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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화 (24/488)

24화

*

“그냥 타고 가라니까?”

“그럴 순 없죠.”

“와, 저 똥고집. 야! 느려 터진 너희 때문에 우리 늘어지는 거 안 보이냐? 그냥 타!”

결국 성질이 난 앤디가 제 명치를 두드리며 걸음을 멈췄다. 내가 태워 주겠다는데 왜 저가 거부를 해?

앤디의 말처럼 느려 터진 이엘과 오드, 밀로로 인해 늑대들의 행렬이 다소 지체되고 있었다. 앞서가 버린 선발대를 제외하고 남겨진 후발대는 저희끼리 짜증을 주고받으며 눈으로 그들을 흘겼다. 가뜩이나 못마땅한 인간들인데 앤디 님이 타라면 탈 것이지. 특히 함께 왔던 테르―제 3계급―들의 아우성이 컸다.

가만히 제 형을 따라 걷던 주드가 먼저 본체화를 해 버렸다. 커다랗게 변한 잿빛 늑대가 이엘의 앞에 순순히 제 무릎을 내려 꿇었다.

“형 말고 내 등에 타.”

“아직 다 낫지도 않았잖아.”

“고집 좀 그만 부려. 우리 폐하는 자애로우신 분이 아니라고! 그리고 폐하까지 이곳에 오게 만든 내 입장 좀 생각해 줘.”

어째 낮과 반대 입장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이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고집을 부리며 밥을 먹지 않겠다고 투쟁하던 그 주드에게 혼나는 기분에 야트막한 한숨이 나왔다.

결국 제 고집을 꺾은 이엘이 주드의 등 위로 올라탔다. 어린 개체라고는 했지만 역시 우논은 우논이었다. 커다란 늑대의 등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이엘을 보며 앤디가 키킥 웃음을 터뜨렸다.

“넌 진짜 뭘 해도 어설프구나?”

“놀리지 마십시오. 무섭단 말이에요.”

“그래도 내 동생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쟤가 원래 아무나 태워 주진 않거든.”

뭐, 태워 줄 인간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지만. 앤디의 말에 주드가 으르렁거렸다.

동생의 귀여운 짜증에 어깨를 으쓱하던 앤디 역시 늑대로 순식간에 변하더니, 이번엔 밀로와 오드에게 제 등을 내밀었다. 물론 주드와는 달리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춰 주지는 않았다. 탈 수 있으면 타라는 태세였다.

“어쨌든 너희도 오헬의 일행이니 태워 주마. 영광으로 알라고.”

“내가 늑대 등에 왜 타?”

“야. 그럼 걸어올래?”

“걸어가도 되잖아. 늑대들은 냄새난단 말이야. 윽, 고약해.”

기함할 말을 잘도 하는 밀로를 보며 이엘은 제 이마를 짚었다. 지금은 저자세로 나가도 모자란데 쟤는 정말 겁도 없고 눈치도 없다. 미르, 잔말 말고 타! 그녀의 고함에 그제야 밀로가 꼬리를 내리더니 툴툴거리며 앤디의 등에 올라탔다.

밀로와 앤디가 투닥거리는 새에 오드도 그의 등에 올라탔다. 주드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필두로 후발대에 남겨진 늑대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엘은 흔들리는 늑대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제 뺨을 긁는 찬 바람을 만끽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탓에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고요한 새벽의 공기를 놓치기 싫었다.

이건 오염된 땅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것이다. 살아 있는 자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녀가 잡은 제 털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만으로도 이엘이 지금 얼마나 벅찬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감정이 전이된 것처럼 주드도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오헬. 기분이 좋아?”

“글쎄.”

“네가 좋아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넌 늑대가 되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같아. 어린애 같지 않고.”

괜히 민망함에 말을 돌렸다. 좋아하는 게 이렇게나 느껴지는데 아닌 척하긴. 그녀의 목소리에 주드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주드는 빠른 다리로 후발대 무리를 빠져나와 가장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선발대까지 따라잡은 그는 다른 늑대의 등 위에 올라탄 노아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허락을 구했다. 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주드가 선발대마저 앞질러 드넓은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외견은 어린애 같아도 살아온 나이는 너랑 비슷하다니까?”

“그래, 알겠어.”

“늑대가 되면 불안한 게 사라져. 생각도 차분해지거든.”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아침에 투정하던 그 꼬마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다가 머뭇거리던 입술을 뗐다.

“주드. 고마워.”

“뭐가?”

“암시장 말이야. 네 덕분에 저 마을이 불타는 일은 면했잖아.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아 줘서 고마워.”

“폐하께서 나서면 정말 끝이 날 거야. 그 마을은 물론이고 인간 종족 전체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래. 맞아. 그럴 거야…….”

“나 사실 제대로 만난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오헬.”

“…….”

“네가 좋은 인간이기 때문에 나도 인간이란 종족이 마음에 들었거든.”

“……응.”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야. 고마워할 필요 없어.”

