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잡아먹으려고 노리던 게 언제였더라. 인간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랬다. 숲에서 저와 마주치기 직전까지 인간의 뒤를 밟으며 서로 재기 바빴던 게 테르들인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로가 말하지 않았던가? 테르들이 기회를 보며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고.
그런데 어느 틈에 저런 사이가 됐단 말인가. 왜 란트가 골치 아팠던 건지 슬슬 이해 가기 시작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인간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를 가볍게 피하며 목덜미를 디딤 삼아 훌쩍 뛰어오른 인간은 순식간에 호랑이의 커다란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엘을 떨어뜨리려 호랑이가 제자리에서 몇 번이고 뛰어올랐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심지어 바닥에 제 등을 비비려는 호랑이의 목을 양팔로 감싸 죄며 가볍게 제어하기까지 했다.
“그만! 아파!”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 테르였던 호랑이가 앓는 소리를 하며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어깨를 으쓱이며 호랑이의 등에서 내려온 이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손바닥의 먼지를 탈탈 털었다. 으윽! 아파! 호랑이가 찡찡거리며 갸르릉 소리를 냈다.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올린 이엘이 주먹으로 호랑이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으악! 새끼 호랑이가 소리를 질렀다.
“야. 너는 체통도 없이 겨우 이 정도 힘에 울상이야?”
“아프단 말이야! 그리고 야라고 부르지 마! 나도 이름 있어. 내 이름은 엘타라니까?”
“우리가 이름을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치사해……. 그나저나 오헬은 힘이 너무 세. 아파!”
“내가 세다고? 내 친구 만나면 너 턱뼈 바로 날아가겠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힘이 장사인 밀로에게 맞았다가는 이 새끼 호랑이는 턱이 박살 날지도 모르겠다. 성인 남자들에 비하면 힘에서는 한참 밀리는 제게 얻어맞았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참…… 호랑이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이엘의 생각을 읽은 건지 새끼 호랑이가 기운 없이 꼬리를 바닥에 내려뜨렸다. 그 틈을 타고 옆에 있던 사자 한 마리가 잽싸게 파고들었다.
“다음은 나랑 해!”
“그만 좀 해. 너흰 지겹지도 않아?”
“심심하단 말이야. 놀아 줘, 인간!”
“심심하다고 호랑이랑 사자가 인간에게 놀아 달라고 했단 말이 떠돌면, 듣는 이종족들이 다 비웃을걸?”
“뭐 어때. 우리가 심심한데 대수야?”
말을 마친 수사자가 이엘에게 달려들었다. 움직임이 조용한 호랑이들에 비하면 사자는 갈기 때문인지 배로 눈에 띄었다.
가볍게 자리를 피해 버린 이엘에게 사자가 또 한 번 달려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이엘이 달려오는 사자의 갈기를 양손으로 홱 잡았다. 아까처럼 위로 가볍게 튀어 오른 그녀는 보란 듯이 사자의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어떻게 해도 일단 내가 등에 타면 너흰 끝이야.”
“인간들은 몸집이 작아서 다 너처럼 빠른 거야? 아니면 너만 빠른 거야?”
“글쎄. 내가 빠른 게 아닐까?”
“너 되게 재밌어, 인간!”
어쩜 이렇게 순박할 수가. 재밌단다, 이게……. 어이가 없어서, 참.
문득 이놈들이 처음 제게 달려들었던 날이 떠오른다. 이엘은 정말 목숨을 걸고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들고 있던 검은 얼마나 형편없었던 건지, 사자가 입에 물자마자 댕강 부러지고 말았다.
급하더라도 제대로 된 걸 들고 왔어야 했는데……. 아무튼 맨손이 되어 버린 이엘은 정말 죽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그저 재미 때문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에겐 인간은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응. 여기 근방에 있는 인간들은 아저씨들이 다 먹었대.”
“인간 맛이 그렇게 좋다던데.”
“맞아, 맞아. 진짜 맛있대.”
그러면서 왜 자신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 건지. 이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호랑이 엘타가 히죽 웃었다. 걱정 마, 오헬! 너는 안 먹을게! 천진난만하게 답하는 엘타에게 고맙다고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기에도 어린 개체는 몇 없었다. 성체인 사자와 호랑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새끼들은 저희끼리 곧잘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한 무리에 지내고 있었고, 어린 개체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암컷은 죄 사라졌으니 남아 있는 다음 세대라고는 이들이 전부일 터였다.
