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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5화 (25/488)

25화

“물론 책임은 네게 지우지 않으마. 네 목숨을 살려 줬다고 하니 네 뜻을 물어보는 것이다.”

늑대는 신념이 곧고 충성심이 강한 동물이다. 주드는 제 주인을 물끄러미 올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그는 좋은 인간입니다. 제 목숨을 살려 주었어요.”

“…….”

“그리고 저자들도 모두 좋은 인간들입니다.”

투닥거리고 있던 입씨름을 멈춘 밀로가 큰 눈을 뜨며 주드를 쳐다봤다. 쟤가 웬일로 맞는 말을 하냐?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오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드는 노아의 앞에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살짝 떨고 있었다. 앤디는 혀를 쯧쯧 찼다. 늑대 놈이 저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살아? 아무리 아직 덜 자랐다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아가 말없이 주드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반대로 그녀를 향해선 냉정하게 경고했다.

“좋아. 하지만 네가 말했듯 나는 네게서 의심을 완전히 거둔 게 아니다. 언젠가 네가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때가 올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노아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고수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열린 성문을 넘어 노아의 뒤를 따라 이엘의 일행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거대한 곳이었다. 곳곳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밀로에게서 시선을 돌려 몰려드는 늑대들을 응시했다. 길게 들어서는 노아의 행렬을 향해 여러 마리의 늑대들이 바닥에 엎드려 왕을 맞았다.

주드는 그중 제 친구 무리를 찾아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커다란 늑대로 변한 주드의 주변으로 작은 늑대 개체들이 몇 엉겨 붙었다. 서로 잔디 위에서 뒹굴며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니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이 너무 순간적이어서 제 자신도 못 알아챘지만.

“정원은 네게 맡기겠다.”

“네? 정원이요?”

“아까 네가 정원지기라도 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노아의 어머니였던 선대 공작 부인이 죽기 전만 하더라도 늑대들의 성은 붉은 장미로 무성했다. 그녀의 소유였던 장미정원엔 갖가지 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폈고, 어린 노아는 어미를 따라 정원 거니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어미가 떠나고, 아비가 따라 죽었다. 그 이후로 정원은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선대 공작 부인이 아끼는 곳임을 알고 있으니 그 땅은 암묵적으로 금지구역이 되어 버린 터라 더더욱 황폐해져 갔다.

노아는 물끄러미 정원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어린 날의 추억이 잔뜩 묻은 곳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폐하. 그럼 거처를 내줄까요?”

앤디의 물음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먼저 성 쪽으로 향했다. 남겨진 이엘은 물끄러미 노아의 등 뒤를 쳐다보다가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정원 쪽에 가닿았다.

그녀의 정원에도 이곳에 폈던 꽃과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늑대의 정원도, 황녀의 정원도, 그 어느 곳에도 그런 꽃들은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예. 늑대 놈들이 꽁꽁 숨겼든, 아니면 도망을 쳤든. 확실한 게 전혀 없어서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

버럭 호통을 치는 로빈의 목소리에 뱀들이 모두 겁에 질렸다. 그의 손 안에 붙잡혀 있던 뱀 여럿은 이미 손아귀에서 숨통이 막혀 죽은 지 오래였다.

벌써 며칠째 광분하는 왕의 노여움에 죄 없는 테르들의 목숨만 죽어 나가고 있었다. 당시 감시를 맡았던 것은 상급 계층인 우논과 둔들이었는데도 괜한 화풀이로 목숨을 잃는 것은 힘이 없는 테르들이었다.

아무리 개체가 많은 테르라 할지라도 암컷이 사라진 지금, 늘어날 순 없고 줄어들기만 할 뿐인데……. 이로써 병력이 또 얼마나 줄어들었단 말인가. 리플은 제 이마를 짚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그의 간언에도 로빈은 좀처럼 이성을 찾지 못했다.

갑작스런 늑대들의 공격으로 며칠 자리를 비운 새에 잡아 놓은 인간이 사라졌다? 그 인간은 로빈이 손에 넣은 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존재였다. 설령 거짓말로 그를 농간했다고 하더라도 연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로빈에겐 가둬 놓아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저 본보기로 테르들을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나?”

“…….”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귀빈이라고. 너희들 앞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송구합니다, 폐하.”

적당히 비위를 맞춰 줄 게 아니었다. 로빈의 노여움은 며칠 안으로 쉬이 가라앉을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적당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 목숨을 건 각오가 필요했다.

*

“오헬!”

“미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탑 위에서부터 무언가 우르르 쏟아졌다. 탑에 뚫린 창을 짚고 소리를 지르던 밀로가 중심을 잃으며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어째 잠잠하다 했다. 이엘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밀로가 떨어뜨린 것을 쳐다보다가 잡초에 검지가 베였다. 밀로만 탓할 게 아니었다. 자신도 매한가지였다.

손가락 구석구석이 핏덩이와 상흔으로 얼룩덜룩했다. 탄광지에서의 일이 손에 익기도 전에 종업이 바뀌었으니 손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땅 아래서 오드가 가져다준 책으로나마 사전에 익혀 둔 것이 다행이었다. 이엘은 피 묻은 손가락을 습관적으로 입에 대려다가 소매 끝을 찢어 대충 휘감았다.

오헬! 나! 지금! 내려가! 쩌렁쩌렁 탑이 죄 울리도록 소리를 지른 밀로 때문에 이엘은 또 한 차례 미간을 찌푸렸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눈치 없는 척 사는 건지. 시간이 지나도 밀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처음엔 그의 태도가 늑대들의 신경을 거스를까 염려됐지만, 며칠 간 막무가내로 지내는데도 늑대들은 딱히 제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드와 밀로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에 한숨을 돌렸다.

