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너와 함께 놀던 정원이 그립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머니께서 계셨더라면 그 정원도 뿌리째 뽑히진 않았을 텐데. 일전에 맡겨 둔 씨앗은 이제 버려 주면 좋겠군. 그 정원은 살아날 수 없다. 우리의 전쟁이 모든 걸 망쳤어.」
그 정원은 노아의 어미가 정성을 다해 가꾸던 곳이었다. 어릴 적 늑대와 함께 자라던 시절에 레온도 자주 오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쳐들어와 노아의 어미를 죽이고 정원을 짓밟았다. 정원에 숱하게 존재하던 씨앗 몇 개만이 겨우 살아 레온의 영지에 도착했다. 후에 노아가 찾으러 올 때까지 맡아 둘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씨앗을 찾으러 온 자가 참 아이러니했다. 모든 전쟁의 근간인 인간이라니.
‘우리의 전쟁이 모든 걸 망쳤어.’ 노아의 편지 끝에 붙었던 그 말은 곧 ‘인간과 내가 모두 망쳤어.’라는 의미였다.
결국 씨앗은 누가 찾으러 와도 가져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모든 전쟁의 근간은 이 땅 위에 살아 숨 쉬는 것들이니까.
그건 노아가 씨앗을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이 세계를 망쳐 버린 죗값을 받겠다는 뜻이었고. 그러니 레온은 인간에게 씨앗을 줄 수 없다.
“제가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씨앗이 없으면 그곳도 제겐 이곳과 똑같습니다.”
“우리의 폐하께선 널 만나 주지 않으실 거야.”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인간을 싫어하신다고 하셨으니까.”
“…….”
“저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겁니다.”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도요. 마지막 말을 덧붙인 이엘이 자리를 벗어났다.
레온은 인상을 찡그린 채 인간이 사라진 길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
‘무서워요. 싫어요……. 돌아가기 싫어요.’
‘레니.’
‘그냥 죽는 게 나아요. 차라리 죽고 싶어요.’
금발의 어린 소년이 엉엉 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자는 안타깝게 소년을 내려보다가 친히 허리를 접고 내려앉아 아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레온― 그녀의 나지막한 음성에 레온이 훌쩍임을 멈추었다. 이리 온, 레니. 다정한 음성을 따라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익숙하게 레온을 제 품에 안아 올렸다. 여자는 제 아들처럼 레온을 아꼈다.
‘발레리안이 널 버렸을 리가 없잖니, 아가.’
‘아니에요! 그분들은 다 절 버렸어요. 저를 연구실에 버린 거예요!’
‘레니. 무어와 나는 발리의 오랜 친구란다. 그는 우리에게 널 맡겼어. 널 연구실에서 빼내 우리에게 맡긴 거야.’
‘그치만…….’
‘시간이 지나면 발레리안을 다시 만나러 가자꾸나. 가서 아버님이라고 당당하게 부르렴. 넌 분명한 그들의 아들이야.’
그녀가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겁에 잔뜩 질려 울음이 터진 금발의 꼬마는 검은 머리의 여자에게 더욱 칭얼거리듯 엉겨 붙었다.
내 어머니도 루나처럼 다정한 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루나가 내 어머니였다면…….
생각을 덧대던 레온의 시선이 문득 정원에서 공을 튕기던 흑발의 남자아이에게 닿았다. 남자아이는 레온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레온은 갑자기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와 루나의 품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소년을 단단히 안으며 단호하게 주의를 주었다.
‘레니. 잘 들으렴.’
‘…….’
‘살아야 해, 레니. 무조건 살아남으렴.’
‘하지만……,’
‘목숨을 걸어서라도 살아. 살기 위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레니.’
목숨을 걸면서까지 살아남으라는 말이 어린 레온에겐 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다독거리던 루나의 손길이 점차 강해졌다.
살아야 한다, 레니. 그 말과 함께 루나는 레온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러곤 여전히 눈물이 묻은 레온의 눈가를 손등으로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저 멀리 서 있던 흑발의 소년이 공을 손에 쥐고 점차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있을 곳은 스스로 만드는 거란다. 살아 있다면 그 자체로 삶에는 의미가 있는 거야.’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생물학적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외면받고,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빈번히 이루어진 실험으로 몸과 마음이 상처로 얼룩진 어린 레온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코를 훌쩍이는 레온의 앞으로 푸른색 공이 불쑥 다가왔다.