속도를 줄인 주드가 코를 땅에 박더니 무언가를 이빨로 뜯었다. 그러고는 위로 툭 던졌다. 얼결에 그것을 받은 이엘이 제 손바닥에 올려놓은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꽃이었다.

“꽃을 좋아하지? 네 방에서 봤어.”

그간 화가 난 이엘을 풀어 주려 밀로가 부단히도 갖다 바친 것들이었다. 그 사소한 것이 누군가에겐 큰 기쁨을 안겨 준다는 사실을, 밀로처럼 주드도 깨달은 듯했다. 고마워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주드를 대신한 꽃이 팔랑거렸다.

고마워. 이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주드가 기분 좋은 하울링을 터뜨렸다. 사박사박 걷던 걸음을 점차 죽여 커다란 담장 아래서 주드는 이엘을 내려 주었다.

불과 며칠 전에 잠깐 머물렀던 곳이었다. 노아의 커다란 성. 과거엔 공작가였던 그곳.

그러고 보니 과거 늑대 공작이 황실을 자주 오가곤 했는데……. 궁 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살던 이엘이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아마도 그건 선대 공작이었을 것이다.

그 공작은 어떻게 됐을까? 좋은 분이라고 유모가 그랬는데……. 노아의 아버지였을까?

“뭘 뚱하니 서 있지?”

바람처럼 스며든 노아가 손짓을 하자 커다란 성문이 열렸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에 탄광지로 가기 위해 이 성을 나올 땐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과연 과거 공작가의 영지다웠다. 그 무리가 새롭게 왕정을 시작하게 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영지였다.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공작들의 영지였다. 그리고 이엘의 침실 창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늑대들의 영지였다. 창 너머로 보였던 공작의 영지는 어린 황녀에게 늘 호기심을 부추기는 곳이었다.

그리고 붉은 장미가 울창하게 퍼져 있는 곳. 황녀의 정원과 같은 꽃이 피는 땅이기도 했다.

어릴 적 유일하게 황궁을 나와 제국 행렬 행사가 있을 때에도 이엘은 커다란 마차 안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림자처럼 빛이 있는 곳엔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됐다. 이온이 당당하게 귀족들의 안내를 받으며 황제와 함께 제국을 시찰할 때도 이엘은 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

공작가를 시찰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엘은 황제와 이온이 머무른 공작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머물렀고 덕분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공작가의 정원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정원에 피어난 꽃과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했는데……. 황녀가 아닌 다른 신분으로 공작가, 이제는 왕궁이 된 늑대들의 영지 앞에 서 있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저것들은 네 식솔인가?”

노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힐끔 보며 엄지로 제 등 뒤를 가리켰다. 아직도 투닥거리는 앤디와 밀로, 그리고 묵묵히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는 오드가 보였다.

예, 폐하. 노아는 조용히 읊조리는 이엘의 정수리를 내려보았다. 비가 내리던 뱀의 소굴에서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세였다. 어차피 인간이란 종족에게 신물이 난 지 오래라 태세 변환이 못마땅하거나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탄광지에서 고생깨나 한 모양이지. 그러니 비교적 일이 쉬운 제 성으로 들여 달라고 한 게 틀림없다. 어차피 제 잇속만 챙기는 종족이란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노아는 인간 소년을 바라보며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내가 대체 널 어떻게 믿고 성 안에 들이지?”

“…….”

“처음 너를 본 곳은 뱀의 소굴이었고, 넌 뱀들이 비상령까지 내리며 수배하고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 늑대는 뱀과 대척점에 있지. 그런데 내가 대체 너의 어떤 점을 믿고 내 성에 들일 수 있을까.”

쉽게 들어갈 수는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엘은 마른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생길 정도로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오드 역시 지팡이를 쥔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오드는 그녀에게 해결책을 줄 수 없다. 모든 건 이엘의 선택이며, 그녀의 책임이었다. 주드를 구한 것도 그녀였고, 늑대들의 소굴로 온 것도 그녀였다.

“저는 피할 곳이 필요합니다. 안전하고 강한 곳이요.”

“…….”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아비가 연구원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엔 황실에 몸을 담갔던 자들이 모조리 사라졌죠. 뱀들에겐 연구를 완성시킬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지식의 일부나마 알고 있습니다. 폐하. 저는 그 연구를 완성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폐단은 또 다른 폐단을 낳을 뿐입니다.”

“…….”

“물론 폐하께서 제게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하실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사력을 다해 제 몸을 숨기기에도 급급합니다. 폐하, 정녕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제게 어떤 과제를 주셔도 저는 그에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당신께 제 믿음을 보여 드릴 겁니다. 부디 그렇게라도 저를 확인해 주십시오.”

결의에 찬 이엘의 녹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노아는 시선을 돌려 주드를 바라보았다. 인간으로 돌아온 주드는 고작 이엘의 허리쯤밖에 오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주드는 노아의 눈빛을 맞으며 어깨를 흠칫 떨었다.

주드, 내 앞으로 와라. 노아의 명령에 쭈뼛쭈뼛 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 인간 소년을 믿어도 될지는 네게 맡기겠다.”

“네, 네?! 폐하,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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