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7화 (27/488)
  • 27화

    “그보다 란트 경. 이제 슬슬 근위대 외 영지 내에 병사를 배치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폐하, 혹시…….”

    “그래. 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우리도 슬슬 준비를 해야지.”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요새 우논들 중에서도 나태한 자들이 많은 것 같던데.”

    “호랑이들이 다 그렇죠, 뭐.”

    “사자들도 마찬가지야.”

    “…….”

    단호한 레온의 말에 사자인 란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손에 동족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으니까 그대의 선에서 끝내도록.”

    “예,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뭐, 나를 동족으로나 생각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폐하, 그게 무슨……!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란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지만 레온은 서류에 집중하며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여러 사건으로 사자와 호랑이는 선대 후작들과 직계를 죄 잃었다. 남은 직계 자손이라곤 레온이 유일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양가의 사랑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실험실에서 조작된 유전자로 태어난 돌연변이였다. 만약 레온이 가진 능력이 미미했더라면 직계고 뭐고 왕위에 오르는 일 따윈 없었을 터였다.

    란트는 일에 집중하는 레온을 가만히 지켜봤다. 단순히 자신이 왕을 따르는 근위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레온은 실제로 양가의 모든 우논들 중 지력과 능력이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 레온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발하는 자들을 척살하는 것은 근위대의 몫이었지만, 란트는 후회하지 않았다.

    무리에는 가장 강한 왕이 필요했고, 그게 타이곤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제 무리의 우두머리가 호랑이의 피가 섞인 돌연변이라는 것에 불만인 사자들이 여전히 수두룩했다.

    마찬가지로 호랑이들도 반발했다. 원래도 무리를 형성하지 않는 종족인데 구태여 왕이 필요한가. 2차 전쟁 전, 후작이 다스리던 때에도 호랑이들은 같은 영지 내에서 지냈을 뿐, 후작의 아래에 모여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왕권이 생겼으니 함께 무리를 지으라고? 그것도 사자들과? 사자들은 레온의 혈통에 불만이었다면 호랑이들은 자신들의 처분에 불만이었다.

    어쨌든 근위대는 강력하게 반발하는 양쪽 우논 몇을 처리했고, 그 본보기로 인하여 사자들은 레온을 억지로 인정하고 있는 형태였다.

    호랑이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사자와 함께 사는 게 꽤나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오히려 선대 후작보다 통치력은 레온 쪽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모든 이종족들 중 가장 넓은 영지를 갖고 있는 곳이 이곳이었다. 너른 영토에 적당히 본인들이 살 만한 영역 범위를 갖게 된 뒤로 호랑이들은 더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문제는 왕이었다. 무려 네 종족을 이끌게 된 레온은 왕으로서 자질이 훌륭하고 능력도 뛰어났지만 태생적인 불안함으로 모든 게 예민한 개체였다. 좋게 포장하면 섬세하단 의미였지만, 냉혹하게 평가하자면 극도의 예민함과 불안함으로 점철된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평화롭다면 별문제가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전쟁이 터지게 된다면…….

    생각을 잇던 란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왕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근위대가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란트 경.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잠시 쉬며 산책이라도 할까?”

    “지금 말씀이십니까?”

    “응. 나드를 데려오게.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함께 다녀올 테니.”

    “예, 폐하.”

    란트가 나가고 커다란 집무실에 남겨진 레온은 물끄러미 창가 쪽을 응시했다. 아까 모여 있던 테르들의 숫자를 보면, 왕성으로 오기도 전에 먹혀 버릴 텐데. 뭐, 먹혀도 괜찮은 인간이니까 보낸 거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을 이곳으로 보낸 노아의 의도를 모르겠다. 금발의 미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나드를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

    “저기요! 거기서 주무시면 큰일 날 텐데요!”

    이엘은 누군가 저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런 데서 잠이 들다니……. 잠에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나. 놀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엘의 머리 위, 문루에서 작은 꼬마 아이가 고개를 쏙 내밀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지기인가?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늑대 폐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사자와 호랑이의 왕께 받을 물건이 있습니다.”

    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뒤를 힐끔 돌아봤다. 인간의 목소리를 듣고 테르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 어차피 문이 열린다고 해도 바로 사냥에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문을 바로 열면 좀 위험하겠지?

    열심히 생각을 마친 로가 빠르게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엘은 점차 제 쪽으로 내려오는 꼬마를 보며 뒤로 두어 걸음 정도 물러났다.

    “폐하를 뵙는다고요?”

    “네. 폐하께서 씨앗을 갖고 계신다고, 노아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씨가 있기는 하다. 땅에 작물 따위를 키울 리 없는 다른 이종족들과 다르게 레온은 취미로 인간들처럼 땅을 가꾸기는 했다. 그래서 씨가 몇 있기는 한데……. 달라고 하면 주실까? 대면했을 때 이 인간의 목이 날아가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한참을 생각하던 로는 이엘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저는 폐하의 심복인데요, 그 서신 좀 볼게요. 폐하께서 먼저 보고 오라고 하셨거든요.”

    “폐하께서 제가 온 걸 아시나요?”

    “모를 리가요. 지금 영지 안에 온통 당신의 냄새로 덮여서 온갖 테르들이 문 앞에 대기 중인데요?”