‘공 갖고 놀자.’
‘……노아.’
‘혼자 놀면 재미없잖아. 같이 놀자.’
노아는 울고 있는 레온의 품에 공을 안겨 주었다. 루나는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폐하?”
“…….”
“폐하!”
“……아. 미안.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말씀하신 대로 병사들을 배치할 구역을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랬지. 미안하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쉬었다가 할까요? 재상의 물음에 레온은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쉬도록 하지. 모여들었던 귀족들이 일사불란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레온의 앞으로 차가 담긴 잔이 놓여졌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레온은 제 머리를 털었다.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정원 얘기가 나와서.”
“네?”
“루나 님을 잠깐 떠올렸어.”
“선대 공작 부인 말씀이십니까?”
“응. 내겐 어머니 같은 분이셨지.”
란트는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레온의 친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레온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와 같은 종족인 란트 역시 선대 후작을 섬길 때에 후작의 직계 중에 타이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자 종족을 이끌던 선대 후작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아끼던 딸은 장녀, 린다였다. 그녀는 사자들 중에 가장 사자다웠으며 그녀의 아래서 무리를 이루겠다며 달려들던 자들이 수두룩했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의 자식이라니. 그것도 호랑이의 피를 함께 이어받은 자식이 있을 줄은 란트도 전혀 몰랐다. 후작의 최측근이었던 자신의 가문에게마저 감춘 직계라니. 게다가 린다는 죽기 직전까지 입에 레온의 이름조차 올린 적이 없었다. 전쟁으로 살해당하던 때에도 자식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식 따윈 없었다는 듯이…….
하긴. 애초에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레온에게 어미란, 저를 친자처럼 키워 준 늑대 루나뿐일 것이다. 란트는 루나 생각을 했다는 제 왕을 쳐다보며 착잡한 심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란트 경.”
“네, 폐하. 하문하십시오.”
“그대는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
“경이 살아가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살아가는 이유라니…….”
어딘지 모르게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인간에게나 통할 법한 질문에 란트가 제법 당황한 기색이었다.
피싯 웃음이 터졌다. 애당초 짐승들에게는 살아가는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이고, 죽는 순간이 온다면 죽는 것이다. 그런 이유 따위를 붙일 수 있는 건 이 세계에서 인간이란 종족이 유일할 것이다.
‘저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 인간 소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에 머물렀다. 그 어느 날의 루나가 제게 충고했던 말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살아남으라고 했던 그 충고.
……역시 인간들은 우리와 다른 종족인 걸까? 귀 밑에서 흔들리던 검은 머리카락이 자꾸 잔상처럼 남아 있다.
“폐하. 그나저나 저 인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나가래도 가기 싫다고 하니 어쩌겠어. 목숨이 두 개는 되나 보지. 다음에 마주치면 경고 정도로 안 끝날 텐데 간도 커.”
“그게 아니라……. 직접 보십시오.”
골치가 아픈 표정의 란트가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열흘 전, 레온은 나드를 산책시키다가 뜻하지 않게 인간 소년과 마주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구역질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레온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의 대화가 흥미로웠다.
이제는 죽어 버린 루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인간이 존재하다니. 루나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인간은 지난 열흘 간 끊임없이 알현을 청해 왔지만, 레온은 그를 한 번도 만나 주지 않았다.
‘됐어. 쓸데없는 곳에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해. 앞으로는 보고도 올리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 줄 마음 없으니.’
‘네, 폐하. 근데 테르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아요. 새벽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데요?’
‘…….’
‘폐하?’
‘집 밖으로는 나오지 말라고 경고하고, 테르들에게도 한 번 더 말해. 손님이라고.’
뜻밖의 대답에 로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인간이 테르들에게 잡아먹히든 말든, 왕께선 관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로의 중얼거림을 들은 레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지만, 금세 관심을 거뒀다.
그냥 루나 님을 닮아서 그런 거지. 괜히 루나 님을 떠올리게 하는 말을 해서…….
그랬던 레온은 란트의 안내를 받아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가 황당함에 미간이 구겨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저게?
“그저께 아침부터 저렇게 지내고 있답니다.”
“…….”
“테르들이 좋아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