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차피 한쪽은 신의 부름을 받은 종족, 나자르. 그 종족일 게 빤했다.
문제가 되는 건 다른 쪽. 노아는 이엘이 머무르던 정원에서 이엘의 이름을 부르며 소란을 떠는 밀로를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저 인간에게선 이상한 냄새가 난다. 전혀 인간 같지 않은 냄새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흔든 노아는 조금 전과 달리 다시 굳은 표정으로 안드로를 쳐다봤다.
“안드로.”
“네, 폐하.”
“손님 맞을 준비를 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코를 찡긋거리며 냄새를 맡은 테르들이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세웠다. 역시 뱀의 냄새는 저 멀리서부터 진동을 한다니까. 짜증을 넘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앤디가 드디어 속력을 늦췄다. 귀밑에서 짧게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붙잡던 이엘이 앤디의 등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다소 추운 날씨였던 늑대들의 영지와는 달리 사자와 호랑이들이 머무는 영지는 따뜻한 편이었다. 줄곧 덮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손에 걸쳐 든 이엘은 생소한 장소 곳곳을 쳐다보느라 바빴다.
“나는 곧 돌아가야 돼.”
“벌써요?”
“어. 폐하께서 널 내려 주고 금방 오라고 하셨거든.”
정말 혼자 들어가야 하구나.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늑대들만큼이나 침입자에게 예민한 종족들의 터전 앞에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위압감에 질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호랑이의 영지이고, 사자의 영지인지 구분이 안 된다.
역사서 너머로 배우기론, 사자와 호랑이 모두 후작가였고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본 것 같은데……. 지금은 또 왕이 하나라니. 어떤 존재들인지 좀체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럼 난 갈게. 일이 끝나는 대로 내가 또 데리러 오면 좋겠지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요즘 꽤 일이 바쁘거든.”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돌아갈게요.”
그 날쌘 늑대를 타고도 일주일이 걸려 도착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종일 달리느라 끼니는 물론이고 잠조차 자지 못한 게 벌써 일주일이었다.
씨를 받는다고 해도 다시 그 거리를 내 보폭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가는 도중에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말은 안 해도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한 이엘을 보며 앤디가 안쓰러운 건지 제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여기서 보름만 버텨 봐. 그 안으로 올 텐데, 혹시 내가 못 오게 되면 다른 놈들을 보내 줄게. 영지에 돌아가는 대로 알아볼 테니.”
“그러지 않으셔도……,”
“네 그 짧은 다리로 우리 영지까지 오려면 몇 년이 걸릴 줄 알고?”
놀리는 투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심 고마웠다.
앤디는 어느덧 제 동생같이 여겨지는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드는 이럴 때면 어린애 취급한다며 싫어했지만 이엘은 크게 싫어하지 않았다. 늑대는 제 무리를 아끼고 보호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이엘과 밀로, 그리고 오드는 이제 앤디에겐 식솔이 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조심히 잘 지내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앤디 님.”
“아차. 한 가지 말해 주려던 걸 잊었네.”
“네?”
“참고로 지금 사자와 호랑이는 같은 영지에 살고 있어.”
“같이 산다고요?”
“응. 모종의 사건 때문에 지금 왕이 하나거든? 그러니까 네가 편지를 건네고 받아야 할 분도 하나야. 그리고 그분은 폐하의 친우분이시기도 해. 근데 아마 이번 일 쉽지 않을 거다.”
“혹시 왕께서 저를 만나지 않으실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그래. 그분은 인간을 정말 혐오하시니까.”
어쩌면 뱀보다 더할지도. 뒤이은 앤디의 말에 이엘이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노아가 쉬운 과제를 내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성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왕궁엔 가까이 갈 수도 없단 말인가? 역시 일부러 내게 무리인 과제를 내준 게 틀림없어.
“왕을 만나는 것부터가 문제겠네요.”
“힘내라, 오헬.”
마치 심판대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이것 하나로 향후 거취가 확정되는, 그런 심판대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이엘은 늑대로 변해 사라져 버린 앤디의 뒷모습을 좇았다.
덥지는 않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이엘은 서신을 품에서 꺼내고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성벽을 쳐다보았다. 잘게 새겨진 붉은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늑대들이 있는 곳이 차갑고 어두웠다면 이곳은 뜨겁고 환한 곳이다.
완전히 녹초가 된 이엘은 졸린 눈을 몇 번 비비다가 제 뺨을 찹찹 내려쳤다. 정신 바싹 차리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여기가 정말 호랑이 굴이잖아.
“그나저나 어디서 왕을 찾지.”
일단 그것부터 막혔다. 사실 왕은 차치하고 사자든 호랑이든, 뭐가 보여야 말이지. 도무지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땅이었다.
늑대들이 있는 곳에 비해 땅도 비옥하고 제법 나쁘지 않은 터전인데도 그 자연을 즐기고 있어야 할 이종족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은신을 하는 뱀들도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을 텐데. 이엘은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며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우선은 성문을 두드려 볼까. 혹시 몰라 가져온 검집 손잡이에 손을 대고 떨리는 숨을 모아 내쉬었다. 그러고는 힘차게, 그러나 무겁지는 않게 똑똑― 성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문지기조차 없는 걸까. 이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저기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종내에는 거칠게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일주일을 달려 미명이 넘어서야 도착을 했는데…….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고는 해도 성 문지기는 문을 지켜야 하질 않는가. 방어를 전혀 하지 않는 건지, 그게 아니면 모두가 나태한 건지.