왠지 모르게 이엘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말로, 모든 종족이 멸종되겠구나. 그 생각에 숨이 막혔다.
“오헬! 다음엔 우리랑 같이 사냥 가자! 응?”
“사냥?”
“응. 가끔 밖에 다녀오라고 성문을 열어 주시는데, 우논 님들이랑 같이 나가거든. 그때 너도 가자! 진짜 재밌어!”
“가면 어떤 사냥 하는데?”
“그냥 여러 가지. 나는 물소가 특히 좋아.”
“나는 사슴!”
이엘이 손을 저었다. 나는 됐어, 그런 거. 그녀의 말에 호랑이들과 사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럼 인간은 뭘 먹고 살아? 풀만 먹어?”
“아니야, 바보야!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 인간도 고기 먹는대.”
“맞아. 예전엔 우리 종족도 먹었다고 했어.”
“헐.”
순식간에 이것저것 다 잡아먹는 족속이 되어 버린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토끼도 먹고 돼지도 먹긴 하지. 따지고 보면 죄다 먹긴 한다. 축복의 나무가 사라지고 식성이 변한 인간이 먹지 못하는 것 따윈 없다.
없는 건 맞는데……. 근데 저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호랑이와 사자의 모습에, 이엘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저기요, 지금 누가 누구를 먹는다고……? 반문하는 이엘의 말에도 호랑이와 사자는 충격이란 표정이었다.
“우리도…… 먹을 거야?”
“뭐?”
“오헬은 힘이 세니까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우리 잡아먹을 거야?”
“…….”
“무서워…….”
도대체 누가 누구를 무서워해야 하는 건지…….
결국 이엘이 ‘절대!’ 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새끼들은 안심을 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던 이엘은 모여든 새끼 개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 너희 아버지들이 찾으시겠어.”
“벌써?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안 돼.”
“치사해!”
“치사해!”
일제히 치사하다며 항명을 하는 놈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어제도 늦게까지 여기 모여 있다가 성체들이 데리러 오지 않았던가. 새끼들은 몰라도 성체는 마주하기 어려웠다.
우논이나 둔과 달리 테르는 이성보다 본능이 앞섰다. 지금이야 제 왕이 명령을 내렸으니 참고 있지만 언제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게 달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계급들이었다. 이엘은 어젯밤처럼 살벌한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 또 와.”
“알겠어. 나 그거 해 줘!”
“나도!”
“나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호랑이들과 사자들이 차례대로 이엘의 앞에 줄을 섰다. 제일 앞에 있던 사자가 제 얼굴을 이엘에게 한껏 내밀고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이엘도 결국 하는 수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왔다.
손을 뻗어 갈기를 쓸어 주듯 양손으로 쓰다듬고 긁어 주었다. 이를 잔뜩 드러내며 갸르륵 소리를 내는 게 제법 살벌했지만, 기분이 좋다는 뜻이란 걸 알았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애교에 헛웃음이 나왔다.
창문으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레온이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곁에 서 있던 란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란트는 어제 저 광경을 처음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레온을 알현하고 제 처소로 돌아가려던 길에 어린 새끼들 목소리가 크게 들리기에 깜짝 놀랐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인간 소년이 머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 왕과는 달리 혹시나 노아와의 우호 관계가 걱정이 됐던 란트는 황급히 그 소년의 거처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가 기함할 뻔했다.
아주 애완동물이 따로 없구나. 제 새끼들이 저러고 있는 걸 본다면 아비들은 어떤 심정일까.
레온도 지금 같은 마음이었다. 제 종족이 저렇게 아양을 떨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기가 차고 황당해서……. 예전에 황궁에서 길렀다는 고양이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괜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래도 다들 기분이 좋아 보여요!”
로가 불쑥 끼어들었다. 로의 말처럼 새끼들은 죄 행복해 보였다. 주먹을 쥐던 레온의 손에 힘이 풀어졌다.
로가 헤실헤실 웃으며 자신의 친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온에겐 모든 백성이 다 소중하지만 그중 새끼 무리는 더 애틋했다. 그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타이곤인 로를 기꺼이 제 무리에 합류시켜 주었다. 로는 제 친구들이 내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덩달아 깔깔 웃기 시작했다. 물론 란트는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었지만.