    천진난만한 얼굴로 살 떨리는 말을 잘도 하는 로 때문에 이엘은 심장이 철렁였다. 아까 그대로 문이 열렸으면 정말 죽을 뻔했겠네. 서신을 로에게 넘겨준 이엘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다가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글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서툴렀지만 드문드문 글자들을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제 해석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뭔가 잔뜩 꼬여 있는 문장들이라서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로는 한숨을 쉬며 두루마리를 다시 접고 말았다.

    “죄송해요. 저도 뭔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폐하께 보여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음, 일단 그렇긴 한데요. 저는 서신만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아서요.”

    “그럼 어떻게 하면 폐하를 알현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씨앗만이라도 받아 가면 좋을 텐데요.”

    “근데 노아 님이 갑자기 웬 씨앗을 달라고 하신 거예요?”

    “정원을 꾸미신다고…….”

    “아,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지금 바로 폐하께 말씀드리러 다녀올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친 로는 쏜살같이 벽을 타고 올라가 이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불안함과 희망이 동시에 피어오른 이엘은 손을 모으고 성벽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손을 모아 중얼거렸다.

    웃기게도 자신이 신의 품을 떠나 다른 것의 손을 잡았음에도, 불안하고 걱정이 앞서면 저도 모르게 신을 향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신께선 이미 우릴 버렸고, 나 역시 그분을 버렸는데도…… 그래도 그분의 자비가 필요하다. 우린 신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라.

    “그러니 제발…….”

    사실 마음 같아선 성벽을 타고 올라가 안으로 잠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왕의 허락하에 씨앗을 받아 가는 게 우선이다. 굳이 사자나 호랑이와 엮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는 현재로서는 늑대뿐이었다. 다른 종족과 엮이면 목적을 잃게 된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아까 그 소년의 말처럼 성문 너머로 테르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성문을 부술 것처럼 울음소리를 내는 테르들 때문에 이엘은 수십 번이나 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엮이지 않는다고 했지, 곱게 죽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의치 않으면 도망을 치는 수밖에. 그렇게 한참이나 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테르들의 울음소리가 점자 작아졌다. 갑자기 줄어든 울음소리에 이엘은 오히려 더 긴장했다.

    “정말 만만치 않네.”

    쉽게 씨앗을 받아서 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막힐 줄은 몰랐다. 적어도 왕의 얼굴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려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하던 습관이었다. 황제의 노염으로 옷장 안에 갇혔을 때, 귀를 틀어막고 눈을 꼭 감은 채 숫자를 셌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고 나면 유모가 옷장에서 꺼내 주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나마 이 영지의 주인이 최상위 포식자라는 점 덕에, 근방에 다른 종족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엘은 주의해야 할 대상이 있는 성문만을 노려보며 계속해서 숫자를 셌다.

    “703, 704, 705, 70……,”

    “손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황급히 시선을 문루로 올렸다. 두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던 아이는 아까 전의 그 심복이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폐하께서 들어오랍니다!”

    “정말인가요?”

    “네! 성문 쪽으로 오세요!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이는 문루에서 사라졌다. 이엘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성문 앞에 다가섰다. 어느 순간부터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대충 옷에 털어 냈다.

    이윽고 그렇게나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붉고 거대한 성문이 열리며 미지에 싸여 있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엘은 얼어 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온갖 사자와 호랑이들이 성문 앞에 길을 만들 듯 일정하게 서 있었다. 흥분을 감추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자세를 낮춘 호랑이부터 매서운 눈빛으로 저를 포인팅하는 사자들까지. 공기까지 짓누르는 위압감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마치 처음 노아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한기였다. 뜨거운 대지 열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차가운 한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 너도 책을 봐서 알겠지만 이종족을 만나면 그들 특유의 눈동자에 압도될 수밖에 없어. 황궁에 출입하던 자들은 그럴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라, 나의 엘. 밖으로 나가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존재해. 그렇다고 물러나거나 도망치지 마. 오히려 뒤를 보이면 바로 사냥당할 테니까.’

    땅 아래서 오드가 넌지시 건넸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노아와의 첫 만남을 제외하고는 저런 위압감을 늑대의 영지에선 느끼지 못했다. 노아의 배려였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늑대들의 마음에 들었나. 뭐가 됐든 오드의 말처럼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이고, 늑대들이 비정상이었던 것 같지만.

    “반갑습니다, 손님. 폐하께서 당신을 노아 님의 전령으로 인정하셨으니 들어오세요.”

    분위기와 맞지 않게 발랄하게 말하는 소년에게 꾸벅 인사를 마친 이엘이 드디어 성문 안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나가는 길에 일렬로 서 있는 테르들이 정말 장관이었다. 마치 사냥을 하기 위해 먹이를 쳐다보는 눈길 같았다.

    이곳에 오고 나서야 늑대들이 얼마나 제게 우호적이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때는 노아와 함께 성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거였나. 여기 왕은 얼굴을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손님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네?”

    “씨앗을 주시는 것 또한 생각해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꼬마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참담함으로 물들었다. 분명 노아와 친구라고 앤디가 그랬는데……. 사이가 나쁜 친구였나?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꼬마를 쳐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