“저기요!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나중에 가서는 노아가 앤디에게 명령해서 저를 아예 다른 곳으로 축출시킨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자나 호랑이는커녕, 그냥 여긴 버려진 땅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못 먹고 잠까지 자지 못해 지쳐 버린 이엘은 결국 담벼락에 기댄 채로 쭈그려 앉았다.
몇 시간이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이엘은 크게 하품하며 졸린 눈을 비비적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감겨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뜨뜻한 해가 머리통 위에 내리쬘 즈음, 성벽에 머릴 기대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성루 위에서 가만히 작은 뒤통수를 내려보던 남자아이 하나가 재빠르게 내달려 왕궁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꼬마는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날랜 다리로 잘도 계단을 올랐다. 8층까지 뛰어 올라간 이후에야 바닥을 짚고 막힌 숨을 토해 냈다.
“로. 무슨 일이야? 그렇게 뛰면 다친다고 늘 말했잖아.”
“폐, 폐하……. 허억…… 폐하! 그러니까요…… 허억! 그게……!”
“란트 경. 저쪽에 있는 물을 로에게 주겠나.”
“네? 저 녀석한테요?”
우락부락한 몸통의 남자가 반문하자 소년 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지금 누구에게 물을 주라고 했겠나? 그대가 로에게 주도록. 단호한 왕의 명령에 란트 경은 똥 씹은 표정으로 협탁에 올려진 잔을 들고 로에게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년 로는 란트에게 받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입가를 손등으로 슥 닦으며 와다다다 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왔어요! 그러니까 인간 말이에요! 노아 님께서 정말 인간을 보내셨다니까요?”
“…….”
“제가 분명히 봤는데 앤디 님을 타고 왔어요. 진짜 앤디 님 맞아요!”
앤디의 등을 타고 도착한 인간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단 말인가. 늑대들이 다시 인간과 어울리기 시작했나? 그 등에 인간을 태우는 날이 다시 오게 될 줄이야. 레온은 의자에 기대앉아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물론 1차 종족 전쟁이 있기 전에는 인간과 가장 가까웠던 게 늑대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만큼 배신과 피해가 가장 컸던 늑대들은 전쟁 이후 인간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란트는 제 왕을 힐끔 보다가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처리하고 올까요? 그의 물음에 레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경은 가만히 있게. 그의 말에 란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뗐다. 로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다시 물을 따라 꼴깍꼴깍 마셨다.
“근데 이상하네. 노아가 말도 없이 인간을 보낼 리가 없는데.”
“손에 서신을 들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일단 문을 열어 줄까.”
“근데 벌써 냄새를 맡고 모여든 것 같은데요?”
로의 재잘거림에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틀에 걸터앉아 밖을 쳐다보니 로의 말대로 테르들이 하나둘 문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어차피 레온의 허락 없이는 문이 열릴 일도 없고 인간을 사냥할 일도 없지만, 이렇게 위에서 보니 정말 고양이 앞에 선 쥐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그 쥐라는 놈은 아무것도 모르고 벽에 기대 잠이나 자고 있다니.
여전히 인간은 속 편하구나. 혀를 찼다.
왼편에는 사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른편에는 호랑이들이 모여들었다. 우논이나 둔과는 달리 식사를 자주, 또 양껏 해야만 하는 테르들이 태반이었다. 개중에는 질서를 잡겠다고 끼어든 둔 몇 마리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우논이 아니면 정리가 되지 않는 세계였다.
란트가 그 상황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레온은 그저 미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폐하? 저대로 문을 열면 먹힐 것 같은데요? 사냥하라는 뜻인 줄 알고 테르들이 달려들 것 같아요.”
“로. 우선은 네가 성루를 타고 내려가 저 인간이 들고 있는 서신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와.”
“네!”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로가 또 빠른 다리로 성을 빠져나갔다. 레온은 로가 나가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와 밀린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란트도 밖이 궁금했지만 별수 없이 왕의 근처로 다가가 굳은 자세를 고수해야 했다. 그런 란트의 모습에 레온이 결국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란트 경. 그렇게 밖이 궁금한가?”
“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보다 저 인간을 늑대들의 왕이 보낸 게 정말 맞을까요?”
“앤디를 타고 왔다면 거의 맞겠지. 다만 노아가 무슨 생각으로 보낸 건지는 모르겠네. 뭐, 자기 손으로 죽이기 귀찮으니 이쪽에서 처리해 달라는 뜻일 수도 있고.”
무슨 저런 살벌한 농담을. 란트는 이맛살을 구겼다. 사실 란트에게도 인간은 먹이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레온처럼 혐오하는 쪽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따금 왕이 저런 농담을 할 때마다 괜히 제 간이 다 떨렸다.
실제로 레온은 제 무리의 종족들이 인간을 보이는 족족 죽이는 것에 완전히 방관했다. 덕분에 영지 근방으로는 인간이 아예 살 수 없게 되었다. 늑대들처럼 자신의 소관하에 인간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 따위도 하지 않았다. 더러운 오물 취급하듯 제 세계에서 인간이란 종족을 아예 지워 냈다.
그런 레온에게 인간을 보냈다? 란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노아의 의중을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로 죽이라고 보낸 게 맞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