레온은 창문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새끼들을 쳐다봤다. 아직은 새끼들이니 뭐가 뭔지 잘 모를 것이다. 게다가 저들은 인간을 마주한 적이 없었을 테니 더더욱.
하지만 시간이 지나 성장할수록 그 안에 인간을 향한 원한은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다. 인간과 달리 이종족들은 본능에 따라 종족 번식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 종족 번식을 할 수 없게 되다니. 이것만큼 최악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만큼 어리석은 왕은 또 어디 있겠는가.
결국 자신은 무리를 지켜 내지 못했고, 무리의 멍청한 짓을 막지 못했고, 미래 역시 만들지 못했다.
“폐하. 이제 회의를 재개하도록 할까요?”
“늑대들처럼 되지 않아야겠지.”
“네?”
더는 정을 붙이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럼 늑대들처럼, 노아처럼……. 후회와 고통으로 잠식될 것이다. 레온은 창문에서 벗어나며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회의를 재개한다.”
“예, 폐하.”
하루빨리 돌려보내야겠다. 더는 제 종족이 인간으로 인하여 고통받지 않도록.
*
벌써 앤디와 약속한 보름으로부터 열흘이 더 지났다. 그사이 이엘은 몇 번이고 알현을 청했지만 왕은 기어이 만나 주지 않았다. 심지어 연금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집 밖을 나가는 것에도 감시가 붙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앤디가 데리러 오겠다고 한 날짜가 한참이나 지났는데, 늑대들 쪽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누구든 보내 주겠다는 그의 말은 아직 유효한 걸까? 정말 날 이곳에 버린 건 아닐까?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이쪽은 속이 탔다.
하루라도 빨리 씨앗을 가져가고 싶은데 좀처럼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낮엔 어린 테르들이 와서 놀아 달라 아우성이었고, 저녁이 되면 감시하듯 제 처소 근처를 맴도는 성체들이 그득했다.
“더 기다릴 수 없어.”
언제까지 여기 머무를 순 없다. 게다가 가져온 약이 없었다. 그나마 하나 가져왔던 것을 마셨지만, 돌아가는 길까지 계산한다면 약효가 지속되는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결국 이엘은 집 한구석에 준비해 뒀던 새끼줄을 손에 쥐고 집을 나섰다. 혹시 몰라 며칠 동안 바닥을 뚫어 땅을 파서 다른 길을 만들어 두길 잘했다. 사자나 호랑이가 땅 아래까지 들어오지는 않을 테니. 이엘은 혹시 모를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입고 있던 옷으로 집 안 곳곳에 제 냄새를 묻혀 두었다.
준비를 마친 이엘은 덮개를 열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나름대로 열심히 판다고 팠는데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통로 안은 비좁고 숨이 막혔다. 그럼에도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이며 부실한 통로 안을 뚫고 지나갔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윽고 통로의 끝에 다다라 임시로 가려 둔 덮개를 열고 고개를 쏙 내밀었다. 온몸에 흙냄새가 진동을 했다. 참았던 숨을 모두 뱉어 내며 가볍게 땅 위로 올라온 이엘이 제 몸을 툭툭 털며 뒤를 쳐다봤다. 숲을 빠져나왔지만 역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이제 우논이나 둔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성 안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늑대들과 달리 여긴 경비병이나 병사들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몸을 잔뜩 낮춘 채 밤을 타 성 근처에 다다랐다. 제게 주어진 처소가 비교적 성과 가까운 곳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주변에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오랜 시간을 땅 아래서 지낸 이엘은 다른 감각기관보다 귀가 예민한 편이었다. 그 예민한 귀를 벽에 대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준비해 온 새끼줄을 꺼냈다. 새끼줄의 한쪽 끝엔 갈고리를 달아 창틀에 걸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성벽에서 조금 물러난 그녀는 왼손으로 줄 가운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갈고리 근처의 줄을 잡아 휙휙 돌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대략 2층 높이의 저 창틀이었다. 창 너머로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창고 같은 외진 곳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이엘의 손에서 가볍게 돌아가던 줄 끝에 달아 논 갈고리가 어느 순간 공중에서 홱 뻗어 나가 창틀에 걸렸다. 몇 번 아래로 당겨 제대로 걸렸는지 확인을 마친 이엘이 손바닥을 탁탁 털고는 줄을 덥석 잡았다.
“도둑이네.”
“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