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로는 이엘에게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제 양손과 고개를 함께 흔들었다.
“일단 손님이 머무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지만, 아무래도 폐하를 뵙는 건 어려우실 것 같아요.”
“왜죠? 이유라도 말씀해 주세요.”
“저희 왕께서는 인간을 무척 싫어하십니다.”
“…….”
“사실 지금도 매우 화가 나셨거든요. 테르들에게 집어 던지라는 말씀을 겨우 거두셨답니다. 노아 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여기서 며칠 머무시는 건 괜찮으십니다. 장기간이 아니라면 폐하의 명령대로 테르들이 해가 되지는 않을 테지만 폐하께서 마음이 또 언제 바뀌실지 모르거든요.”
그 대목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며 금세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낮추었다. 서늘한 한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이엘은 그쪽에서 시선을 돌려 영지 중앙에 위치한 높다란 왕성을 쳐다봤다. 저 성에 왕이란 놈이 있겠지.
‘언젠가 네가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때가 올 거다.’
신뢰가 필요하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늑대였다. 그들의 기름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해. 이엘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그렇다면 며칠 머무르겠습니다.”
“폐하를 뵐 수 없을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저는 씨앗을 받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받지 못하실 거예요.”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에요. 저는 폐하를 뵙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씨앗만큼은 받아서 돌아가겠습니다.”
로는 내심 놀랐다. 이렇게나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사냥감을 응망하는 태도를 취하는 테르들 틈에서 기 하나 눌리지 않는 인간이라니.
로가 기억하는 인간들은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로 나뉘었다. 하나같이 저희들을 얕잡고 고문하던 자들과 두려움에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자들. 그러나 이엘은 그들과 전혀 달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다른 곳에서 살다 온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로는 빙긋 웃었다. 왠지 레온 님과 만나면 격하게 대립할 것 같은데. 차라리 폐하께서 알현을 영영 거절하셨으면 좋겠네.
이엘은 꼬마 심복 로를 따라 영지 내로 완전히 들어왔다. 여전히 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자와 호랑이들 때문에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일단 오드가 말해 준 것처럼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그 무서운 위압감은 면할 수 있다. 부러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 로의 뒤를 따랐다.
어쨌든 자신은 노아의 심부름꾼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고개를 조아릴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머무르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잠깐만요!”
“네?”
“정말 폐하를 뵐 수 없는 건가요?”
“글쎄요. 뵐 수는 있겠지만……. 뵙는 순간 바로 목이 달아나실지도 몰라요.”
“…….”
“폐하께선 인간을 정말 싫어하시거든요.”
미간까지 구겨 가며 설명해 주는 로의 말에 이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말했지만 엮이지 않는다는 게 죽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일단은 여기 머물면서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게 최선인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이엘에게 로도 함께 인사한 후 집을 나갔다.
긴장한 탓에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이곳은 노아의 영지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숲이 우거진 곳이 많았고 나쁘지 않은 토양임에도 정돈되지 않아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영지가 워낙 큰 탓인지, 우논이 사는 집이 보여도 각각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엘이 머무르게 된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채 비어 있는 작은 집에 갖춰져 있는 거라곤 침대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매번 청소를 하긴 한 건지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엘은 창문을 밀어 올려 밖을 쳐다봤다. 여전히 우거진 수풀 새로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 여럿이 보였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이군. 테르들은 능력을 쓸 순 있어도 힘이 강력한 편은 아니라서, 접근했을 때 검으로 찔러 버리면 대충 도망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일대일로 붙었을 때나 가능한 얘기겠지만.
침대 아래 무릎을 끌어 모아 앉은 이엘은 짧은 한숨을 쉬며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우선 왕을 만나 사정을 말한 뒤 씨앗을 얻는 게 가장 좋은 루트이다. 하지만 그 왕이 저를 보는 순간 죽일 작정이라면 만나지 않고 씨앗만 챙기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씨앗을 훔치는 방법. 노아는 왕의 허락을 받고 가져오란 말은 하지 않았다. 왕에게 서신을 전해 주라고 했을 뿐.
자리에서 일어난 이엘은 대충 주변을 살펴보았다. 새끼를 꼴 수 있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형편없는 이 집 안에선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결국 이엘은 집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었다. 밤을 틈타 주변을 뒤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마는, 혹시 밤에 본능에 충실한 테르 하나가 제게 달려들면 어쩐단 말인가. 막말로 노아는 자신이 죽어도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애초에 그에게 자신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새끼를 꼴 만한 나무줄기를 찾는 게 우선인데…….”
