과 그을림으로 새카맣게 타 버렸다. 내상은 말도 못할 정도겠지. 혀를 차며 그 앞에 다가간 레온이 그녀의 다리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순간적으로 화상 자국 위에 작게 피어난 불꽃이, 다시 빨려 들어가듯 레온의 손바닥 안으로 흡수되었다. 동시에 이엘의 다리 위에 엉망으로 퍼져 있던 흉터도 레온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도 고통은 꽤 갈 거야.”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말처럼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느리긴 해도 분명 조금씩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엘은 레온을 등지고 벽을 짚으며 천천히 앞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절뚝거리면서도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이 넓은 성을 뒤져서 왕이 씨앗을 둘 만한 창고를 찾아야만 한다. 반드시 찾아야 해.

    “어떤 게 필요한데?”

    “네?”

    “네가 필요한 거 말이야. 어떤 씨앗이냐고.”

    금발의 남자가 내뱉은 말에 이엘은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말투가 꼭 도와주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조금 전 창틀에서 올려 준 것처럼.

    “찾으면 바로 나가.”

    “…….”

    “따라와. 그쪽으로 가면 근위대에게 들켜.”

    얼결에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나풀거리는 흰옷을 입고 앞서 걷기 시작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졸졸 따라가며 이엘은 괜히 긴장감에 몇 번이나 침을 삼켰는지 모른다.

    내가 그렇게 질척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던 걸까? 아까 전만 하더라도 방관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기 싫다고 하던 작자가 아니던가. 대체 저 사람의 속내를 모르겠다.

    레온은 자신이 씨앗을 모아 두는 커다란 창고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열쇠를 건넸다. 놀란 인간은 열쇠를 받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저와 열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빨리 가지고 나가.”

    “갑자기 왜 도와주시는 겁니까?”

    “인간이 영지에 있는 게 싫으니까.”

    그의 즉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존재와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이엘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레온을 향해 꾸벅 인사를 마치곤 열쇠를 커다란 구멍 안에 집어넣어 돌렸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옛날 황궁에서 보았던 약재소처럼 높다란 천장까지 세 벽면이 서랍장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이엘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랄 틈도 없이 맞은편에 보이는 사다리를 가져왔다. 이름순으로 정렬되어 있는 서랍장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려가며 장미를 찾기 시작했다.

    레온은 문에 기댄 채로 이엘이 하는 행동을 눈에 담았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삶은 과연 어떠한 모습인가, 그는 저 인간을 통해 조금씩 알아볼 생각이었다. 저게 루나 님이 그토록 내게 바라시는 모습이었을까? 몇 번이고 실패한 낯으로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썩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마는.

    “뭘 찾는데?”

    “붉은 장미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레온은 터벅터벅 걸어가 가장 중앙에 위치한 황금색 서랍장을 열었다. 그러곤 손을 넣어 노아에게서 받았던 씨앗들 중 일부를 꺼냈다. 여전히 이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름만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레온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사다리에서 끌어 내리고 바닥에 세웠다.

    “이게 붉은 장미다.”

    “네……? 정말인가요? 이거예요?”

    “그래. 맞아.”

    “하지만 분명 제가 찾을 땐 이름이 없었는데…….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붉은 장미는 과거 황실 인간들이 피우던 꽃이었어. 그리고 그 꽃을 받을 수 있는 건 그들과 가장 가까운 종족, 늑대들뿐이지.”

    “…….”

    “그러니 네가 찾고 있다는 붉은 장미의 씨는 늑대들이 우리 폐하께 맡겨 놓은 종자가 유일하단 소리야.”

    “…….”

    “가운데 서랍장은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씨가 있는 곳이니 이게 바로 그 붉은 장미 씨앗일 테고.”

    그랬구나……. 공작가에 피어 있던 그 꽃들은 전부 황실로부터 받은 것들이었어. 왜냐하면 인간들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졌고, 인간에게 충성했던 종족이 늑대였으니까. 그들의 가문 문장에, 어울리지 않는 장미가 귀퉁이를 차지했던 것도 이 이유였을까?

    황실기사단 중 제 1기사단이 전부 늑대였던 것은 그들의 충성심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황실로부터 공작이란 높은 작위를 수여받고 붉은 장미를 받았다. 이엘은 입을 다물고 제 손바닥에 놓인 종자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그렇게나 충성하던 종족을 배신하다니. 끔찍하다. 아비의 악행은 자식에게나 충복에게나, 가릴 것 없이 무참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잠깐.”

    레온이 넋을 놓고 있는 이엘의 손목을 잡아 구석으로 끌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마도 이엘이 처소에서 사라진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당연히 성 안이 가장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엘은 씨를 손에 꾹 쥔 채 절뚝거리는 다리로 문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랐던 레온이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지금 나가면 들켜.”

    “언제 나가도 들키는 건 같아요.”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도망을 쳐서라도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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