“오헬.”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이엘이 잡초를 뜯던 손을 멈췄다. 키가 유난히 크고 눈빛이 매서운 남자였다. 노아의 최측근 중 하나. 이름이 아마 안드로였나?

주섬주섬 일어나 대충 손을 옷에 비벼 닦아 냈다. 안드로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엘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다 갖고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폐하께서 오라고 하시니 좀 정리하는 게 좋겠군. 더러운 손이라도 닦아라.”

“네. 감사합니다, 안드로 님.”

안드로는 노아보다 더 무뚝뚝했다. 다른 늑대들과 달리 저를 향한 경계를 여전히 지우지 않은 채였다. 여전히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시선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 외의 늑대들은 의외로 비교적 온화했다. 특히 테르들은 아닌 척 제게 은근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고, 벌써 사교성 좋은 밀로와는 야밤에 영지 너머로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늑대들은 이엘의 무리를 속박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밀로를 그냥 두었으며, 심지어 이따금 밤에 사라지는 오드의 행방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거나, 이 정도는 위협적인 존재로도 취급 안 한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이엘에게는 감시가 몇 붙어 있었다. 장난치며 말을 숱하게 거는 앤디가 바로 그 감시자였다. 겉으로는 친한 척 말을 붙여 왔지만 사실은 저를 감시하고자 보낸 것이다.

게다가 밀로와 오드를 만날 수조차 없게 아예 생활하는 공간을 분리시켜 버렸다. 조금 전처럼 우연히 밀로와 마주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폐하. 데리고 왔습니다.”

안쪽에서 별다른 답이 없었지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왕성은 영지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그 높이와 넓이가 상당했다. 왕의 측근들은 성 밖이 아닌 성 안에서 함께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안드로가 건넸던 손수건을 꾹 쥐었다. 웬만해선 마주치기 힘든 왕이 갑자기 저를 왜 불렀을까?

“폐하를 뵙습니다.”

꾸벅 숙인 작은 정수리를 쳐다보며 노아는 처리하고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그는 안드로를 비롯하여 머물러 있던 자들에게 손을 저었다. 그 신호가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자들과 모닥불을 쬐고 있던 테르 몇 마리가 전부 나갔다.

노아는 펜을 내려놓고 종이 하나를 둘둘 말더니 여전히 고개를 숙인 이엘에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장미를 본 적이 있나?”

“네? 장미요?”

“그래. 붉은 장미.”

“아…… 예. 예전에 황궁 문이 열렸을 때 거기서 본 것 같습니다.”

“저 정원은 원래 장미가 피어 있던 곳이다.”

“…….”

“하지만 주인이 떠난 뒤로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서 엉망이 되어 버렸지.”

창 너머로 황폐하게 변한 정원을 쳐다봤다. 그래도 근 며칠, 사람 손을 타 잡초가 뽑힌 덕분에 아주 형편없지는 않아 보였다.

노아는 들고 있던 말린 서신을 이엘에게 건넸다. 그녀는 건네받은 두루마리와 노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문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네 믿음을 보여 주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지?”

“네, 폐하.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그 씨앗을 들고 사자와 호랑이의 무리에 다녀와라.”

“네……?”

“그곳에 붉은 장미가 있다. 그 씨를 네가 가져오면 돼.”

“그것이 제가 폐하께 믿음을 보이는 일입니까?”

“그래.”

별다른 답을 할 수 없었다. 거절할 수도 없거니와 아니, 거절할 형편 자체가 안 됐으니까.

이엘은 어떻게 해서든 노아에게 제 진심을 보여야만 했다. 지난 며칠 간 이곳에서의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던가. 처음으로 깊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누가 들어오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지내던 인간들의 마을과는 완전히 달랐다. 늑대들은 이종족들 중에서도 가장 상위 종족이었고 그들의 영토 안에 함부로 드나드는 다른 종은 없었다.

그렇게 찾던, 자신을 보호해 줄 울타리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적. 기름을 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영지 안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게 노아의 믿음을 사야만 하는 이유였다. 이엘은 서신을 품 안에 넣고 주먹을 바르쥐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의 영지는 여기서 꽤 멀어. 앤디를 붙여 줄 테니 다녀오도록.”

“네. 감사합니다, 폐하.”

“그 서신은 사자와 호랑이의 왕에게 전해 주면 된다.”

“두 왕 모두에게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왕은 하나야.”

“…….”

“그리고 그는 만만치 않은 자니, 네 스스로 잘 찾아보도록 해라.”

그렇게 그녀는 쫓겨나듯 영지를 떠났다. 노아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팔짱을 낀 채 밖을 내다봤다. 부름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잿빛 늑대 등 위에 올라탄 이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쯤, 문이 열리고 테르 몇 마리와 안드로가 다시 들어섰다. 안드로는 창을 바라보고 있는 노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노아. 언제까지 저 인간을 두고 볼 건데.”

“…….”

“네게는 아비가 연구원이라고 했다며. 탄광지에는 레타 출신이라고 했다더라. 출신이 불분명한 자야.”

“어차피 인간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본 적 없어.”

“하지만 노아……,”

“그만해, 형.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으니까. 안 그래도 뱀들 냄새 때문에 속 안 좋아.”

“그래. 벌써 경계를 넘었어. 웬일로 능력도 쓰지 않고 대놓고 걸어오더군.”

“뱀들의 얕은 수엔 이미 질렸어. 시키는 대로 일 처리 잘해 놔.”

“그보다 저 멍청한 인간 놈이랑 말 없는 인간은 그대로 둘 건가?”

“…….”

“멍청한 쪽은 좀 수상하지 않아?”

“그러게. 냄새가 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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