집을 나서는 제 뒤로 테르 몇이 붙었다. 쟤네는 며칠 동안 굶은 건가? 아니면 사람을 처음 보나? 하긴. 보아하니 그동안 눈에 보이는 인간은 죄 잡아먹어 버린 것 같은데, 살아 숨 쉬는 인간은 오랜만이라 신기한가 보다. 안타깝게도 자신은 포동포동한 먹잇감은 아닐 텐데. 적당하게 자조한 이엘은 숲이 우거진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이제는 뒤에서 아주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귀가 멍해졌다. 언뜻 침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린 것 같네. 그녀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개의치 않고 안쪽으로 더 향했다. 최대한 빨리 찾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돌아가는 게 좋겠는데…….
한참이나 뒤적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뒤따라오던 테르들의 울음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놀란 이엘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죄 사라져 버린 건지 숲 안은 고요했다. 언뜻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말고는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풀들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재잘거리던 늑대의 영지와는 달리 이곳의 식물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가만히 풀잎 끝을 만지작거리던 이엘은 저쪽 끝에서 느껴진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아까 그 테르들이 아니야.
그녀의 예민한 감각이 온통 저 너머에 쏠리기 시작했다. 일단 저쪽이 먼저 달려들면 찌르는 건 무리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이종족의 두툼한 가죽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무기고에서 대충 쥘 만한 것 중 아무거나 들고 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날로는 베는 게 고작이겠지.
“…….”
“…….”
상대도 고요했고 이엘도 고요했다. 다시 한 번 수풀이 흔들렸다. 결코 바람에 흔들린 게 아니었다. 높지 않은 풀이 흔들린 것으로 보아 자세를 바닥에 댈 것처럼 잔뜩 낮춰서 다가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
“누구십니까?”
그녀의 물음에도 여전히 답이 없었다. 하긴, 묻는다고 답이나 해 줄까. 결국 이엘은 검을 쥐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이건 정당방위야. 나는 전령으로 왔고, 아직까지는 이곳 왕의 허가가 유효하다. 적어도 내 몸을 지키는 건 허락받은 거라고. 생각을 갈무리하고 앞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캬아앙―!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이엘의 몸 위로 뭔가가 확 달려들었다. 울음소리라기엔 다소 앙칼지고 귀여웠다. 그리고 무게조차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가벼웠다.
차창―! 검이 바닥을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을 쳐다보기도 전에 이엘은 제 얼굴을 마구 짓누르는 짐승의 앞발을 치워 내야만 했다.
“새끼……?”
귀여운 울음소리는 완전한 새끼의 것이었다. 작은 앞발이 귀엽게 이엘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목 안에서 대부분 막힌 탓에 입만 무의미하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몸통이 겨우 그녀의 얼굴만 했다. 지척에서 마주친 새끼 이종족의 눈빛은 악의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엘이 본 것들 중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눈동자였다.
“아무리 전령이라고는 해도 함부로 검을 휘두르면 안 되지.”
갑자기 들려온 미성에 이엘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새끼에 온전히 정신이 팔린 탓에 누가 더 있는지도 몰랐다. 얼결에 새끼를 품에 안아 든 이엘은 제 검을 대신 주워 준 남자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외모로 보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성인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남자는 저를 향해 양손을 벌렸다. 순식간에 품에 안겨 있던 새끼가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나드. 찾느라 고생했잖아.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 되지.”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드라고 불린 새끼는 캬아앙! 소리를 내며 그의 뺨에 제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저렇게 어린 새끼가 존재할 수 있나? 분명 20년 전에 암컷이 죄다 사라져서 남은 개체들은 최소 20년은 더 살았을 텐데.
그렇다면 저 새끼도 우논이라는 말이 된다. 우논은 둔이나 테르보다 성장이 훨씬 더딘 편이고 개체에 따라 더 느리게 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체화했을 때 외견은 어느 정도 성체가 되어 있어야 할 시기일 텐데…….
실제로 주드가 그런 편에 속했다. 주드는 인간으로 치면 스무 살 언저리니 인간처럼 변했을 땐 어린 소년이지만 늑대로 돌아오면 성체에 가까운 크기였다.
“우논이십니까?”
금발의 남자는 나드를 품에 안고 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얀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 보였다. 무뚝뚝한 노아의 얼굴과는 또 다르게, 무표정하고 아무런 감정조차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돌아가지 않은 거지?”
“네?”
“왕이 널 만나 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자신 있나 봐.”
“…….”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가. 늑대들은 우리에 비해 우호적일 테니까. 목숨이 아깝다면 네가 있을 곳으로 가라.”
“씨앗이 없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레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놈의 씨앗 타령.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온 거군. 낮에 로가 들고 온 노아의 서신은 이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